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환美 풍기는 꽃병.. 무의식의 세계 품다 [김한들의 그림 아로새기기]

2022. 7. 9.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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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빛을 보게 만드는 법
佛 '상징주의 미술' 앞장선 르동
진화론 등 당대 이성주의에 반감
빛·평면으로 현실세계 표현 대신
단색으로 정신적인 것 전달 시도
목탄과 판화로 비현실 검게 묘사
뒤늦게 득남 후 다채로운 색 활용
오딜롱 르동이 검은색으로 그리던 시기의 작품. 검은색만 사용했지만 인물이 입은 벨벳의 느낌과 피부의 창백함이 느껴질 정도로 표현력이 좋다. ‘갑옷’(Armor, 1891).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제공
#오딜롱 르동의 신비로운 세계

오딜롱 르동(Odilon Redon, 프랑스, 1840∼1916)은 프랑스 상징주의 미술의 선구자로 일컬어지는 화가다. 같은 해에 태어난 인상주의 작가 모네(Claude Monet)만큼 대중에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현대미술의 선구자 뒤샹(Marcel Duchamp)이 영향을 받았다고 언급했을 정도로 그의 작품 세계에는 특별한 무엇이 있다. 그 무엇은 작가 개인의 상상력이 만들어 낸 것으로 꿈같이 비현실적이고 흐릿하지만 쉽게 잊히지 않는 인상이다.

르동은 보르도에서 성공한 부모 아래 태어나 부유하게 자란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부유함이 행복은 아니기에 도처에 슬픔과 우울을 경험케 하는 상황이 펼쳐져 있었다. 일찍이 부모와 떨어져 외삼촌이 있는 농장에서 자랐는데 그 이유가 가정 문제에 있었다고 추측되기 때문이다. 훗날 화가는 자기 작품에서 전해지는 슬픔과 어둠이 있다면 이 시절이 근원일 것이라 말한 바 있다. 부모로부터 버려진 듯한 느낌과 사랑받지 못한 어린 시절의 기억은 오래 이어진 듯싶다.

르동은 열 살이 되자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고 한동안 안정적인 생활을 했다. 학교에 다녔고 문학, 음악에 관심을 가졌으며 미술로 상을 받았다. 청소년기에 들어서는 스타니슬라스 고랭(Stanislas Gorin)으로부터 미술 수업을 듣기도 했다. 수채화가로 알려진 그는 그림 그리는 법 외에도 들라크루아 등 당대 주요 작가들을 알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줬다. 완벽한 구도 등에 천착하는 일에서 벗어난 낭만주의적 작품들은 감흥을 일으켰다.

줄곧 미술을 배웠지만, 대학에 진학할 때는 아버지의 권유로 건축 공부를 시도할 수밖에 없었다. 국립미술학교인 에콜 데 보자르 건축과에 지원했지만 안타깝게도 떨어져 귀향했다. 고향에 돌아온 뒤 그림을 다시 그렸고 에콜 데 보자르에서 미술을 가르치던 제롬(Jean-Léon Gérôme)의 화실에 들어갔다. 제롬은 아카데미즘으로 알려진 회화의 전형을 다루던 작가였는데 이는 르동과 맞지 않아 다시 한번 고향으로 돌아왔다.

두 번의 실패를 경험했으나 꼭 나쁘지만은 않았던 듯싶다. 아카데믹한 회화 수련에 지쳤기 때문인지 새로운 매체들을 다루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조각, 판화 등 입체와 양감이 있는 것들을 손에 익히며 새로운 시도를 했다. 시도의 과정에서 판화를 배우기 위해 판화가 로돌프 브레스댕(Rodolphe Bresdin)을 만났다. 브레스댕은 꿈과 강박을 자유롭게 검은 잉크로 판화 작업 하는 작가였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펼칠 무렵이 되었지만 시대 상황이 돕지 않았다. 프랑스와 프로이센의 전쟁이 일어나며 청년 르동도 군에 징집되어 전쟁터에 나갔다. 6개월에 걸친 전쟁이 끝난 뒤에 자유를 찾았고 본격적으로 작가로 살기 위해 파리로 이주했다. 당시 파리는 외젠 오스만(Georges Eugene Haussmann)의 도시 대개조를 거쳐 현대라는 시간으로 재탄생한 직후였다. 도시와 문화는 급변했고 앞서 언급했듯 모네 등은 전에 없던 인상주의 작품을 선보여 주목받았다. 흥미로운 점은 르동이 이러한 집단적 움직임을 목격하면서도 전혀 다른 독자적 작품 세계를 구축했다는 것이다.

#부드럽게 번지는 어둠과 밝음

르동은 현대라는 시간이 도래하며 화가들이 전과 다른 방법으로 그림에 현실 세계를 담아내려 집중한 빛, 평면성 등이 아닌 것에 주목했다. 그는 목탄 드로잉을 하거나 판화를 찍어 내는 방식으로 비현실적인 세계를 검은색으로 표현했다. 외부보다 내부를 살피고 순수한 색의 사용으로 정신적인 것을 전달하려는 시도였다.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한 초기 20여년간 이 특성은 특히 두드러지게 드러났다. 작가는 자기의 이 시기를 ‘누아르’(Noir)라고 불렀는데 이는 프랑스어로 검은색을 의미한다.

르동의 누아르는 전후 파리에서 활동을 시작한 1870년대 초반 곧바로 사람들의 눈길을 끌지는 않았다. 1870년대 후반 ‘물의 수호신’(Guardian Spirit of the Waters, 1878)이라는 작업이 주목받으며 그의 작품 세계는 알려지게 되었다. 가로세로 약 40㎝ 크기의 종이에 목탄 등으로 그린 이 그림은 크기는 작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그림의 하단에는 배가 뜨고 갈매기가 나는 바다가 있고 그 위로 넓게 하늘이 펼쳐졌다. 넓은 하늘에는 거대한 형체가 떠 있는데 커다란 눈을 가지고 바다를 내려다보는 얼굴이다.

얼굴이 몸체 없이 하늘에 둥둥 떠 있는 기이한 장면이지만 커다란 눈에서 신성한 분위기가 풍기는 ‘물의 수호신’은 새로운 것이었다. 이 그림이 알려지며 이듬해에 그는 석판화 작품집을 출판했다. 그 안의 석판화는 200여점이나 되었는데 보통의 상상을 뛰어넘는 장면들이 그려져 있었다. 사람의 머리, 눈, 귀 등이 잘린 것처럼 나타나거나 동물과 식물의 부분을 조합한 기괴한 생명체를 포함한 식이었다.

석판화 작품집 속의 그림들은 르동의 상상력이 어디서 기인한 것인지 궁금증을 가지게 하는데 사실 그것은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당시 프랑스에서 활발하게 논의된 진화론 등이 작가의 내면과 상상을 거쳐 상징적 장면으로 탄생한 것이기 때문이다. 세기말을 앞두고 이성에 반감을 느끼며 무의식 등에 관심을 가지던 이들과 그는 맥락을 같이했다고 볼 수 있다. 꿈 같은 비현실적이고 몽환적인 형상과 분위기를 형성하게 된 배경이다.
‘꽃병(분홍 배경)’(Vase of Flowers(Pink Background, 1906)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제공
르동은 검은 그림을 그리면서도 색조가 전해지는 듯한 표현력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리고 1890년 중반부터 유채 물감과 파스텔로 작품에 색을 사용하기 시작하며 이 능력은 더 빛을 발했다. ‘꽃병(분홍 배경)’(Vase of Flowers(Pink Background, 1906)은 이 시기 그의 작품 모습을 알게 한다. 여기에는 벽과 바닥을 구분할 수 없는 자욱한 분홍색을 배경으로 삼은 화병이 놓여 있다. 백색에 섬세한 그림이 그려진 화병에는 화려하게 꽃다발이 담겼는데 다발 속 색의 배치가 아름답다.
꽃 그림은 그의 작품 세계가 급변한 듯 보이게 하는데 사실 그렇지는 않다. 오히려 ‘꽃병(분홍 배경)’은 르동이 밝힌 자기 예술 세계의 지향인 “보이는 것의 논리를 보이지 않는 것을 위해 배치하는 것”을 명확히 밝히는 작품이다. 이외의 꽃 그림에서 실내에 놓일 법한, 화병 주변 나비가 날아다니는 모습 역시 그의 상상력이 그림에서 여전히 중요한 부분임을 알게 한다.
‘아폴로의 전차’(The Chariot of Apollo, 1905∼1916)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제공
르동은 꽃 그림을 그린 이후 종교, 신화를 주제 삼아 그리기도 했다. ‘아폴로의 전차’(The Chariot of Apollo, 1905∼1916)는 이러한 모습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그는 빛과 시의 신인 아폴로가 전차를 모는 모티프를 수십 번이나 그렸다. 이 버전에서 그는 지상의 모습을 생략해 마차가 끝없는 하늘을 가로질러 경주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그 과정에서 물리적인 거리감과 방향감각을 잃게 되고 감각의 착오는 환영을 불러일으킨다.

르동이 그림에 색채를 사용하게 된 것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다. 그리고 그 가운데는 예술실험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삶과 관련한 이유도 있다. 1889년 쉰 살이 다 되어 갈 무렵 그는 뒤늦게 아들을 얻었는데 이때부터 마음에 평화를 느꼈다. 심리적 안정은 새로운 시도를 위한 여유를 만들어 줬고 색을 화면에 가져왔다. 같은 내용을 다루고 같은 삶을 살더라도 그것은 어두운 검정이 될 수도, 찬란한 색이 될 수도 있다. 지난한 장마의 흐림 속에서 빛을 보는 것도 마음의 상태에 달렸다.

김한들 미술이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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