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리랑카 대통령·총리 사임..20년 독재 '가문 정치' 종말
반정부 시위대, 관저까지 난입
IMF 협상 미뤄져 혼란 예고
고타바야 라자팍사 스리랑카 대통령(사진)이 9일(현지시간) 밤 전격적으로 사임 의사를 밝혔다. 국가 부도 사태 이후 반정부 시위가 격화된 데 따른 것으로 형과 동생, 조카까지 번갈아가며 20년 가까이 스리랑카 권력을 독점해 온 라자팍스 가문 정치도 막을 내리게 됐다. 총리도 사퇴하기로 했다.
마힌다 야파 아베이와르데나 스리랑카 국회의장은 이날 TV 성명을 통해 대통령이 오는 13일 물러나겠다는 의사를 전했다고 밝혔다. 라자팍사 대통령의 원래 임기는 2024년까지다.
아베이와르데나 의장은 대통령의 사임 결정이 평화로운 권력 이양을 보장하기 위해 이뤄졌다며 “일반 대중에게 법 존중과 평화 유지를 요청한다”고 말했다. 아베이와르데나 국회의장은 임시 대통령으로 추대됐다.
라자팍사 대통령의 전격적인 사임 의사 발표는 반정부 시위가 격화하면서 각 정당 대표들이 대통령과 총리의 공식 사임을 요구한 뒤에 나왔다.
이날 시위대 수천명은 수도 콜롬보의 대통령 집무실과 대통령궁에 난입해 대통령 퇴진을 요구했다. 라자팍사 대통령은 시위대가 대통령궁에 들이닥치기 전 모처로 피신한 것으로 알려졌다. 소셜미디어에 올라온 동영상을 보면 시위대는 집무실에서 대통령 퇴진 구호를 외치는가 하면, 대통령궁 수영장에서 물놀이를 즐겼다.
시위대는 라닐 위크레메싱게 총리 자택에도 침입해 불을 질렀다. 이 과정에서 경찰관 2명을 비롯해 총 39명이 다쳐 병원에 입원했다. 위크레메싱게 총리는 자택이 불타기 전 내각 회의 등을 소집해 사임에 동의한다고 밝혔다.
라자팍사 대통령의 중도 사퇴로 스리랑카 권력을 독점해 온 라자팍사 가문은 정부 요직에서 모두 물러나게 됐다. 라자팍사 대통령의 형 마힌다는 지난 5월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다른 형제 두 명과 조카 한 명도 이보다 앞서 장관직에서 내려왔다. 한 시위 참가자는 알자지라와 인터뷰하면서 “우리는 스리랑카를 폐허로 만든 탐욕스러운 정치인들과 싸워 자유를 쟁취했다”면서 “스리랑카의 독립일은 1948년 2월4일이 아니라 오늘”이라고 말했다.
라자팍사 가문이 물러나게 된 근본적인 원인은 올해 들어 국가 부도까지 이어진 심각한 경제난이다. 라자팍사 대통령이 지난 5월12일 정적으로 꼽혀온 위크레메싱게를 총리에 임명하고, 신임 총리가 외화부족난을 해결할 수도 있으리란 기대감에 시위가 일시적으로 잦아들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 경제상황이 전혀 나아지지 않았고 지도부 총사퇴 여론만 더 높아졌다.
스리랑카는 위크레메싱게 총리 취임 후 며칠 만인 지난 5월19일 공식 채무불이행(디폴트)에 돌입했다. 스리랑카 정부는 4월 초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구제금융을 받을 때까지 510억달러 규모의 대외 부채상환을 일시 유예한다며 시간을 벌었지만 결국 이자를 갚지 못하면서 디폴트가 공식화됐다.
인플레이션(물가상승)은 더욱 심각해졌다. 스리랑카 정부는 지난 5월 IMF 구제금융을 받기 위한 개혁 조치의 일환으로 연료 구매 보조금 지급을 중단했다. 전반적인 생활물가에 큰 영향을 미치는 연료 가격이 상승하면서 인플레이션이 심화되는 악순환에 빠졌다. 스리랑카의 6월 물가상승률은 54.6%를 기록했다. 앞서 최근 몇 주 새 취해진 연료 수송 중단, 학교 폐쇄, 경유를 비롯한 생필품의 배급제 조치로 반정부 여론은 극에 달했다.
라자팍사 대통령은 코로나19 대유행으로 주 수입원인 관광업이 타격을 입은 것이 경제난의 원인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다수 전문가들은 포퓰리즘적 성격이 강했던 2019년 대규모 세금 감면, 농작물 작황 급감으로 이어진 2021년 외국산 화학 비료 사용 금지 등 라자팍사 정부의 실정이 한몫했다고 지적한다.
지도부 공백에 따른 혼란과 민생고가 당분간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우선 새 정부 출범 전까지 IMF 구제금융 협상은 미뤄질 것으로 예상된다. 스리랑카 당국은 IMF와 협상을 진행하면서 인도, 중국, 세계은행(WB) 등에서 긴급 자금을 빌려 ‘급한 불’을 끄고 있다.
박효재 기자 mann616@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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