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대항마 나선 X세대 4인방..86세대 복제품인가, 세대교체 주역인가
'86세대 후계자' 이미지는 한계
패거리 정치와 거리 둔 차별성도
더불어민주당의 X세대 4인방은 ‘이재명 대세론’을 뛰어넘을 수 있을까. 민주당의 새 당대표를 뽑는 8월 전당대회를 앞두고 '97세대(90년대 학번·70년대생) 양강·양박'으로 불리는 강병원 강훈식 박용진 박주민 의원 4명이 전원 출사표를 던졌다. 그러나 1970년대 초 김대중 김영삼 이철승의 ‘40대 기수론’과 같은 세대교체 바람으로 이어질지는 미지수다. 이들의 출마에도 ‘어대명’(어차피 당대표는 이재명) 분위기는 여전히 공고하기만 하다. 그러나 양강·양박이 선배 세대와 확 달라진 청사진을 제시할 수 있다면 예상 밖의 결론이 나올 여지는 있다.
97세대의 첫 정치권 전면 등판
지난 20년 가까이 민주당 주류는 민주화 운동 세력인 86세대(80년대 학번·60년대 생)였다. 여러 계파들이 부침을 겪었지만 86세대만은 실질적 대주주로서 생명력을 유지했다. 이는 지난 대선에서 ‘86세대 용퇴론’이 다시 분출한 배경이기도 하다. 86세대가 물러나야 한다는 주장은 늘 “대안이 없다”는 말과 함께 흐지부지됐다. 여기엔 후배 97세대가 세력과 실력 면에서 새로운 당의 간판이 되기에 부족하다는 평가가 깔려 있었다.
50세가 가깝게 ‘만년 후배’였던 이들에게 이재명 의원의 등장은 예상치 못한 돌파구였다. 1964년생이지만 비주류로 민주당 86세대와는 다른 길을 걸어온 이 의원은 대선 패배 이후에도 당원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으며 민주당 최대주주로 남아 있다. 이런 이 의원을 상대하기에 역부족인 86세대가 세대교체의 명분을 갖춘 97세대를 이 의원의 대항마로 밀어 올린 형국이다. 실제 86세대가 주축인 민주당의 최대 의원 모임 ‘더좋은미래’가 강훈식 의원을 지원하고 있고, 친문재인계에서는 홍영표·전해철 의원이 불출마 선언을 하며 간접적으로 강병원 의원을 밀고 있다. 86세대 대표 정치인인 4선 이인영 의원이 지난달 말 양강·양박 4명을 불러 전당대회 출마를 독려하며 길을 터준 것은 86과 97세대 간의 바톤 터치를 상징하는 장면이었다. 박용진 의원은 지난달 30일 출마 기자간담회에서 “정당 정치에서 기존의 선배 그룹이 집단적으로 뒤로 물러나 (후배들에게) 길을 열어주는 경우가 또 있었나 싶다”며 “(그런 선배들의 노력에) 호응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86세대 후계자’ 이미지는 한계
그러나 양강·양박의 출마는 아직 세대교체 바람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 민주당의 한 초선 의원은 이들의 출마에 대해 “의미는 알겠지만 감동이 없다”고 평가했다. 이들이 문화적 다양성과 개인주의 세례를 받은 X세대의 기수 역할보다는 86세대 후계자 행보를 해오는 데 그쳤다는 것이다. 안병진 경희대 미래문명원 교수는 “양강·양박은 그동안 취해온 노선이나 메시지, 태도에 있어서 X세대가 갖는 자유로운 감수성과 다원성 등 장점을 충분히 살리지 못했다”고 말했다.
박성민 정치컨설팅 ‘민’ 대표도 “97세대는 선배들과 차별성 있는 목소리를 내지 못한 ’86 복제품’에 머물렀다”며 “비주류 박용진 의원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문재인 정부의 실책을 앞장서 끌어갔던 분들이라 이제 와서 쇄신을 말해도 설득력이 없게 들린다”고 꼬집었다.
이들은 운동권 출신이라는 경력도 86세대와 비슷하다. 양강·양박 중 강병원(서울대) 강훈식(건국대) 박용진(성균관대) 의원 3명이 대학 총학생회장 출신으로 86세대의 ‘학생운동→정계 입문’ 경로를 답습했다. 박주민 의원도 대학 시절 학생운동을 했고, 이후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참여연대 등 시민사회에서 활동하다가 정계에 입문했다. X세대의 강점인 개성과 자유, 글로벌한 시야가 도드라졌던 영역은 대체로 대중문화, 스타트업, 첨단 금융과 자본시장 등이다. 정치권에 한정된 양강·양박이 이런 영역까지 아우르는 대표성을 가질 수 있느냐는 의문이 제기된다.
X세대인 조정훈 시대전환 의원은 최근 양강·양박의 출마를 두고 “97세대는 탈정치 첫 세대이지만 양강·양박은 대학교 학생회장 경력을 가장 중요시하며 정치인들이 97세대 대표라고 믿는다”고 꼬집었다. 조 의원은 “97세대는 자유로운 개인주의의 첫 세대이지만, 그들은 무조건적인 집단주의의 막내 세대 역할을 해 왔다”며 “86선배들이 170석의 단일대오로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박탈)을 밀어 붙일 때 이들은 그저 침묵하거나 오히려 앞장 섰다”고도 지적했다.
97세대를 보는 정치권 MZ세대(1980년~2000년대생)의 시선도 곱지만은 않다. 1982년생 이동학 민주당 전 최고위원은 양강·양박을 향해 “86세대의 대리인으로 세워진 리더십은 장기적으로 더 위험하다”며 “분노와 복수극의 정치를 답습하려 한다면 (97세대가 아닌) 97년생으로 (주도권이) 넘어가는 것이 맞다”고 직격했다.
86과 다른 학생운동…패거리 정치와 거리 등 차별성도
하지만 86세대와 다른 점도 있다. 박용진 의원은 문재인 정부 시절 당 주류 세력에 쓴 소리를 아끼지 않는 소신 행보로 민주당 강성 지지층의 표적이 될 정도였고, 박주민 의원은 86세대가 부차적 문제로 치부했던 소수자와 사회적 참사 등 새로운 진보 의제를 발굴해 왔다. 강병원 의원은 서울대 총학생회장 시절 민족해방(NL)과 민중민주(PD) 계열로 갈린 채 바뀐 시대에 적응하지 못했던 당시 학생운동의 관성을 깨고자 대안 세력인 ‘21세기 진보학생연합’ 출범을 주도한 경력을 강조한다. 강훈식 의원은 86세대 정치인의 문제로 꼽혔던 패거리 정치, 이념 과잉과 거리를 둔 채 생활 밀착형 의제를 발굴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세대교체 동력 살리려면 새 시대 비전 제시해야”
양강·양박의 한계에도 세대교체의 불씨는 살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많다. 86세대 대표 정치인으로 꼽히다 최근 정계에서 은퇴한 김영춘 전 해양수산부 장관은 이런 이유로 최근 강훈식 의원 후원회장을 맡았다. 김 전 장관은 한국일보와 통화에서 “어떤 조직이든 젊은 세대가 선배 세대에 도전하는 것은 조직을 건강하게 만드는 바람직한 일”이라며 “그런 차원에서 97세대의 도전은 지금의 민주당에 아름답고, 꼭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세대교체론이 유의미한 성과로 이어지려면 국민들의 기대감을 불러 일으킬 수 있는 차별성 있는 비전 제시가 급선무다. 박원호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는 “86세대가 앞세웠던 민주-반민주 구도, 경제적 분배 등 전통적 이슈를 넘어서야 한다”며 “생활 이슈, 지역 이슈 등 그동안 민주당이 잘 대변하지 못했던 의제를 발굴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안병진 교수는 “신(新) 냉전의 도래 등 국제 질서가 급변하는 환경 속에서 97세대는 과거 영국과 미국에서 나왔던 ‘제3의 길’에 준하는 민주당의 신노선을 제기해야 할 임무가 있다”고 조언했다. 안 교수는 “윤리적으로는 내로남불과 단절하고 젠더 문제에도 86세대와 다른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덧붙였다.
지지층만 바라보는 정치에서 탈피해달라는 주문도 나왔다. 김 전 장관은 “민주당을 지지하는 국민들뿐 아니라 중도층이 무엇을 바라는지 잘 포착해서 세대교체의 깃발을 세워야 한다”면서 “그 깃발이 국민들이 지지할 만한 내용이라면 이들의 도전은 성공할 것이고, 그렇지 못하다면 ‘이전 세대와 뭐가 다르냐’는 비판에 직면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성택 기자 highnoon@hankookilbo.com
우태경 기자 taek0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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