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 국가도, 부자 나라도 아니다”... 日, 아베 피습 후 불안감 번진다

도쿄/성호철 특파원 2022. 7. 10. 2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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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일 오후 일본 도쿄도 시부야구 소재 아베 신조 전 총리의 자택 앞 골목에 기시다 후미오 총리 일행의 차량이 정차한 가운데 경찰이 경계 근무 중이다./연합뉴스

10일 오후 4시 아베 신조 전 총리의 시신이 안치된 도쿄 시부야구(區)의 자택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자택 주변에서는 제복을 입은 20여 명의 경찰이 통행하는 일본인들을 주시했다. 40대 여성이 정문 앞에서 잠시 멈춰, 명복을 비는 자세를 취하자 경찰관이 다가와 “서 있지 말고 이동해 달라”고 말했다.

일본 경찰의 통제로 아베 전 총리의 명복을 빌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온 일본인들은 정문에서 50m 이상 떨어진 골목길에 서서 그를 추모했다. 살인 용의자에 대한 분노로 큰 소리를 내는 일본인은 없었다.

한 일본인은 조문을 위한 꽃을 든 채 한참을 왔다 갔다 한 후 어디론가 떠났다. 30도가 넘는 무더위 속에서 어디로 갈지 몰라 망설이는 모습으로 비쳤다. 도쿄 시나가와에서 왔다는 이와마씨는 “점점 먹고 살기 어려워지는데 그나마 위기를 헤쳐나갈 만한 정치인을 잃어버렸다”고 말했다. 후루이 미즈키(39)씨는 “일본이 이제 더 이상 안전한 나라가 아니라는 불안감이 든다”고 말했다. 이날 나라현의 사건 현장에 마련된 헌화대에는 오전에만 1000명이 넘는 조문객이 방문했다. 나라시는 오는 15일까지 아베 전 총리의 죽음에 충격받은 시민을 위한 트라우마 상담을 진행할 예정이다.

아베 전 총리의 피격 사망 이후, 일본 사회가 급격히 침체하고 있다. 불안감과 패배감, 무력감은 팽창하는 분위기다. ‘강한 일본’ 재건이라는 자신감이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아베는 2006년 최연소 총리에 취임한 후, ‘아름다운 일본에’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버블 경제 붕괴 이후 일본의 ‘잃어버린 30년’과 정면에서 마주한 정치인이었는데 그가 갑자기 사라져버렸다.

더욱이 아베의 피격과 사망은 일본이 더 이상 안전하지 않다는 신호를 일반인에게 줬다. 치안 안전 국가 일본이라는 신화가 무너진 것이다. 일본 트라우마 스트레스 학회는 “피격 영상을 반복 시청하거나, 식사 중에 TV 뉴스 방송을 보지 말라”는 권고를 냈다. 메이지대의 시게무라 아쓰시 교수는 “모든 사람이 아는 전직 총리가 총격을 당하는 충격적인 사건인 만큼 사람들이 쉽게 감정이입 할 가능성이 크다”며 “(피격 영상에) 불쾌감을 느끼면 바로 시청을 중단해야 한다”고 말했다.

일본인이 가장 중시하고 안정감을 느끼는 ‘매뉴얼대로 움직이는 시스템’이 이번에 작동하지 않았다. 아베 주변엔 10여 명의 경호원이 있었지만 미심쩍은 인물이 6~7m의 가까운 거리까지 접근하는데도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다. 특히 첫 폭발음 다음에 두 번째 발포까지 3초의 시간이 있었지만 누구도 아베 전 총리 앞으로 몸을 던지거나 그를 엎드리게 하는 동작을 취하지 않았다. 신주쿠에 사는 40대 변호사인 이케이씨는 “올 4월에 홋카이도에서 유람선이 침몰했을 때도 역시 매뉴얼은 작동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당시 큰 파도가 치는 상황이라 매뉴얼이라면 출항하면 안 됐지만 유람선 측은 ‘돈을 벌자’는 생각에 강행했다. 결국 10여 명이 사망했다. 유람선에는 제대로 자격을 갖춘 선장과 선원도 없었다.

반(反)인륜적인 사건도 끊이지 않고 있다. 지난달 29일에 오사카의 한 주택에서 2살짜리 여아가 열사병으로 숨진 채 발견됐다. 보호자인 아기의 할머니(46)와 동거남(50)이 손녀를 방치한 채 테마파크에 놀러간 것이다. 아이는 키보다 높은 울타리 안에 갇혀 있다가 사망했다.

한 달 전엔 여자 친구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고는 목 졸라 죽이고 아오야마의 산속에 매장한 사건도 발생했다. 작년 10월엔 20대 남성이 영화 배트맨의 악당 ‘조커’ 분장을 하고, 지하철에서 흉기를 휘둘러 수십 명이 다치는 사건도 있었다.

패배감과 불안감 근저에는 ‘더 이상 일본은 부자 나라가 아니다’라는 자괴감이 자리 잡고 있다. 일본 직장인의 연수입 평균은 OECD 국가 가운데 22위(2020년 기준)를 기록했다. 한국(19위)보다도 낮은 순위다. OECD 가운데는 하위권인 것이다. 미국, 캐나다, 독일, 영국, 프랑스 등 G7 국가에선 이탈리아를 빼곤 가장 가난한 나라가 됐다. 1997년만 해도 14위였고, 영국과 프랑스보다도 월급이 많았다. 아시아권에선 모두가 인정하는 부자 나라였다. 여전히 경제 규모는 세계 3위라지만 자신감은 온데간데없다. 국제 정치에서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러시아는 최근 사할린2 프로젝트에서 일본을 제외해, 천연가스 공급을 끊을 수 있다고 협박하고 있다. 중국군은 영토 분쟁 중인 센카쿠 인근 수역에 군함을 보내, 시위하고 있다. 일본 언론사 출신의 한 학자는 “일본 민주주의가 그동안 쌓아온 것은 과연 무엇이었나. 일본 사회는 지금 무력감에 빠져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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