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숙원인 ‘전쟁 가능한 국가’ 힘실려… 日국민 반감도 줄어들어

도쿄/최은경 특파원 2022. 7. 11.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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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개헌세력 압승] ‘개헌 반대’ 여론 25%로 최저수준

아베 신조 전 총리가 길거리 유세 연설 중 총격으로 사망한 지 이틀 만에 치러진 참의원 선거에서 집권 여당 자민당이 압승을 거두면서 아베 전 총리가 일생의 과업으로 추진해온 ‘헌법 개정’ 실현 가능성이 어느 때보다 높아졌다는 관측이 나온다.

10일 오후 11시 40분 현재 NHK의 예측에 따르면,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이끄는 자민당(기존 55석)은 총 125명을 새로 뽑는 이번 참의원 선거에서 60~69석을 얻을 것으로 예상됐다. 연립여당 공명당(기존 14석)은 10~14석으로 조사됐다. 자민당은 이번에 새로 뽑는 125석 중 절반 이상을 사실상 단독으로 확보한 것이다. NHK 출구조사에서 “기시다 총리를 지지한다”고 답한 비율은 74%에 달했다. 자민당의 선전에 힘입어 자민당·공명당·일본유신회·국민민주당 등 이른바 ‘개헌 4당’도 개헌선을 무난히 넘길 것으로 조사됐다. NHK는 “개헌 4당이 87~102석을 획득해 참의원 전체의 개헌선(166석·전체 3분의 2)를 넘는 게 확실하다”고 했다. 이들은 기존 84석을 확보하고 있어 개헌선 확보를 위해 최소 82석을 확보해야 했는데, 이를 훌쩍 넘는 결과가 나올 가능성이 큰 것이다.

일본에선 참의원 선거 초반부터 개헌 4당이 참의원 개헌선을 넘을 것이란 전망이 우세했다. 그간 기시다 총리가 안정적인 국정 운영으로 높은 지지율을 유지했고, 북한 핵실험·러시아 우크라이나 침공 등으로 방위력 강화를 주장하는 보수 정당에 표심이 쏠렸기 때문이다. 여기에 이틀 전 일본 최장수 총리이자 개헌 세력의 상징적 존재인 아베 전 총리의 충격적인 참변까지 더해져 막판 자민당에 추가표가 몰렸다는 분석이다. 1980년 오히라 마사요시 총리가 중·참의원 선거 기간, 2000년 오부치 게이조 총리가 중의원 선거 기간 병으로 쓰러져 사망했을 때에도 자민당에 동정표가 몰려 승리한 전례가 있다.

9일 일본 나라현 나라시 야마토사이다이지역(驛) 인근에 마련된 헌화대에서 시민들이 아베 신조 전 총리를 추모하며 두 손 모아 기도하고 있다. 아베 전 총리는 전날 이곳에서 참의원 선거 지원 유세를 하던 중 총격을 당해 숨졌다. 아베 전 총리의 장례식은 11~12일 치러질 예정이다. /AP 연합뉴스

자민당이 의석수를 크게 늘리며 개헌을 둘러싼 분위기는 역대 최고조로 높아졌다는 평가다. 기시다 총리는 이번 선거에서 아베의 주장을 계승해 자위대 명기·긴급사태 선언 조항 신설·교육 무상화 등 4가지 항목 개헌 실현과 방위 예산 증액, 적 기지 공격 능력 보유 등을 공약했다. 참의원 선거를 마친 뒤엔 개헌을 최대한 빠르게 추진한다고도 약속했다. 늘 개헌에 유보적이어서 자민당을 애타게 하던 연립여당 공명당조차 이번엔 개헌 긍정 검토를 공약으로 제시한 상태다. NHK 출구조사 결과 헌법 개정 찬성과 반대 응답은 각각 45%, 25%로, 찬성이 반대의 2배에 가까웠다.

올 초부터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안보 위기감이 높아지며 개헌에 찬성하는 국민 여론이 조성된 점, ‘핵 없는 세계’를 강조하는 기시다 총리의 이미지가 아베 전 총리만큼 호전적이지 않다는 점 역시 개헌에 청신호라는 분석이다. ‘아베의 개헌’에는 반감을 갖던 사람들도 ‘기시다의 개헌’엔 찬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개헌 세력은 중의원에선 작년 선거를 통해 전체 의석(465석)의 4분의 3을 확보했다.

다만 ‘전쟁 가능한 보통국가’로의 헌법 개정이 실제로 이뤄지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울 것이란 전망도 많다. 개헌 세력으로 묶이는 4개 정당도 세부적으로는 각자 다른 개헌안을 주장하고 있는 데다가 아베 전 총리가 가장 강조한 ‘자위대 헌법 명기’는 전쟁의 기억을 간직한 국민 사이 반감이 여전하기 때문이다. 아베 전 총리를 대신할 ‘개헌 후속 주자’도 마땅치 않다. 진창수 세종연구소 일본센터장은 “개헌을 주장하는 각 정당은 물론 자민당 내에서도 통일된 개헌안을 만들기 쉽지 않은 상황”이라며 “아베라는 강력한 구심력이 있을 때에도 실패한 개헌을 아베도 없이 추진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 내다봤다. 실제 아사히신문은 “특별히 개헌을 서두르는 건 아니다. 수십년간 진행하지 못한 정책이 많다”는 익명의 총리 관계자 발언을 10일 전했다. 아베파 소속인 후쿠다 다쓰오 자민당 총무회장 역시 이날 라디오 인터뷰에서 “헌법 개정도 있지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외에도) 산적해 있다”고 했다. 일본의 ‘과거사’가 제대로 청산되지 않은 상황에서 일본의 헌법 개정을 통한 재무장은 한국과 중국에서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킬 가능성도 높다.

한편 기시다의 선거 압승에도 한·일 관계는 당분간 ‘시계 제로’ 상황에 놓일 전망이다. 당초 한국에선 기시다 정권 중간 평가인 참의원 선거에서 크게 승리할 경우, 기시다가 높은 국정 장악력을 바탕으로 아베 전 총리의 그늘에서 벗어나 제 색깔을 드러내는 정치를 본격화할 것이란 기대가 높았다. 기시다가 전통적으로 아시아 외교를 중시한 파벌 ‘고치카이(宏池會)’에 속한 만큼, 한·일 관계 개선에도 속도를 내리라 본 것이다. 하지만 아베 전 총리 사망으로 추모 분위기가 고조된 가운데 기시다가 아베 내각 노선과 차별화된 한·일 우호 관계 회복 정책을 본격 추진하긴 어렵단 관측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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