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요타 최악 리콜사태 때 구원등판..세계 1위 탈환 이끈 '레이싱 마니아'
"모든 사고에 유감"..눈물의 사과
美서 차량 급발진 문제로 89명 사망
취임 8개월 만에 최악의 경영 위기
"비용 절감·성장 치중해 품질 놓쳐"
14년 만에 창업주 가문 출신 대표
제품 개발·생산·마케팅 고루 몸 담아
의사결정 과정 단축 등 자구 노력
좋은 말만 하는 '예스맨'과 거리두기도
2030년까지 전기차 350만대 목표
전고체 배터리 분야 세계 최고 경쟁력
“차량 운전자들이 겪은 모든 사고에 깊은 유감을 표합니다.”
2010년 2월 24일. 미국 하원 청문회에 출석한 한 일본인은 떨리는 목소리로 이런 내용의 사과문을 읽어 내려갔다. 그의 눈엔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다. 애써 참은 눈물은 청문회 후 마주한 직원들 앞에서 터져 나왔다. 세계 최대 완성차업체 도요타자동차를 이끌고 있는 도요다 아키오 최고경영자(CEO)의 이야기다.
당시 도요타는 가속페달 결함에 따른 대규모 리콜 사태로 1937년 창사 후 최대의 위기를 겪었다. 가까스로 리콜 위기를 넘겼지만 최근 또 다른 난제를 만났다. 전기차 시장에서의 생존이다. 도요타가 ‘전기차 지각생’이라는 오명을 벗어던질 수 있을지 아키오의 비전에 시선이 쏠린다.
창사 후 최대 위기, 구원투수로 등판
아키오는 도요타 창업주인 도요다 기이치로의 손자다. 1984년 도요타에 입사해 제품 개발·마케팅·생산 부문 등에 고루 몸담았다. 2009년 6월 창업주 가문 출신으로는 14년 만에 회사 경영을 맡았다. 당시 도요타는 금융위기 여파로 창사 후 최대의 적자를 내는 등 위기를 겪고 있었다. 창업주의 손자가 구원투수로 등판했다.
악재는 연이어 터졌다. 같은 해 8월 미국에서 도요타 렉서스 차량에 타고 있던 일가족 4명이 전원 사망했다. 가속페달이 운전석 바닥에 있는 매트에 걸리며 급발진 사고가 났다. 미국 정부는 2000년 이후 도요타 급발진 문제로 89명이 사망했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신뢰가 가장 큰 자산이었던 도요타는 치명상을 입었다. 전 세계적으로 1000만 대에 달하는 차량을 리콜했다.
취임 8개월 차에 불과했던 아키오는 수없이 머리를 숙였다. 재발 방지를 위한 품질특별위원회도 직접 운영했다. 일각에선 ‘늑장 대응’이라는 비판도 나왔지만 결과적으로 아키오는 위기에 빠진 도요타를 구해냈다.
리콜 사태가 발생한 구조적인 원인은 초고속 성장이었다. 도요타는 2008년 제너럴모터스(GM)를 제치고 세계 1위 완성차업체에 오르는 과정에서 양적 성장과 비용 절감에 치중하다가 품질을 놓쳤다. 아키오는 이후 “리콜 사태는 안전에 대한 생각을 바꾸는 계기가 됐다”고 털어놨다. 직원들을 향해선 “1위 자리를 쫓지 말고 최고의 차를 만들라. 그러면 실적이 따라올 것”이라고 주문했다.
아키오는 뼈를 깎는 자구 노력을 했다. 이사회 규모를 절반으로 줄여 의사결정 과정을 단축했다. 무조건 듣기 좋은 말만 하는 ‘예스맨’들과도 거리를 뒀다. 결국 도요타는 위기를 딛고 일어섰다. 2021회계연도(2021년 4월∼2022년 3월)에 사상 최대 매출과 순이익을 거뒀다. 이 기간 도요타의 매출은 31조3795억엔(약 307조3000억원)으로 1년 전보다 15.3% 늘었다. 순이익은 전년 동기 대비 26.9% 증가한 2조8501억엔으로 집계됐다.
지난해 도요타의 전 세계 판매량은 823만 대로 전년 대비 7.6%(58만4000대) 늘었다. 아키오가 회사 경영을 맡은 이후 도요타 주가는 세 배가량 뛰어올랐다. 도요타의 시가총액은 약 34조엔으로 일본 기업 가운데 가장 크다.
또 다른 난제, 전기차
최근 도요타는 새로운 과제에 직면했다. 전기차 사업이다. 도요타의 전기차 사업은 주요 경쟁사에 비해 소극적이란 평가가 많다. 도요타는 2030년까지 연간 350만 대의 전기차를 판매한다는 계획이다. 기존 목표(200만 대)에서 80% 늘렸지만 경쟁사인 폭스바겐에 한참 못 미치는 규모다. 폭스바겐은 2030년까지 연간 500만 대 이상의 전기차를 판매하겠다는 목표다.
도요타는 순수 전기차뿐 아니라 주력 모델인 하이브리드차(내연기관과 배터리를 동시에 탑재한 차량) 등도 함께 생산하는 ‘투 트랙 전략’을 내세우고 있다. 여기에는 ‘전기차에만 올인하는 것은 잘못될 가능성이 크다’는 아키오의 전략적 판단이 깔려 있다. 그는 지난해 말 전기차 미래 전략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미래를 예측하기 어려울 때 (전기차에) 올인하는 것은 무모한 결정”이라고 했다.
시장의 전망은 엇갈린다. 도요타의 배터리 경쟁력이 뛰어나기 때문에 전기차 시장에서도 금방 역전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 섞인 전망이 있다. 도요타는 ‘꿈의 배터리’로 불리는 전고체 배터리 분야에서 세계에서 가장 많은 특허(1331건)를 보유하고 있다.
하지만 다른 경쟁사가 순수 전기차에 집중할 때 도요타가 하이브리드차와 수소차까지 신경 써야 하는 만큼 경쟁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투자 전문지 배런스는 “2030년까지 전기차 침투율이 50%로 높아지면 전 세계 전기차가 5000만 대에 이를 것”이라며 “도요타의 전기차 생산 목표를 감안하면 2030년 전기차 시장 점유율은 7%로 현재의 경차 시장 점유율(10~12%)에도 미치지 못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차를 사랑하는 ‘레이싱 마니아’
전기차 시대를 이끌 후임자를 물색하는 것도 아키오의 주요 과제다. 그는 2년 전 도쿄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임기는 내가 결정한 사안이 아니다”면서도 “새로운 아이디어로 무장한 인재에게 자리를 물려줄 것”이라고 말했다. 가장 유력한 CEO 후보는 아키오의 아들인 도요다 다이스케(34)다. 다이스케는 도요타의 첨단기술 부문인 위브플래닛에서 수석부사장으로 일하고 있다.
아키오는 소문난 ‘카레이싱 마니아’다. ‘모리조’란 이름으로 레이싱 대회에 직접 출전하기도 했다. 그는 “내가 레이싱카를 모는 것에 대해 말이 많은 것을 알고 있다. 현실 도피가 아니냐는 얘기도 있다. 하지만 나는 어렸을 때부터 차를 좋아했을 뿐”이라고 했다. 13년째 회사를 이끌고 있는 노장이지만 차에 대한 애정과 자신감은 여전하다는 평가다.
허세민 기자 semi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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