[가만한 당신] 하일랜드  '보디(오두막)'의 수호자들

최윤필 2022. 7. 11.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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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근 마을 나이 든 이들의 기억 속에나 어렴풋이 존재하던 그 보디들이 2차대전 이후 하일랜드 트레킹에 먼저 눈뜬 이들에 의해 하나 둘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거친 밤을 보내고 맞이한 보디의 아침.

결국 무너지거나 다른 사정으로 이용이 힘들어진 것들을 빼고도, 그들은 왕실 소유 2채를 포함해 106 채(스코틀랜드 85채, 잉글랜드 12채, 웨일스 9채)의 보디를 관리하고 있고, 그 중 2채는 MBA가 회비로 매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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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나드 히스(Bernard Heath, 1928.9.22~2022.3.31)
베티 히스(Betty Heath, 1932.1.16~ 2021.2.22

영국 스코틀랜드 북서부 고지(高地)의 행정 지명이 하일랜드(Highland)다. 스코틀랜드 전체 면적의 33%에 이르는 너른 땅이지만 인구는 4% 남짓에 불과한 23만5,400명(2020년). 핀란드 라플란드나 아이슬란드 등 북극권 일부를 빼면 유럽서 인구밀도(8명/㎢)가 가장 낮은 지역이다.

하일랜드는 4계절 사납고 변덕스러운 돌풍과 비바람(눈폭풍)으로 트레커들을 괴롭히기로 악명높은 여행지다. 영국인들은 하일랜드 트레킹을 '어드벤처'라 말하기도 한다. istock 사진.

그건 브리튼 섬 최고봉인 벤 네비스(Ben Nevis, 1345m)를 비롯한 수많은 산과 구릉과 협곡과 이탄 습지들로 끝간 데 없이 출렁이는 괴팍한 지형 때문이다. 고지답게 날씨도 거칠고 변덕스러워 4계절 툭하면 돌풍을 동반한 강풍과 폭우(폭설)가 몰아치고, 운무도 짙어 방향조차 가늠하기 힘들 때가 잦다. 민가에서 조금만 멀어지면 길도 문명의 흔적도 가뭇없이 사라진다. 그 대신 숨을 멎게 하는 비경들이 잇달아 펼쳐지고, 일주일이고 열흘이고 인기척조차 듣지 않을 수 있는 피안의 적요가 있다. 금욕적 희열을 추구하는 도전적 트레커들이 격절의 아늑함을 찾아 하일랜드 심부로 파고드는 까닭이 그것이고, 내셔널지오그래픽이 ‘필생의 여행지(tour of lifetime)'로 추천하는 근거가 그것이다. 또 그만큼 위험한 곳이다. 2021년 스코틀랜드 산악구조대(SMR)가 사고-조난 현장에서 수습한 총 19구의 시신 가운데 정작 산악등반 희생자는 7명에 불과했다. 그나마 산에는 길(trail)과 안내판이 있기 때문이다.

그 너른 야생의 영지 곳곳에 ‘보디(Bothy)’가 숨어 있다. 스코티시 게일어 ‘보단(bothan, 움막)’에서 유래했다는 보디는 한국의 고산 국립공원에 있는 대피소와 비슷한 작고 소박한 건물이다. 하지만 공공기관이 지어 관리하는 대피소와 달리 보디는 수십, 수백 년 전 사냥꾼이나 양치기들이 임시 거처로 지어 쓰다가 긴 세월 방치된 사유 건물이다.

인근 마을 나이 든 이들의 기억 속에나 어렴풋이 존재하던 그 보디들이 2차대전 이후 하일랜드 트레킹에 먼저 눈뜬 이들에 의해 하나 둘 알려지기 시작했다. 추위와 사투하며 헤매던 중 어느 골짜기에서 기적처럼 보디를 발견해 하룻밤 비바람을 면하며 목숨을 구했다는 사연들. 하지만 길을 기억할 수 없어 다시 찾아갈 자신은 없다는, 거짓말 같은 이야기들.

그렇게 거친 밤을 보내고 맞이한 보디의 아침. 맑게 갠 하늘과 나무조차 드문 고원의 울퉁불퉁한 들판, 늦가을 들과 골짜기를 분홍-보랏빛 융단처럼 장식하는 야생화 히스(또는 헤더, Heath) 군락들. 풀잎 꽃잎이 머금은 이슬과 습지의 물기들이 튕겨 내는 빛의 입자들과 그 빛에 무한히 반사되며 눈부시게 확장하는 하일랜드의 비경. 다시 짐을 챙겨 길 떠나는 트레커의 등 뒤로, 보호색처럼 흙과 돌로만 외장한 채 빛 속에 무심히 선, 오직 흐린 원경으로만 자태를 드러내는 보디. 고대 동양인들이 갈망했다는 무릉도원처럼, 운이 닿아야 만날 수 있다는 보디는 하일랜드 트레커들에겐 유혹과 낭만의 절정으로, 전설처럼 각인됐다.

수십 수백년 전 사냥꾼과 양치기 등이 임시 거처로 쓰던 움막인 '보디'들. 영국, 특히 인적 드문 하일랜드와 북해의 섬들에 알려진 바 약 200여 채의 보디가 세월에 삭아가고 있다.MBA 사진

지도에도 없이 풍문으로만 존재하던 그 보디들의 실체를 일부나마 대중에 공개한 건, 집요한 트레커 겸 여행작가 제프 앨런(Geoff Allan)의 2017년 책 ‘스코티시 보디 바이블(Scottish Bothy Bible)’이었다. 매혹적인 사진과 함께 보디들의 개략적인 위치와 시설, 풍광 등을 소개한 그 책 덕에 보디 탐색-탐방을 위해 짐을 싸는 이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트레킹이 아니라 ‘보딩(Bothying)’을 즐기는, 자칭 보디어(bothier)들이었다.

잉글랜드 웨스트요크셔 주 허더즈필드(Huddersfield)의 버나드 히스(Bernard Heath, 1928.9.22~2022.3.31)는 보딩이란 말도 없던 40년대부터 보딩을 시작한, 원년 보디어 중 한 명이다. 사실 그는 자전거 마니아였다. 기계 수리업자 아버지와 재봉사 어머니의 막내로 태어난 그가 만 16세에 학교를 중퇴한 것도, 해군 복무 후 회계사 자격증을 딴 것도, 사무실에 매여 살기 싫어 기술대학 강사가 된 것도, 마흔이 넘도록 독신으로 지낸 것도 모두 자전거 때문이었다. 20대 초에 ‘허더즈필드 스타 휠러스(Huddersfield Star Wheelers)'라는 라이더 단체를 만들어 이끌었고, 더 거친 오프로드 라이딩을 즐기기 위해 55년엔 ‘Rough Stuff Fellowship’이라는 모임도 결성했다. 2세기 로마 제국이 문명과 야만의 경계로 세운 잉글랜드 북부 하드리아누스 방벽(Hadrian’s Wall)을 넘어 스코틀랜드 업랜드(Southern Uplands)로, 저지(lowland)를 지나 하일랜드로, 58년엔 바다 건너 아이슬란드를 알려진 바 최초로 바이크로 종주했다. 그에게 보디는 장기-장거리 오프로드 라이딩의 값진 징검다리였다.

MBA 설립자 버나드 히스. 바이크 마니아인 그는 만 74세이던 2004년 브리튼 섬 최남단에서 북단까지 2,400㎞ 코스를 바이크로 종단하기도 했다. MBA 원년 회원인 그의 친구 데니스 몰리슨(Denis Mollison)의 사진, Guardian에서.

그는 65년 1월 첫날 아침도 스코틀랜드 남부 업랜드 갤러웨이 힐스(Galloway Hills)의, 문짝조차 덜렁거리는 한 보디에서 맞이했고, 방명록에서 누군가가 남긴 글-“이 낡은 보디들을 지키기 위해 뭔가 해야 하지 않을까”-을 읽게 됐다고 한다. 만 37세의 그는 그해 여름, 친구와 라이딩 동호회원 등 스무 명 가량을 이끌고 그 보디로 되돌아갔고, 3주 넘게 머물며 또 먼 길을 오가며 보디의 문과 창틀, 지붕 등을 수리했다. ‘턴스킨(Tunskeen)’이란 이름의 보디가 그렇게 되살아났다. 물론 소유권자를 수소문해 허락을 받은 뒤였다. 최대한 원형에 가깝게 보수할 테니 지금껏 그랬듯 누구든 이용할 수 있게 해달라는 조건이었다.

그는 그해 말 보디 보수 자원봉사 단체인 ‘MBA(Mountain Bothies Association)’를 설립했다. MBA는 이후 4년간 하일랜드 북서단 사냥꾼 오두막서부터 남부 페나인 산맥의 버려진 광부 움막까지 15채의 보디를 단돈 500 파운드를 들여 보수했다. 물론 아마추어들의 부실시공이었고, 새로 얹은 지붕이 1년도 못 버티고 바람에 날아간 적도 있었다. 하지만 경험이 쌓이면서 요령도 점차 나아졌고, 건축 기술자 신규 회원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회원이 늘면서 회비도 늘어났고, 프로젝트도 영국 전역으로 확산됐다. 74년부터 분기 소식지를 발간했고, 이듬해에 정식 자선봉사단체로 등록할 무렵 그들이 되살린 보디는 32채로 늘어났다. 근년의 회원수는 약 4,400명. MBA는 9개 지역별 지부를 꾸렸고 보수프로젝트 팀 외에 틈틈이 보디를 점검하는 관리팀까지 운영하게 됐다.
MBA 창립 50주년이던 2015년, 히스는 첫 프로젝트인 턴스킨 작업을 회고한 에세이에 이렇게 썼다. “바깥에는 새들을 위한 멋진 횃대를 세웠고/ 안에는 너무 높아서 쓸모는 없을지 모르는 선반도 하나 달았다/ 우리들의 솜씨 없는 노력의 기념물, 만세!”

MBA 설립 전인 1965년, 버나드 히스 등 자원봉사자들이 처음 보수작업을 한 스코틀랜드 갤러웨이 힐스의 보디 '턴스킨'의 과거와 현재 모습. MBA 사진.

MBA 회원들이 손을 본, “거친 자연과 고독을 사랑하는” 모든 이에게 언제나 열려 있는 보디는 모두 123채. 결국 무너지거나 다른 사정으로 이용이 힘들어진 것들을 빼고도, 그들은 왕실 소유 2채를 포함해 106 채(스코틀랜드 85채, 잉글랜드 12채, 웨일스 9채)의 보디를 관리하고 있고, 그 중 2채는 MBA가 회비로 매입했다.

히스가 아내 베티 테일러(Betty Taylor, 1932~2021)를 만난 것도 MBA 창립 행사장에서였다. 베티는 위스키 명가를 이룬 조니 워커(Jonnie Walker)의 증손녀이자 은행가 휴 테일러(Hugh Taylor)의 손녀로 명문 사립 위콤애비스쿨(Wycombe Abbey School)을 졸업했지만, 신부교육보다 거친 등반을 더 좋아해 대학 재학 시절 스코틀랜드의 웬만한 산은 다 섭렵하고 MBA 첫 여성 회원이 됐다. 현장에서 작업 파트너로 일하며 연애한 둘은 70년 결혼, 하일랜드 서소(Thurso)에 정착했다. 79년 히스가 강사직을 그만둔 뒤부턴 마을의 작은 밭을 일구며 금속재활용업체를 20년 넘게 운영했다. 둘은 연애시절처럼 보디 작업 현장을 말년까지 함께 누볐고, 회원들은 부부의 이름 첫 자를 따서 ‘B&B’로 불렀다.

초창기, 회원들끼리만 보디를 이용하자는 제안이 있었다고 한다. B&B는 72년 ‘MBA 정신’이란 걸 명문화했다. ‘회원들이 누릴 수 있는 보상은 단 하나뿐이다. 누가 알아주든 않든, 허물어져가는 보디를 우리 힘으로 구해냈다는 자부심이다.’ 다만 보디가 오래 건재할 수 있도록, 세상에 적극적으로 알리는 건 삼갔다. 시답잖은 낙서나 그래피티로 보디에 자기 흔적을 남기는 이들, 심지어 쓰레기를 두고 오는 이들도 있었다. MBA는 2009년에야 보디들의 개략적인 ‘좌표’를 대중에게 공개했다.
앞서 1991년 영국 왕실은 MBA 설립과 활동의 공로로, 이례적으로 부부 각자에게 영국제국메달(BEM)을 수여했다. 부부가 ‘MBA 정신’을 스스로 저버리고 영광의 보상을 누렸다고 질투하는 회원은 물론 없었다. 그와 별개로 MBA도 2015년, 업적이 빼어난 자원봉사단체에 수여하는 ‘퀸스 어워드’를 수상했다.
보디 이용자가 늘면서 MBA는 보디 수칙도 제정했다. 다른 이용자와 환경을 존중하고, 무엇보다 보디 자체를 존중해야 한다는 게 요지다. 단기 체류만 가능하며, 6명 이상 팀은 이용할 수 없다는 것. 외부에 별도 화장실이 없어 삽을 써야 할 경우에는 보디에서 충분히 멀리 떨어져서 물가를 피해 볼일을 보라는 것. 산양 등 야생동물의 번식기에는 보디 이용을 삼가라는 것 등이다.

턴스킨 작업을 진행한 MBA 창립 회원들. 도보로 최소 한 시간, 한나절도 예사로 걸리는 보디 작업 현장까지 그들은 목재 등 건축 자재를 짊어지고 간다. MBA 사진.

브리튼과 북해 900여 개 섬들에 있는 모든 보디의 숫자는 아무도 모른다. 대학 재학시절부터 보딩을 시작해 일삼아 보디를 찾아 다녔다는 앨런이 파악한 건 총 175채. 그 중 그가 가본 곳은 125곳이고, 책에 소개한 것은 90곳 정도다. 개략적인 위치는 알지만 자신도 아직 찾아내지 못한, “(오사마 빈 라덴까지 찾아낸) 도널드 럼즈펠드의 악명높은 탐지망으로도 아마 찾아낼 수 없을” 보디도 20채 남짓 존재한다고 한 인터뷰에서 말하기도 했다. 그 보디들은 방치되고 잊힌 채 지금도 속절없이 마모되어가고 있을 것이다.

멜 깁슨이 주연한 영화 ‘브레이브 하트’는 13세기 말 잉글랜드 군주 에드워드1세의 침략에 맞서 봉기한 스코틀랜드 민중의 저항을 모티브로 한 작품이다. ‘스코트’인의 땅 스코틀랜드는 1707년 연합법으로 ‘앵글족의 땅’ 잉글랜드에 합병돼 그레이트브리튼 연합왕국이 됐지만, 이전에도 이후로도 잉글랜드와 자주 불화했고, 근년(2014)에는 분리독립 주민투표까지 벌인 바 있다. 많이 희석됐다고는 하지만, 스코틀랜드인이 지니는 민족적 자부심은, 긴 세월 잉글랜드인에게 받아온 경멸과 차별, 증오의 반작용이기도 하다. ‘하드리아누스 방벽’은 그렇게 지금도 ‘스코토포비아(Scotophobia)’ 또는 ‘반스코틀랜드 정서(Anti-Scottish Sentiment)’라는 용어로 남아 있다.

그리고 하일랜드는 그 방벽보다 훨씬 북쪽에 있고, 저지 출신 작가 M.C 비턴이 미스터리 소설 ‘해미시 맥베스’ 시리즈에 자주 묘사하듯 고지인, 즉 하일랜드 출신들은 잉글랜드뿐 아니라 스코틀랜드 저지인들로부터도 편견과 조롱에 시달리곤 한다.
거기에는 지형-지리적 영향 뿐 아니라 문화적 역사적 맥락도 존재한다. 명예혁명으로 집권한 윌리엄 왕가가 제임스2세의 스튜어트 왕조 복위를 위해 봉기한 이른바 ‘자코바이트(Jacobite, 제임스의 라틴어 자코부스에서 차용한 용어)’들을 진압한 뒤, 반란군 주축이던 하일랜드 인들을 법(Act of Proscription 1746)으로 박해한 게 대표적인 예다. 고지인들의 무기를 몰수했고, 타탄(tartan) 문양의 전통의상(겸 전투복)을 못 입게 했고, 스코티시 게일어 대신 영어를 쓰게 했고, 백파이프(bagpipes) 연주까지 금지했다. 반역 책임을 물어 지주들의 땅을 몰수했고, 그 땅을 차지한 잉글랜드 지주들은 밭을 양 방목장으로 앞다퉈 전환했다. 이른바 ‘고지 정비(Highland Clearance)’의 시작이었고, 고지의 산업혁명-자본주의화의 시작이었고, 고지인 디아스포라의 시작이었다.
농업혁명 등으로 하일랜드의 출생률도 경향적으로 높아졌지만, 결코 유출 인구를 따라잡진 못했다. 켈트 문화매체 ‘켈틱 라이프’는 하일랜드 약사에 “오늘날 하일랜드의 후손들은 스코틀랜드 바깥에 훨씬 더 많다”고 썼다.(좀 더 구체적인 역사는 ‘레터’에 상술)
보디들은, 그래서 그냥 빈집이 아니라 고지인들이 겪어온 시련과 편견과 차별의 역사를 제유하는 상징이기도 했다.

1965년 MBA 창립 행사장에서 만나 70년 결혼한 버나드와 베티 히스 부부가 2015년 50주년 창립 기념 케이크를 자르는 모습이다. MBA 사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저지 출신인 히스 부부가 저런 생각으로 보디를 지키려 했던 건 아닐지 모른다. 그들도 여느 보디어들처럼, 언덕 너머 골짜기 뒤에 또 어떤 풍경이 펼쳐질지 궁금해서 자전거를 둘러메고 비탈을 오르고 개울을 건넜을 테고, 어쩌다 보디를 발견해서 너무 멋지고 값져 보여서 그 작업에 평생 매달렸을 것이다.
히스는 만 74세되던 2002년 브리튼 최남단 콘월의 ‘랜즈엔드(Land’s End)’에서 최북단 ‘존오그로츠(John O’Groats)에 이르는 2,400㎞ 최장 오프로드 코스를 자전거로 종단했다. 그는 2년 뒤 뇌졸중으로 쓰러지면서 점차 현장과 멀어졌고, 2019년 요양원에 입소했다.
아내 베티는 혼자 그 일을 이어갔다. 2010년 한 보디 공사현장에서 나무 지게로 침대 철제프레임을 옮기던 만 78세의 베티에게 누가 ‘너무 무겁지 않느냐’고 했다가 ‘어제 옮긴 것보다는 가볍다’는 대답을 들었다는 일화. 스코틀랜드 북단 서덜랜드 ‘케이프 래스(Cape Wrath)' 인근 보디 공사 현장에서 만 86세의 베티가 회원들과 나눠 먹으려고 자두나무에 오른 적도 있었다. 그가 직접 나무를 탄 까닭은 “다른 이에게 시키기엔 너무 위험해서”였다고 한다.

베티는 2020년 남편이 혼자 있던 요양원에 합류했고, 이듬해 2월 향년 89세로 앞질러 별세했다. 그리고 지난 3월 31일 남편 버나드가 아내 뒤를 따랐다. 향년 93세.

최윤필 기자 proos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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