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가 낙태를 금지하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김수현의 세계 한 조각]

김수현 기자 2022. 7. 10.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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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잠든 사이, 오늘 밤에도 세상은 빙글빙글 돌아가는 중입니다. 지난 밤 당신이 놓쳤을 수도 있는 세계 각국의 소식들, ‘세계 한 조각’이 쉽고 재미있게 전달하려고 합니다. 순식간에 바뀌는 세상만사, “잠깐! 왜 이러는 거지?” 여러분의 궁금증을 해결해 드리겠습니다.
4일 미국 워싱턴 백악관 앞에서 열린 낙태권 지지 집회에서 한 여성이 입에 테이프를 붙인 채 시위에 참여하고 있다. 테이프에는 ‘자유롭지 못함(Not Free)’라는 문구가 써 있다. 워싱턴=AP 뉴시스


1960년대 말 어느 늦은 밤. 루마니아 이아시시(市) 한 아파트에서 목소리를 잔뜩 낮춘 중년 남성이 젊은 여성에게 다급히 묻습니다. “누구한테 듣고 온 거죠? 임신 사실은 언제 알았어요?” 여성의 답변을 들은 남성이 말합니다. “피를 준비하세요. 소 피가 색이 진하니 나을 거예요. 그 피로 속옷을 적시고 다리 사이에도 묻히세요. 그리고 산부인과에 가서 ‘갑자기 피가 심하게 난다’고 말하세요. 거기서 뵙죠.”

곧 그의 말대로 한 여성이 산부인과 병원에 도착합니다. 의사인 이 남성은 그제야 낙태 수술을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 여성은 운이 좋았습니다. 그는 조금이라도 의심스럽다면 낙태하러온 여성을 받지 않았습니다. 당시 공산주의 국가 루마니아에서 낙태는 엄격히 금지돼 있었습니다. 낙태 시술한 의사는 비밀경찰에 끌려가서 종신형을 선고받을 수도 있었습니다.

이 사연을 담은 올 5월 17일자 영국 일간 더타임스 기사 제목은 ‘국가가 낙태를 금지하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What happens when a country bans abortion)’입니다. 오늘은 ‘루마니아와 낙태금지법 24년’을 주제로 얘기해보겠습니다.

● ‘법령 770’, 자궁을 국유화하다

1978년 1월 1일 신년 행사에 참여한 루마니아 독재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빨간색 표시)가 아이들과 함께 기념 사진을 찍고 있다. 루마니아 국립 아카이브


1966년 루마니아 독재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에게 고민이 생깁니다. 그해 루마니아 출산율이 1.9명으로 역대 가장 낮았던 겁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여성의 사회 참여는 높아지고 생활수준은 열악해진 결과입니다. 노동력이 줄어들까 우려된 차우셰스쿠는 인구 증가 정책의 하나로 ‘법령 770’을 발표합니다.

법령 770은 만 45세 이하 여성의 낙태와 피임을 금지하는 법입니다. 강간, 근친상간, 산모가 위험한 경우, 또는 4명 이상(이후 5명으로 늘어납니다) 아이를 낳은 여성은 이 법령에서 ‘해방’(?)됐습니다. 루마니아 비밀경찰은 여성들 생리주기를 체크하고, 임신이 의심되는 여성들을 비밀명단에 올려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 추적하고 감시했습니다.

1950년대 이후 루마니아 출산율 그래프. 세계은행(WB)


법령 시행 1년 만에 출산율은 1.9명에서 3.66명으로 수직 상승했습니다. 그러나 일시적일 뿐이었습니다. 임신을 원치 않던 여성은 ‘불법’ 낙태를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낙태가 금지된 1967년부터 1989년까지 루마니아에서는 낙태는 약 730만 건 시행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출산율은 꾸준히 감소해 시행 17년 만인 1983년 2명 수준으로 내려옵니다.

법령 770은 가난한 여성에게 더 치명적이었습니다. 부유층 여성은 암시장에서 밀수입한 콘돔을 사거나 뇌물을 주고 의사를 집으로 불러 시술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반면 가난한 여성에게 남은 선택지란 불법 낙태 시술소가 있는 뒷골목으로 향하는 것이었습니다.

● ‘식탁 위 낙태’ 지하 네트워크

픽사베이


1970년대 중반 대학생이던 다니엘라 드러기치는 불법 낙태 시술소를 찾아 나서야 했습니다. 당시 루마니아 여성 대부분은 ‘손다(Sonda·루마니아어로 파이프)’라는 것을 통해 직접 자궁에 낙태를 유발하는 액체를 투여했습니다. 높은 데서 배로 떨어지는 것도 흔한 낙태법이었습니다. 온갖 위험한 방법을 동원한 ‘셀프’ 낙태가 유행한 셈이죠.

드러기치는 친구들 손에 이끌려 한 노파의 집으로 갔습니다. 집안 오래된 화덕에서는 철제 기구들이 소독을 위해 달궈지고 있었습니다. 노파는 그에게 수건 한 장을 던져주고 입에 물라고 합니다. 이웃이 비명을 들을 수 있으니까요. 소리가 새 나가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시술을 받은 다음에도 그의 입덧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낙태는 실패했습니다.

낙태 옹호론자로 활발히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다니엘라 드러기치가 합법적 낙태를 상징하는 “자유, 안전, 합법(Free, Safe, Legal)”라는 문구가 담긴 티셔츠를 입고 있다. 다니엘라 드러기치 페이스북


그 후 드러기치는 정식 산부인과 의사를 통해 낙태 시술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당시 루마니아 직장인 한 달 월급보다 비용이 더 들었습니다. 드러기치는 이후 낙태가 필요한 여성이 안전하게 낙태 시술을 받을 수 있도록 의사와 연결해주는 지하조직 ‘식탁 위 낙태’ 네트워크에 참여합니다. 지금도 그는 루마니아에서 낙태 옹호론자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6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시청 앞에서 낙태 옹호론자들이 붉은 색으로 칠해진 계단 위에서 수갑을 단 채 시위하고 있다. 이들이 쥔 두건에는 “로(대 웨이드 판결)을 뒤집는다고? 절대 안 돼(Hell no)”라고 써 있다. 로스앤젤레스=AP 뉴시스


루마니아 정부 공식 집계에 따르면 법령 770이 시행된 1966년~1989년에 불법 낙태 시술을 받던 여성이 적어도 1만 명 숨졌습니다.(2만 명 이상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산모 사망률은 시행 13년 만에 10만 명 당 85.8명에서 159명으로 두 배로 증가했습니다. 대부분 불법 낙태 시술에 따른 사망입니다. 1989년 챠우체스쿠 독재가 무너지며 낙태가 합법화되자 이듬해 산모 사망률은 다시 절반 수준으로 줄어들었습니다.

● 버려진 ‘법령의 아이들’ 17만 명

디크레테이(Decretei) 또는 법령의 아이들. 낙태가 금지된 23년 동안 루마니아에서 태어난 세대를 지칭하는 말입니다. 낙태가 금지되자 루마니아 전역의 고아원에는 새 생명을 감당하지 못한 부모가 버린 아이들이 ‘쌓이기’ 시작합니다.

1970년 감당할 수 없이 늘어난 고아를 줄이기 위해 루마니아 정부는 관리 제도를 도입합니다. 신체적, 정신적 장애로 ‘사회 통합’이 불가능하다고 판단되는 아이는 만 9세가 넘으면 특수시설에 격리됐습니다. ‘회복 불가능한(irrecuperable)’한 아이들이라는 것이었죠.

1989년 챠우체스쿠 독재 정권이 붕괴된 이후 루마니아 전국 고아원 아동 약 17만 명의 실태가 알려졌습니다. 아이들은 영양실조로 뼈만 앙상했고 온몸에는 폭력 흔적이 가득했습니다. 사망률도 높았습니다. 서부 비호르주(州) 한 고아원에서는 겨울마다 평균 수용인원 100명 중 50명 넘게 숨졌다고 합니다. 사인은 대부분 폐렴이었지만 말 그대로 얼어 죽은 아이도 있었습니다.

공산주의가 붕괴된 후에도 회복 불가능한 아이들은 한동안 사형선고처럼 남아 있었습니다. 회복 불가능한 아동이 몇 명이었는지 이들이 어떤 처우를 받았는지 기록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지난달 24일 미국 워싱턴주 시애틀에서 진행된 낙태 옹호 시위에서 한 임신부 시위자가 “아이를 낳겠다고 결심한 것은 나의 결정이다. 모두가 그럴 수 있어야 한다”는 문구가 담긴 티셔츠를 입고 있다. 시애틀=AP 뉴시스


루마니아 독재자 차우셰스쿠의 낙태 금지 정책은 완전히 실패했습니다. 낙태와 피임을 금지하면 인구가 늘고 모두가 행복할 수 있다는 착각은 여성과 아이 수십만 명을 ‘지옥’에 빠뜨렸습니다.

미국 연방대법원은 지난달 여성이 낙태할 권리(낙태권)를 인정한 1973년 ‘로 대 웨이드 판결’을 폐기하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낙태권은 각 주에서 허용 여부를 결정할 일이지 헌법상 주어진 권리는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러자 소셜미디어를 중심으로 비과학적인 ‘셀프 낙태’ 방법이 빠르게 퍼지고 있다고 합니다. 차가운 식탁 위에 몸을 맡겨야 했던 루마니아 여성들이 떠오릅니다.

김수현 기자 news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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