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끌려간 조선도공 후손 424년 만에 선조 묘소 참배

지난 9일 심당길의 15대 후손인 심수관씨가 424년 만에 경기 김포의 선조 묘소를 찾은 후 그간의 사정을 고하는 고유제에 참석해 절을 하고 있다. 박준철 기자

정유재란 당시 포로였던 심당길
한국 맥 이은 ‘사쓰마야키’ 선보여
‘일 최고 백자’ 칭호 도예명가 우뚝

15대 후손 심수관씨 한국 땅 밟아
“한·일 친선 가교 되는 예술가 될 것”

1598년 정유재란 때 전라도 남원성을 지키다 도공들과 함께 일본군에게 끌려간 후 세계가 인정하는 ‘도예명가’의 기반을 다진 심당길 장인의 후손이 424년 만에 처음으로 한국의 선조 묘소를 찾아 참배했다.

지난 9일 낮 경기 김포시 대곶면 청송심씨 묘역에선 하늘색의 한국 전통 두루마기와 유건을 갖춘 심당길의 제15대 후손 심수관씨(63·본명 심일휘·사진)가 선조들의 묘소에 참배하고 헌화했다. 심씨는 이어 청송심씨의 조상을 모시는 ‘청심재(淸心齋)’에서 ‘15대 심수관 본향김포 귀향 고유제’에 참석했다. 그는 자신의 뿌리인 한국의 조상에게 절을 하고 술을 올렸다.

심대평 청송심씨대종회 회장은 지난 5월8일 윤석열 대통령 취임식에 초청받아 방한한 심씨를 만나 심당길 이전 선조들의 존재를 그에게 알렸다. 이에 심씨가 심당길의 후손으로서 이날 처음 김포에 위치한 선조들의 묘역을 찾은 것이다. 그가 참배한 묘역은 심당길의 아버지인 심수인, 심당길의 할아버지인 심수 등이다.

심수관가는 일본에서 대대로 도공의 길을 걸어온 ‘도자기 명가’다. 일본에 처음 자리를 잡았던 심당길을 포함해 이날 김포를 방문한 15대손 심씨까지 대대손손 도공의 길을 걷고 있다.

심당길이 일본에 포로로 끌려갔을 당시 나이는 20대로 추정된다. 남원에서 일본 사쓰마(현재 가고시마)로 끌려간 이들은 척박한 땅에서 오두막을 짓고 황무지에서 밭을 갈구며, 생활용 도자기를 구우며 살았다.

심당길은 한국 도자기의 맥을 잇는 일본식 도자기 ‘사쓰마야키’를 세상에 내놓았다. 사쓰마야키는 일본 도자기의 대명사가 됐고, ‘일본 최고의 백자’라는 칭호를 받고 있다. 특히 포로로 끌려간 가문 중 지금까지 한국 성을 쓰고 있는 집안은 심수관가밖에 없다.

심당길의 후손인 제12대손인 심수관(1835~1906)은 사쓰마야키를 전 세계에 알리는 등 중흥을 이끌었다. 투각과 부각 등의 기술을 개발했고, 1873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린 만국박람회에 일본 대표로 높이 180㎝의 대화병 한 쌍 등 여러 작품을 출품해 극찬을 받았다. 1893년 미국 시카고 만국박람회,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각각 동상, 1903년 하노이 동양제국 박람회에서 금상을 받았다.

메이지유신 때 가업을 빛낸 심수관의 업적을 기려 후손들은 이름을 그대로 따르는 관습에 따라 본명 대신 심수관이라는 이름을 4대째 사용하고 있다.

단 한 번도 가고시마를 벗어난 적이 없던 심수관의 도자기들은 1998년 한국에서 ‘400년 만의 귀향-일본 속에 꽃피운 심수관가 도예전’이란 주제로 첫 해외전시회를 열었다.

제14대 심수관은 한·일 문화교류에 힘을 쏟아 1989년 한국 정부로부터 가고시마 명예총영사라는 직함을 얻었고, 1999년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제14대 심수관은 1998년 남원에서 채취한 불씨를 가져가 일본의 흙과 기술로 도자기를 빚었다. 이 불씨는 지금도 꺼지지 않고 불타고 있다.

이날 선조 묘역을 방문한 15대 심씨 역시 아버지의 뜻에 따라 심수관가를 이끌며 한·일 문화교류에 힘쓰고 있다.

심씨는 “초대 할아버지가 ‘한국인임을 잊지 말라’는 의지를 받들어 지금까지 ‘심씨’라는 이름으로 도자기를 만들고 있다”며 “우리 조상들은 대대로 ‘너는 절대로 외로움을 느끼지 마라, 네 뒤에는 대한민국이 버티고 있다’는 말씀을 하시곤 했다”고 말했다. 이어 “심수관가는 424년 동안 심씨 가문의 명예에 누를 끼친 일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며 “심수관가는 한국과 일본의 친선에 가교가 되는 예술가가 되도록 더욱 노력하겠다”고 덧붙였다.

박준철 기자 terryus@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