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대 미혼모의 출산을 다룬 '주노'(2007)의 시나리오를 쓴 디아블로 코디는 해당 극본 집필 당시 미혼 출산 경험이 없었다. 그러나 스트리퍼 출신인 그는 영화가 주목 받게 된 뒤 "스트리퍼일 때보다 더 발가벗은 느낌"이라고 말했다. 미혼모 주노가 작가 본인과 일대일로 대응되는 캐릭터가 아니더라도, 그 안에는 자신의 성격과 특징이 많이 반영돼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것이 스크린에 상영됐을 때, 그는 마치 대중 앞에 벗고 선 듯한 수치심을 느꼈던 것이다.
`연애 빠진 로맨스`에서 자영(전종서)은 외로움을 달래려는 목적으로 데이팅 앱을 처음 사용해본다. <사진 제공=CJ ENM>
자전적 이야기가 반영된 작품을 공개한 뒤 부끄러움을 느꼈다고 고백한 작가는 디아블로 코디뿐만이 아니다. 작가가 영화와 소설 속 인물에 자신을 반영할 때 치부를 감추고 미화하며 가다듬지만, 그럼에도 누군가가 그 캐릭터에서 자신의 숨기고 싶은 부분을 발견할까봐 마음을 졸이는 것이다. 자전적 스토리도 이럴진대, 타인이 자신의 이야기를 스토리텔링 소재로 쓴 것을 봤을 때 기분은 어떨까. 오늘 소개할 '연애 빠진 로맨스'(2021)와 '비열한 거리'(2006)는 익명화한 이야기의 재료로 쓰인 당사자가 느끼는 수치심과 배신감을 그린 영화다.
`비열한 거리`의 병두(조인성)는 영화감독이 된 동창 민호를 만나 조폭 생활에 대해서 이야기해준다. <사진 제공=CJ ENM>
남친이 나를 19금 칼럼 소재로 썼다
'연애 빠진 로맨스'는 데이팅 앱(애플리케이션)을 통해 만난 남녀의 이야기다. 외로움을 달래기 위한 목적으로 앱을 뒤지던 함자영(전종서)과 19금 칼럼 소재가 필요했던 잡지사 기자 박우리(손석구)의 만남을 그렸다. 데이팅 앱으로 괜찮은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거란 기대 자체가 낮았던 두 사람은 서로에게 급속도로 빠져든다. 그저 하룻밤을 함께 보낼 상대가 필요했던 남녀는 서로의 24시간을 궁금해하게 되고, 이전의 연애에선 느끼지 못했던 친밀감을 경험한다.
잡지사 기자인 박우리는 19금 칼럼이 필요해 데이팅 앱을 깔고, 거기서 함자영을 만나 자신의 정체를 감추고 취재하던 도중 급속도로 빠져든다. <사진 제공=CJ ENM>
역설적이게도 두 사람이 이처럼 인간적으로 강한 호감을 느끼게 된 건 한쪽이 전적으로 솔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박우리는 19금 칼럼을 완성하기 위해 자영에게 자꾸 질문을 했고, 박우리가 자신의 이야기로 콘텐츠를 만든다곤 상상하지 못했던 자영은 그것이 온전히 자신을 향한 인간적 호기심에 기인한 행동이었다고 오해한다. "오늘 나한테 이상한 거 많이 물어봐 줘서 고마워. 나 솔직히 얘기가 너무 하고 싶었거든."
박우리는 칼럼을 완성하기 위해 함자영에게 많은 질문을 하고, 그 과정에서 함자영에게 더 깊이 빠져든다. <사진 제공=CJ ENM>
물론 박우리에게는 변명 거리가 있다. 칼럼 속 여성은 익명화됐고 직업, 거주지 등 자영을 특정할 만한 정보는 없다. 19금 칼럼으로 작성됐지만, 성관계를 묘사한 문장은 없다. 하지만 자영은 박우리가 본인들의 이야기로 칼럼을 썼다는 사실을 발견한 뒤 모멸감을 느껴 곧장 그를 떠난다. 등장인물이 특정되지 않은, 19금 묘사도 없는 19금 칼럼이지만 연인이 배신감과 수치심을 느끼기에는 충분했던 것이다.
자영은 우리가 자신을 소재로 19금 칼럼을 썼다는 것에 배신감을 느낀다. <사진 제공=CJ ENM>
친구가 내 치부를 소재로 영화 만들어
본인의 이야기를 소재로 했지만 자신을 특정할 수 없는 스토리 속에서 자영이 그토록 큰 당혹감을 느끼는 원인은 뭘까. 유하 감독의 '비열한 거리'는 스토리텔러는 충분히 익명화했다고 생각한 이야기 속 주인공이 자신을 소재로 만든 작품을 보며 공포감에 휩싸이는 이유를 사유했다. 스물아홉 살의 병두(조인성)는 자신의 스폰서가 돼주겠다는 황 회장(천호진)을 위해 한 부장검사를 살해해서 암매장한다. 서른이 되기 전 자리를 잡아 가정을 일으켜야 한다는 부담감이 작용했을 것이다.
병두는 자신의 스폰이 돼주겠다는 황 회장(천호진)을 위해 부장검사를 살해한다. 그리고 그 사실을 평생 함구하겠다고 약속한다. <사진 제공=CJ ENM>
병두는 조직 내에서 승승장구하지만, 밤마다 죄책감에 괴로워한다. 자신과 과거 숙소생활을 하며 동고동락했던 중간보스 상철(윤제문)까지 조직 질서를 위해 제거했기 때문이다. 그는 오랜만에 자신을 찾아온 영화감독 지망생 친구 민호(남궁민)에게 그간 가슴 한편에 썩은 물처럼 고여 있었던 이야기를 고해성사하듯 털어놓는다.
병두가 꿈꾸는 것은 뒷골목 세계 평정 같은 것이 아니다. 그는 그저 사랑하는 이와 평범한 가정을 꾸리고 싶어 한다.<사진 제공=CJ ENM>
그러나 병두가 간과한 것은 자신의 친구 역시 스물아홉이라는 불안한 나이를 지나고 있었다는 점이다. 병두 자신이 스물여덟이었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살인을 스물아홉에 저질렀듯, 민호 역시 영화계에서 자리 잡아 보기 위해 어떤 소재든 갖다 쓸 수 있는 위태로운 존재였던 것이다. 병두는 자신이 검사를 죽인 이야기를 하나의 에피소드로 다룬 민호의 영화를 보고 극장 좌석에 그대로 꽂혀버리는 듯한 충격을 받는다.
민호가 만든 `남부건달 항쟁사`는 병두의 살인 사건을 흥미로운 에피소드 중 하나로 다룬다. 병두는 "누구에게도 말하면 안 된다"고 친구에게 당부했던 자신의 비밀이 영화관 스크린에서 상영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는다.<사진 제공=CJ ENM>
배신감을 토로하는 병두에게 민호는 말한다. "솔직히 이미 다 알고 있는 사건이고 누구나 할 수 있는 이야기잖아. 너도 봐서 알겠지만 이거 네 얘기도 아니야." 아마 사실이었을 것이다. 민호가 만든 영화에서 병두의 살인을 재현한 신이 상당히 코믹하게 연출됐다는 것으로 봤을 때, 아마 병두가 검사를 죽였다는 내용은 작품의 조미료 같은 요소이지 핵심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 장면을 보고 관객들이 과거 병두의 암매장을 알아낼 것이란 추측은 민호의 말대로 기우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병두는 민호에게 "건달은 지가 한 실수 덮으려고 사람 하나 봐버리는 건 일도 아니야"라고 협박한다. 그건 실제로 친구를 "봐버리겠다"는 얘기가 아니라 그만큼 자신이 두려워하고 있다는 호소다.
조폭영화를 준비하던 민호가 병두에게 접근한 건 시나리오에 리얼리티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병두 역시 친구가 잘되길 바라기 때문에 취재에 적극적으로 응해준다. 그러나 어느 날 병두의 비밀 이야기를 들은 민호는 그것을 영화화하고 싶은 유혹을 강렬하게 받는데, 거기엔 그가 원한 `나약한 인간으로서의 조폭`이 갖는 진짜 고민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사진 제공=CJ ENM>
익명화된 이야기에서 당사자가 느끼는 공포
한쪽은 연인, 다른 한쪽은 친구 관계를 그렸지만 갈등 양상은 유사하다. 상대방이 인간적 신뢰를 갖고 털어놓은 이야기를 스토리텔러가 콘텐츠화해버린 것이다. 물론 민호에 비해서 박우리는 훨씬 양심의 가책을 많이 느끼는 인간이지만, 두 사람은 공통점을 갖는다. 바로 '이 정도로 익명화했으면 상대방 동의 없이 콘텐츠로 제작해도 무리 없을 것'이라고 합리화하는 과정에서다. 그리고 둘의 연인(자영)과 친구(병두)는 그 합리화 때문에 상처 입고 고통받는다.
친구의 이야기를 동의 없이 콘텐츠로 만드는 건 누구나 조심해야 한다. 상대방은 그와 보낸 시간 중 어디까지가 진심이었고, 어디까지가 취재였는지 분간하기 어려워진다. <사진 제공=CJ ENM>
아무리 철저하게 익명화하더라도 스토리텔러는 캐릭터의 모티프가 된 당사자의 특징을 몇 개 남겨둘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캐릭터의 그러한 개성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당사자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자신만 알고 있었던 비밀이 세상에 공개됐을 때, 혹시 누군가 알아볼까 두렵다. 많은 사람은 영화와 칼럼 속 주인공에 대해서는 별 죄책감 없이 평가하기 때문에, 어딜 가든 자신의 뒷담화를 들을 수 있다는 점도 부담이다.
자영은 박우리가 자신에게 어떤 일을 저질렀는지 폭로해버림으로써 우리에게 복수한다. <사진 제공=CJ ENM>
두려움의 일부는 갑을 관계 설정에 대한 것이다. 박우리와 민호가 자영과 병두의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듣고 싶어했을 때, 분명 그 관계에서 스토리텔러는 을의 입장이었다. 그러나 칼럼으로, 또 스크린으로 옮겨진 자신의 비밀을 본 순간 자영과 병두는 자신이 졸지에 을이 돼버렸음을 깨달았을 것이다. 혹시 상대방이 자신의 비밀을 더 많이 공개해버릴까 전전긍긍하는 을의 위치가 된 것이다. 지금은 익명화를 위한 여러 장치가 이야기를 둘러싸고 있지만, 나중에 스토리텔러는 '더 자극적인 이야기가 필요해서' 아니면 '그저 상대방이 맘에 안 들어서' 그런 익명화의 장치를 하나씩 거둘 수 있는 갑이 되는 것이다.
유하 감독은 인간을 선악의 이분법으로 분류하지 않는다. 병두(조인성)가 종수(진구)에게 배신당해 칼에 찔리는 장면에서 병두의 얼굴은 가엾게 그려지지만, 병두 역시 상철(윤제문)을 배신했다는 점에선 종수와 다를 바 없다. 병두를 제거하고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던 종수 역시 미래엔 그보다 후배에게 칼을 맞고 병두를 떠올릴지 모른다. <사진 제공=CJ ENM>
인간을 수단으로만 대하지 않겠단 다짐
칸트는 인간을 수단으로만 대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너는 너 자신의 인격에서나 다른 모든 사람의 인격에서나 인간성을 언제나 동시에 목적으로 간주하고 결코 단순한 수단으로 대하지 않도록 하라." 자영과 병두 두 사람이 대중 앞에서 발가벗겨지는 듯한 수치심보다 더 크게 느낀 것은 배신감이었을 것이다. 자신이 상대방에게 목적인 줄 알았는데, 오로지 수단이었음을 발견했을 때, 두 사람은 모멸감을 느낀다.
다수 작품에서 진중한 연기를 선보인 손석구는 `연애 빠진 로맨스`에서는 빈틈이 많은 남자 `박우리`로 분했다. <사진 제공=CJ ENM>
두 영화를 보면서 지난해 한국 문단을 뒤흔들었던 지인 사생활 도용 논란 등을 떠올리긴 어렵지 않다. 그러나 이 영화들은 '작가가 아닌 관객'에게도 삶을 돌아볼 기회를 제공한다. 그건 한 사람의 인간됨이란 결국 남을 얼마나 수단화하지 않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관객은 자신이 가진 것을 포기하며 자영에게 사죄하는 박우리를 보며 관계의 희망을 본다. 반면, 끝내 병두를 수단으로만 대하는 흥행 영화 감독 민호를 보며 조폭보다도 '비열하다'고 느낀다. 상대를 한때 수단으로 간주했을지언정 최종적으론 목적으로 대하겠다는 선택을 할 수 있는지, 장르도 분위기도 다른 두 영화는 관객에게 가볍지 않은 질문을 던진다.
`연애 빠진 로맨스`와 `비열한 거리`의 포스터<사진 제공=CJ ENM>
■ '연애 빠진 로맨스' 장르: 로맨스·멜로 감독: 정가영 출연: 전종서, 손석구 평점: 왓챠피디아(3.2/5.0) ※2022년 7월 8일 기준 감상 가능한 곳: 티빙
■ '비열한 거리' 장르: 액션·드라마 감독: 유하 출연: 조인성, 진구, 남궁민 평점: 왓챠피디아(3.6/5.0) ※2022년 7월 8일 기준 감상 가능한 곳: 티빙, 왓챠, 쿠팡플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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