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임하자 공약 파기한 도지사들, 솔직한 건가? 뻔뻔한 건가?
①김진태 강원지사, 142개 공약 중 8개 철회
결혼축하금·어업인수당·건강바우처 등 제외
"정부 정책·형평성 문제로 불가피" 양해 구해
②김영환 충북지사, 현금성 지원 공약 후퇴
"장기 과제 추진·재정 여건 고려해 조정"
③유권자·시민단체 "유권자 우롱" 비판
전문가 "현금 지원 공약 철회는 사기 수준"
"조정된 공약, 재인준 등 절차 거쳐야"
"유연성 가질 필요도.. 선거로 심판받아야"
6·1지방선거에서 당선된 민선 8기 지방자치단체장들이 지난 1일 임기를 시작했습니다. 안팎의 어려운 상황에도 각자 지역 일꾼으로서 포부를 갖고 힘차게 첫 발을 내디뎠는데요, 일부 광역단체장은 선거 때 내놓았던 공약 중 일부를 철회 또는 후퇴해 논란이 일기도 했습니다. 지지자들 사이에서도 "유권자를 우롱했다", "선거 끝나더니 입 싹 닦는다" 등 격앙된 반응과 "솔직하게 얘기하는 게 낫다"는 의견이 엇갈렸습니다. 전문가들은 "정책 선거가 이뤄지지 않은 결과"라며 "앞으로 유사한 일이 계속 벌어질 수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지난달 30일 강원도지사직인수위원회(새로운강원도준비위원회)는 김진태 강원지사가 지방선거 때 내세웠던 공약 142건 중 134건은 조기(53건, 37.3%) 또는 중장기(81건, 57.1%)로 추진하고, 8개 공약(5.6%)을 폐기하거나 제외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사람들은 파기한 공약에 주목했습니다. 구체적으로 '결혼 축하금 100만 원 지원'(사유: 경제위기 극복 재원 활용), '건강 100세 바우처 지급'(복지부 페널티 받기에 현금성 급여 협의 불가), '예비엄마수당 지급'(정부와 도가 이미 유사 정책 시행 중), '모든 어업인에게 어업인 수당 지원'(2023년 국정과제로 추진 예정), '외국인 계절근로자 고용농가 지원'(내국인 고용농가와 형평성 문제), '국립현대미술관 분원 설립'(정부시책 불투명), '폐광지역 사계절 종합체육센터 건립'(정선군 기금으로 추진), '국립보훈병원 원주 유치'(정부 방침 '위탁병원 확대'로 변경)입니다. 정부 정책 변경 등 불가피하게 접을 수밖에 없는 공약도 있지만, 대부분은 현금을 지원하는 복지 사업이나 이행이 쉽지 않은 과제였죠.
물론 이행을 재확인한 공약에도 '육아 기본수당 10세까지 지급',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 등 대기업 유치', '한국은행 등 공공기관 유치' 등 현금지원 복지사업이나 도전적인 과제도 포함돼 있습니다. 정광열 삼성전자 부사장을 경제부지사 자리에 앉히며 강한 의욕을 보이기도 했죠.
강원, 142개 공약 중 8개 공약 철회
김 지사는 공약을 재조정한 데 대해 도민들에게 양해를 구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정부와 협의하는 과정에서 불이익이 예상되거나, 형평성에 문제가 있거나, 정부 시책이 변경됐거나, 시·군과의 협의에 어려움이 있다는 지적을 수용했다"며 "나중에 책임을 공직자들이나 도의원님들께 떠넘기지 않고, 제가 오롯이 책임지기 위해 결단했다는 사실 분명히 말씀드린다"(4일 시정연설)고 했습니다.
그러나 취임하자마자 공약을 파기한 행동은 유권자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습니다. 국민의힘 소속인 김 지사를 견제해야 하는 더불어민주당강원도당은 "어떤 노력도 없이 정부와 협의 불가 및 유사 시책 시행 등을 핑계로 공약을 폐기한 것은 도민을 우롱하는 처사"라고 비판했죠. 강원 원주를 지역구로 둔 같은 당 송기현 의원도 "임기 첫 행보로 8가지 공약을 철회하는 모습에 공약 이행 의지를 갖췄는지 의심된다"며 "실행 가능성 검토도 없이 오로지 당선만을 위해 선심성 공약, 백지수표를 남발했다는 것을 임기 첫날 증명한 셈"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김 지사의 공약 파기는 최근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도 이슈가 됐는데요. 민주당 지지자들이 많은 진보 성향의 커뮤니티는 말할 것도 없고, 국민의힘 지지자들이 많은 보수 성향 커뮤니티 '펨코(에펨코리아)'에서도 최근 '김진태 (지사) 갑자기 왜 이러냐'며 김 지사를 비판하는 글이 올라왔습니다. 글쓴이는 관련 기사를 공유하며 "취임 전까지 잘하다 왜 취임하니까 갑자기 공약 줄폐기 들어가냐"며 "이미 (민주당 소속) 최문순 (전 강원지사) 때 시행하는 게 있다느니 정부한테 페널티 받는다느니 나름의 이유는 있지만 공약 만들 때 이런 것도 모르고 공약 냈던 거냐"고 반문했습니다.
다른 누리꾼들도 "왜 선거 때 표만 받고 인수위 단계 거치면 공약 버리냐", "비판은 못 피한다 달게 받아야지", "욕먹어야 함", "(못 지킬 것) 알고 낸 거지. 표 얻으려고"라며 동조했습니다.
충북, 현금성 공약 후퇴가 재정 때문? "궁색한 변명"
특히 김 지사가 내세운 공약 철회 이유도 조목조목 반박했습니다. 이들은 "정부 정책이랑 겹쳐서 폐지한다는 이유는, 대선 끝나고 3개월 후 지선 치렀는데 이것도 제대로 안 살펴봤다는 얘기 아니냐", "최문순 도지사 때랑 겹쳐서? 최문순 도정에서 뭐 하는지도 검토 안하고 (공약을) 남발했다는 소리", "복지부랑 협의 못 해서? 공약 발표 전에 협의 불가능한 공약인 걸 검토도 안 했다는 뜻"이라고 날카롭게 따졌습니다.
반대로 "은밀하게 숨길 바엔 차라리 저렇게 당당하게 유권자들에게 알리고 양해 구하는 게 낫다"며 김 지사를 감싸는 의견도 없지 않았는데, 극소수에 그쳤습니다.
충북에서도 유사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김영환 충북지사가 공약했던 현금성 복지사업을 일부 후퇴한 겁니다.
김영환 지사는 선거 때 출산수당 1,000만 원 지급, 육아수당 5년간 월 100만 원 지급, 어버이날 어르신 감사효도비 30만 원 지급, 농업인 공익수당 100만 원 지급 등의 공약을 내세웠습니다.
그러나 지난달 30일 충북도지사인수위가 내놓은 100대 공약과제에서 육아수당은 빠졌고, 나머지 사업도 대상 범위와 지원 금액을 조정하거나 단계별로 시행하겠다는 방침을 밝혔습니다. 김 지사는 "육아수당은 장기 정책과제로 선정한 것"이라며 "나머지도 도의 재정에 맞게 추진하겠다"고 양해를 구했다고 합니다.
지역에서는 반발했습니다. 충북참여자치시민연대는 "현금성 공약 후퇴는 충북 현실 몰이해로 예견된 참사"라는 성명을 냈는데요. 이 단체는 "충북도의 출산아동 수, 노령인구 증가 추이 등은 지방선거 이전에도 예견할 수 있었기에 소요 비용 예측이 가능했고, 농업인 공익수당 소요 비용도 마찬가지"라며 "예산 문제 발생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음에도 이제 와 넉넉하지 않은 충북도 재정 상황을 얘기하는 건 너무나 궁색한 변명"이라고 비판했습니다. 김영환 지사의 공약 후퇴 역시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습니다.
"공약 파기 선언하면 끝? 재인준받아야"
광역단체장의 연이은 선심성 공약 철회·후퇴에 전문가들은 "인수위는 공약한 정책을 구체화하는 곳이지 폐기하는 곳이 아니다"라며 "민주주의 정신 훼손"이라고 비판했습니다.
이광재 매니페스토실천본부 사무총장은 본보와 통화에서 "지역 유권자가 고용한 선출직인 도지사가 공약 철회 또는 후퇴를 선언했다고 끝나는 게 아니다"라며 "지역 주민들의 인준을 받는 절차가 필요하다"고 지적했습니다.
이 사무총장은 "공약 파기 또는 철회한 사유를 투명하게 공개하고, 주민 대표기관인 도의회에서 심의해 승인받아야 한다"며 "의회가 편향적인 정당 구성이라면 추천을 받은 지역 주민들이 참여하는 공론화위원회를 구성해 통과가 안 될 경우 최초 원안으로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어 "(임기 초) 지지율이 높아도 현금복지 철회에는 지역 유권자들이 굉장히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에 안건이 10개라면 전체 다 승인되지 않을 확률이 높다"며 "박근혜 전 대통령도 65세 이상 전 국민에게 월 20만 원의 기초노령연금을 지급하겠다고 한 공약을 축소했다가 지지율이 급락했다"고 덧붙였습니다.
소순창 한국지방자치학회장은 재정자립도가 낮은 편인 충북과 강원에서 무리하게 선심성 공약을 내세운 점에 주목했는데요. 통계청에 따르면 17개 광역자치단체의 재정자립도는 평균 45.3%였는데 충북은 30.2%, 강원은 24.7%로 평균을 크게 밑도는 하위권이었습니다. 소 회장은 "현금성 지원 공약은 득표 및 당락과 직결되기 때문에 약속 파기는 이유와 관계없이 사기 수준으로 유권자들을 무시한 중대한 문제"라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다만 공약 철회와 후퇴를 당장 '잘했다' '잘못했다'고 평가하기는 어렵다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김형준 명지대 교수는 "재정자립도가 낮은 강원과 충북은 복지재정을 확대하면 경직성 경비가 확대되니까 대신 다른 중요한 걸 하겠다고 판단한 것 같다"며 "유연성을 가질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이어 "(공약 조정은) 자기 나름의 정치적 신념을 갖고 도정을 펼치겠다는 것이니까 뭐라고 할 수는 없고, 추후에 주민소환제를 활용해 책임을 묻거나 선거로 심판받는 것이 민주주의 국가의 기본 원칙"이라고 했습니다.
재발을 막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 사무총장은 "지방선거가 새 정부 출범 22일 만에 실시됐는데도 언론은 견제론이냐 안정론이냐는 구도로 몰아가 정책 검증에 소홀했다"며 언론의 역할을 주문했습니다.
소 회장은 "유권자들도 쉽지는 않지만 공약으로 내건 정책을 평가하고 투표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아 일정 책임을 피하기는 어렵다"며 "전문성을 가진 시민단체들과 함께 임기 내내 공약 이행을 따져보고, 점검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박민식 기자 bemyself@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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