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즈상 수상자도 수학경시대회 예선 탈락.. 한국 교육 씁쓸한 현실
문제풀이식 교육으로 영재 발견 실패
연구에 전념 어려운 대학 환경도 문제
'무용한 연구'에도 국가 지원 강화해야
한국 수학자들에게 '일대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지난 5일 허준이 미 프린스턴대 교수(고등과학원 석학교수)가 2022년 필즈상을 받은 거죠. 4년에 한 번 2~4명에게 수여하는 수학 분야 최고의 상으로 만 40세 미만 수학자만 수상한다는 점에서, '노벨상보다 받기 어려운 상'으로 알려졌습니다. 앞서 올해 2월 국제수학연맹(IMU)은 우리나라 수학의 국가 등급을 최고 등급인 5그룹으로 승격했죠. IMU는 회원국을 1그룹부터 5그룹까지 5단계 등급으로 구분해 총회 때 등급과 같은 수의 투표권을 부여하는데, 5그룹 국가는 미국, 프랑스, 독일, 일본 등 12개국에 불과합니다. 허 교수의 탁월한 성과를 감안해도, 한국 수학계가 지난 30년간 괄목할 만한 성장세를 보였다는 점을 고려해도 "테니스 라켓을 열여덟에 잡았는데 스물에 윔블던 대회에서 우승한 것"(미 수학·과학 전문매체 콴타매거진)이란 비유가 나오는 배경입니다.
한데 '수학도 선진국 반열'에 올라선 나라에서 학생 10명 중 1명은 왜 수포자(수학포기자)가 됐을까요. 수학 영재들은 수학보다 의학을 전공하고 싶어 할까요. 제2의 '허준이'가 나오려면 어떻게 지원해야 할까요. 허 교수와 수학계 인사들의 인터뷰, 관련 연구 자료를 통해 정리해봤습니다.
①입시 위주 수학공부...10명 중 1명 수포자
필즈상 수상자 발표 당일 허 교수는 '학창시절 수포자'로 소개됐죠. 허 교수는 시상식 다음 날 한국 기자들을 대상으로 한 온라인 기자간담회에서 "초등학생 때 구구단 외우는 걸 힘들어했다는 얘기가 수포자로 와전됐다"고 정정했는데, 현행 입시제도가 수학 영재를 키워내기 어렵다는 공감대가 반영된 '오보' 같습니다. 한데 허 교수, 이 자리에서 "학창 시절 이런저런 이유로 수학에 정을 못 붙였다"고 덧붙여 여운을 남겼죠.
해당 간담회를 준비한 대한수학회는 올해 초 대한수학교육학회, 한국수학교육학회와 함께 '2022 수학과 교육과정 개정의 핵심 쟁점과 우려'라는 포럼을 개최했었습니다. 사교육 감소를 목표로 공교육에서 수학교육 범위, 시간을 지속적으로 줄였지만, 사교육은 줄지 않고 오히려 "이공계 학생들의 대학수학능력 저하가 매우 우려된다"는 게 포럼을 개최한 이유입니다.
실제 최근 5년 동안의 '국가수준 학업성취도 평가' 결과를 보면 수학 기초학력 미달인 '1수준' 학생 비율의 경우 중3은 7.1%(2016년)에서 11.6%(2021년)로, 고2는 9.9%에서 14.2%로 늘었습니다. 같은 기간 보통학력인 '3수준' 학생 비율은 중3 67.6%에서 55.6%로, 고2 75.1%에서 63.1%로 줄었죠. 수학 기초학력은 떨어지고, 중위권은 줄었다는 뜻입니다. 국내 초중등 교육이 '줄 세우기'식 입시에 갇혀있다 보니 ‘공부 양’이 줄어도 수포자 양산은 피할 수 없다는 거죠.
한 입시업계 관계자가 반박하더군요. "필즈상을 받는 것과 같은 '어나더 레벨(another level‧차원이 다른)' 수학자는 입시제도에 상관없이 두각을 나타낼 거"라고요.
하지만 고등학교를 자퇴한 허 교수에게 1년간 입시수학을 가르쳤다는 김철민 울산과학기술원(UNIST) 교수는 최근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허 교수를 이렇게 기억했습니다. "(학생이 수학을) 잘한다고 말하려면 정답을 잘 맞히고 주어진 시간 내에 많이 푸는 것이 기준일 텐데 그 기준에 비춰서 (허 교수는) 인상적이지 않았다. 솔직한 마음으로 서울대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운이 좋았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허 교수가 10대 시절 체스를 통해 익혔다는 '수학적 사고'는 국내 입시제도의 핵심 변별력인 '문제풀이 기술'과 거리가 있다는 말입니다.
②그 많은 영재는 어디 갔을까
허 교수도 고교생이던 1999년 한국수학교육학회에서 주관한 '한국수학경시대회'에 응시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하지만 국내 입시체제에서는 허 교수의 가능성을 알아보기 어려웠습니다. 대회 관계자는 본보에 "당시 허준이 학생이 받은 점수는 100점 만점에 58점"이라며 "상위 10%에 들어가면 본선에 진출하는데, 허준이 학생은 못 들었다"고 말했습니다.
허 교수의 학부 은사였던 김영훈 서울대 수리과학부 교수도 필즈상 수상 간담회에서 "(영재들이) 재능을 좀 더 빨리 발견할 수 있고, 그런 것들이 어린 나이부터 육성할 수 있는 교육 시스템이 갖춰지면 허준이 교수가 4년 전, 8년 전에 필즈상을 받을 수 있었던 게 아닌가"하고 교육제도의 아쉬움을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배우 김지석의 형으로 일반에 더 잘 알려진 김반석씨는 반대의 경우죠. 학창시절 각종 수학 올림피아드를 석권했던 그는 수학자를 꿈꾸며 영국 옥스퍼드대 수학과에 입학했는데, 현재 금융투자 전문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김씨는 수학자가 되길 포기한 이유에 대해 "성적 좋고 문제 푸는 건 잘하는데 사고의 확장이 미숙해서"라고 말했죠.
이와 관련 김씨가 2015년 tvN '문제적 남자'에 출연해 남긴 말이 아직도 회자가 되고 있습니다. 김씨는 옥스퍼드 입학 전 "케임브리지 대학에도 지원해 입학시험에서 1등을 했는데, 떨어졌다"고 밝혔습니다. 시험은 3시간 동안 10문제 중 원하는 하나를 선택해 풀고 토론하는 것이었는데 김씨는 그중 4문제를 풀고 3문제 정도를 반씩 풀었죠. 김씨는 "(탈락) 이유를 물었는데 그때 선생님이 '당신은 우리가 찾는 종류의 천재가 아니다'라고 하더라. 옥스퍼드 수학과에 입학한 후 그 말의 의미를 알았다. 주입식 교육의 선두주자인 제 수학은 어디까지나 문제풀이 위주였고 한계를 느꼈다"고 고백했습니다.
③수학 잘하는 학생도 의대 지원
'수학 잘하는 학생이 의대 같은 다른 전공을 택하는 건 아닐까.' 이런 질문 가진 분들, 있을 겁니다. 4차산업의 핵심, 인공지능(AI) 기술을 가능케 하는 게 수학의 선형대수‧해석학‧통계학이지만(실제 수학과 졸업생 취업률은 자연계 평균보다 높습니다), 수학을 전공해서 좋은 일자리를 얻기 어려울 거란 우리 사회 선입견이 크다는 거죠.
이과 영재를 '세금 들여' 가르치는 과학고에 진학한 학생들이 의약대를 지원하는 건 어제오늘 문제가 아닙니다. 강득구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교육부로부터 받은 '2022학년도 주요대학 정시 합격자 자료'를 분석한 결과, 서울대 의대 등록자 30%(30명 중 9명)가 영재학교‧과학고 출신이었습니다. 2022대입에서 전국 영재학교‧과학고 출신 1,781명 중 의약계열 지원자는 416명, 약 4명 중 1명에 달했습니다. 수년간 폐해가 지적돼 각 지역 과학고가 '의약대 지원 시 장학금 반납' 같은 조치를 내걸어 그나마 '이 정도' 수치가 나온 거죠.
"의대 가기 싫어하는 이과 최상위권 학생들은 수학과를 지원한다"(오종운 종로학원 평가이사)는 말도 있습니다. 종로학원이 대학교육협회가 발표한 '2022학년도 주요대학 정시 합격선'을 분석한 결과 실제 서울대 수리과학부 합격선(상위 70% 기준)은 자연계열 36개 학과 중 의예과, 컴퓨터공학부, 전기정보공학부 다음 4번째로 높았습니다.
하지만 연세대 수학과 합격선은 자연계 29개 학과 중 14위로 뚝 떨어지고, 고려대 수학과 합격선은 29개 학과 중 19위로 수학교육학과(8위)보다도 떨어집니다. '수학 전공 살려' 좋은 일자리 잡기가 국내에서는 만만치 않다는 거죠. 과학기술정책연구원의 '산업수학 활성화를 위한 국내 산업수학 생태계 분석'에 따르면 2012년부터 2015년까지 수학과 박사학위 취업자의 임시직 비율이 16.5%에서 25.7%로 급증, "고용의 질이 떨어진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④제대로 연구하기 어려운 국내 대학 현실
이 모든 난관을 뚫고 한국에서 수학자가 되기로 결심해도, 연구에 전념하기 어렵다는 지적도 나옵니다. 수학은 대학 이외에는 연구할 수 있는 여건이 부족한데, 국내 대학은 취업률을 잣대로 수학과를 줄이고 있어 일자리 구하기부터 어렵다는 말이죠. 실제 국내 대학의 수학 관련 학과는 십수년간 크게 줄었습니다. 과기연은 같은 보고서에서 2000년부터 2015년까지 국내 수학 관련 학과 수가 271개에서 218개로 줄었다고 지적합니다. 대학의 비정년트랙이 늘어나는 것도 한계로 꼽힙니다. 일자리를 구해도 불안정하고, 그나마 강의와 행정 관리에 시달려야 해 연구에 전념하기 쉽지 않다는 지적이죠.
국내 많은 수학자들은, 허 교수가 30대에 업적을 낸 비결 중 하나로 미국 클레이 수학연구소의 지원을 꼽습니다. 클레이 연구소는 전 세계 수학 분야 박사 중 매해 두 명을 뽑아 강의 없이, 연구에만 집중하도록 지원하는데 2014년 허 교수를 지원자로 선정해 2019년까지 5년간 지원했습니다. 허 교수 역시 ‘제2의 허준이가 나오기 위한 방안’을 묻는 질문에 "젊은 과학자들에게 단기적인 목표를 추구하지 않고 마음 편하게 자유롭게 즐거움을 쫓으면서 장기적인 큰 프로젝트를 추진할 수 있을 만한 여유롭고 안정감 있는 연구 환경이 제공됐으면 좋겠다"고 제안했습니다.
이윤주 기자 miss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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