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나무 다리 건너면 은자의 땅..유유자적 걸어볼까[전승훈의 아트로드]

전승훈 기자 2022. 7. 9.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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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영주는 소백산 자락에 둘러싸인 은자(隱者)의 땅이다. 깊은 산과 맑은 물소리, 글을 읽는 소리가 끊이지 않는 선비의 땅이다. 조선 최초의 서원이자 사액서원인 소수서원에서는 지금도 소나무 숲 속에서 글 읽는 소리가 들린다. 휘돌아가는 강물에 둘러싸인 무섬마을은 17세기 병자호란 후 출사를 단념한 선비들이 충절과 은자의 정신으로 들어가 살기 시작했던 마을이다. 그런가하면 6.25이후에는 피난민들이 모여들었다. 북한에서 내려온 피난민들은 풍기인삼과 풍기인견을 지역의 명물로 만들었다. 마을 공동체가 살아 있는 문화도시인 영주에서 품격있는 선비문화를 체험하는 여행을 떠났다.





●무섬마을로 들어가는 외나무 다리

이른 새벽, 밤새 내린 비가 그치고 나니 새소리에 잠을 깼다. 강가로 나갔다. 새벽공기에 강물 위에는 옅은 안개가 끼었다. 금빛 모래가 펼쳐진 들판에는 느릿한 강물이 곡선을 그린다.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는 노래가 저절로 떠올려지는 풍경이다.

강물이 산에 막혀 물도리동을 만들어낸 영주의 무섬마을. 무섬은 ‘물 위에 떠 있는 섬’이란 뜻이다. 행정지명은 수도리(水島里)다. 앞은 물로 가로막혀 있고 뒤는 산으로 둘러싸여 섬처럼 고립된 마을이다. 풍수지리상 ‘물위에 핀 연꽃(蓮花浮水形)’ 또는 ‘매화 떨어진 자리(梅花落地形)’로 풀이되는 길지다. 17세기에 박수가 병자호란 후 출사를 단념하고 이 곳에 들어와 만죽재를 짓고 살면서 생긴 집성촌이다.

이 마을에 들어가려면 외나무 다리를 건너야 했다. 지금은 널찍한 콘크리트 다리(수도교)가 놓였지만, 아직도 S자 모양으로 생긴 외나무 다리(약 150m)는 그대로 남아 있다. 반원형으로 자른 나무를 대충 다듬은 뒤 얕은 물길 위에 세운 것이다. 폭이 20~30cm에 불과한 외나무 다리를 건너는 것은 짜릿한 스릴이 넘친다. 외나무 다리에서 원수를 만나지 말기만을 바랄 뿐이다. 가끔 가다가 삐걱대고, 덜커덩 거리기도 한다. 시인 위초하는 ‘무섬행여나 물여울에 마음을 뺏기면 물멀미가 나고, 균형을 잃을 수도 있다. 물은 깊지 않지만 옷과 소지품이 젖어 낭패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혼자 걷는 길이다. 앞서거니 뒷서거니 그렇게 마음이 굽은 듯 외나무 다리를 건너거들랑 물너울에 마음을 뺏기지 말아야 한다’(위초하의 시 ‘무섬 외나무 다리에 서면’)



예전에는 마주오는 사람과 만나면 한 사람이 앉고, 그 위를 넘어갔다고 한다. 지금은 중간중간에 ‘잠깐 비켜다리’를 만들어놔 마주오는 사람과 인사하고 대화도 나눌 수 있다. 무섬마을의 외나무다리는 드라마, 영화, 광고 촬영지가 되기도 하고,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선정돼 명소가 됐다.


다리를 건너서 들어간 무섬마을은 기와집과 초가집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골목길이 정겹다. 돌로 쌓은 담장에는 접시꽃이 한창 피었다. 초가집에는 ‘까치구멍집’이라는 설명이 써 있다. 지붕의 용마루 양쪽에 구멍이 뚫려 있는 까치구멍집이다. 까치구멍은 난방이나 조리 시 발생하는 연기를 외부로 배출하고 낮에는 빛을 받아들여 집 안을 밝혀주며 통풍과 습도를 조절하는 숨구멍 역할을 한다고 한다. 무섬마을에서는 까치구멍집, 기와집을 골라서 민박을 할 수도 있다.







●선비문화 체험할 수 있는 선비세상



무섬마을에서 나와 발걸음을 소수서원으로 옮긴다. 1542년 풍기군수 주세붕이 최초의 성리학자인 회헌 안향(1243~1306) 선생을 기리고자 백운동서원을 건립한 것이 서원의 시초다. 소수서원 입구에 들어서니 울창한 소나무가 반긴다.


서원 앞 죽계천에는 퇴계 이황이 터를 닦고 ‘취한대(翠寒臺)’란 이름을 붙인 정자가 그림같이 놓여 있다. 선비들이 푸른 산의 기운과 시원한 물빛에 취하여 시를 짓고 풍류를 즐기던 곳이다. 죽계천에는 주세붕이 쓴 ‘경(敬)’ 자가 새겨진 바위도 있는데, 그 앞에서 검은 가마우지 한 마리가 놀고 있었다.


서원 안으로 들어가니 장맛비 떨어지는 처마 너머로 글 읽는 소리가 들렸다. 강학당 안에는 머리에 탕건을 쓰고 두루마기를 입은 어르신 두 명이 있었다. 황영회(72) 씨는 “소수서원을 찾는 방문객에게 선비정신을 보여주기 위해 지역주민들이 조를 짜서 강학당에서 글을 읽는다”고 말했다.


소수서원 인근에는 영주의 선비문화를 현대적으로 되살린 테마파크도 들어섰다. 9월3일 문을 여는 K-문화 테마파크 ‘선비세상’이다. 한옥, 한복, 한글, 한국음악, 한지, 한식촌 등 6개 테마별 전시관을 조성했다.



지난달 24일 선비세상의 정자에서 열린 음악과 명상이 함께한 ‘웰니스 숨숨공연’은 비오는 날씨에 더욱 어울리는 힐링체험이었다.


이 곳에서는 선비의 이상향을 주제로 한 몰입형 미디어아트와 한지뜨기 및 다도체험, 한글놀이터 등 다양한 타깃층을 겨냥한 콘텐츠와 체험프로그램이 운영된다.



장원급제 행렬을 18m 규모로 구현한 ‘오토마타’ 인형극이 공연되기도 한다. 부지 면적만 96만974㎡ 에 달한다. 영주시는 사업비 1700억 원을 투입, 9년 만에 선비세상을 완공했다.


공식 개관을 앞두고 22일부터 8월 15일까지 매주 토, 일요일과 광복절에 일반인을 대상으로 무료 임시개방을 진행한다. 이 기간 중에는 선비세상 퍼레이드 공연과 ‘힙(hip)선비’ 크루의 풍류한마당, 뮤직콘서트, 저잣거리酒페스티발夜, 한스타일 플리마켓 등 다채로운 이벤트가 열릴 예정이다.



●마을공동체가 살아 있는 문화도시

이여운 작가의 ’신기루-노동당사‘(캔버스에 수묵화)


지난달 24일 영주시내 경북전문대 안에 있는 148아트스퀘어에서는 이여운 작가가 캔버스 천에 수묵화로 그린 노동당사 그림 앞에서 민경인 재즈피아니스트의 공연이 펼쳐졌다. 100여 명의 관객들은 공연이 끝난 후에 열띤 박수를 보내며 민경인, 이여운, 권무형 작가와 함께 대화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곳은 한때 연초제조창이었던 담배공장 건물을 리모델링해 지역민을 위한 복합문화예술 창작공간으로 재탄생시킨 곳이다. 가로 100m, 세로 48m를 뜻하는 148아트스퀘어는 공연장(117석)을 비롯해 전시장, 연습실, 북카페, 창작작업실 등을 갖추고 있다.


옛 영주역 주변의 골목길과 중앙시장, 365시장, 후생시장 근처에는 영주 근대역사 문화의 거리가 조성돼 있다. 그 중에서 영주1동 두서길 일대 ‘관사골’을 찾는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진다. 이곳은 일제강점기에 영주역에서 근무하던 철도직원들이 거주하던 관사가 모여 있는 마을. 골목길 곳곳에는 담장 가득 ‘은하철도 999’가 그려져 있는가 하면, 아예 커다란 기차 조형물이 설치된 벽도 있다. 굽이굽이 마을 길을 오르며 땀이 맺힐 즈음 숨이 확 트이는 전망대 ‘부용대’가 나타난다. 부용대에서 바라다보이는 소백산 능선도 아름답지만, 옹기종기 모여 앉은 시가지가 한눈에 보여 도시 야경을 보기에도 안성맞춤이다.

사과로 유명한 영주의 시골길에는 초록색 사과가 달린 사과나무를 곳곳에서 만난다. 일부는 한쪽 면이 붉그스레 익어가기 시작했다. 영주의 특산물 중에는 ‘부석태(콩)’도 유명하다.


우리나라 최고의 목조건물인 무량수전이 있는 부석사 인근은 ‘콩 마을’로 불린다. 콩세계 과학관에 가면 부석태 이야기를 보고 들을 수 있고, 영주 부석면에 있는 콩세계 과학관에서는 부석태 이야기를 보고 들을 수 있다. 인근 동네는 ‘콩 마을’로 불린다. ‘부석태 콩타령’을 부르는 ‘콩 할매 합창단’은 영주 인삼축제, 사과축제 무대에 오르면서 일약 동네 스타로 급부상했다. ‘콩 마을‘은 2020년 경북도 행복농촌만들기 콘테스트에서 문화·복지 분야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인근에 폐교된 부석북부초등학교를 리모델링한 영주 소백예술촌에는 마을주민들로 구성된 모듬북 타악팀 ‘락&무‘가 연습과 공연을 한다. 소백예술촌은 ‘극단 미추’의 마당놀이 자료 보관소와 비품실과 연습실, 의상실, 음악실 등을 갖춘 창작을 위한 공간으로도 활용되고 있다.



소백산 옥녀봉 자락에 있는 국립산림치유원은 숲 속에서 힐링을 체험하는 시설이다. 산림치유지도사 80여 명이 상주해 스트레스 해소와 심신 안정에 탁월한 산림치유 프로그램을 해준다. 무장애 데크로드를 따라 숲속 길을 걷고, 소나무 밑에서 해먹에 누워 명상도 할 수 있다. 수치유센터에선 14가지 종류의 다양한 수압마사지를 받을 수 있다.

●난세를 피해 오는 곳

6.25 전쟁 전후 영주 풍기읍에는 북한 황해도와 평안도에서 내려온 피난민들이 몰려들었다. 민초들이 난세에 몸을 보전할 최적지는 ‘교남양백(嶠南兩白ㆍ영남의 소백과 태백 사이)’이라는 ’정감록‘에 예언된 말을 믿고 풍기로 내려온 피난민들이다. 30~40년 전만해도 풍기의 60대 이상 인구의 약 70%가 북에서 내려온 이들이었다고 한다.


이들 중엔 명주의 본고장인 평안도 영변 덕천 등지서 남하한 직물공장 경영자와 기술자들이 많았다. 그들은 나무에서 실을 뽑은 인견사를 원료로 한 인견직물을 짜기 시작했다. 이후 풍기에는 인견을 짜는 집이 한때 2000여 호를 넘었고, 읍내의 골목에선 ‘철커덕 철커덕’ 직조기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인견은 시원하고 정전기가 생기지 않아 ‘에어컨 이불’ ‘냉장고 섬유’로 불리며 요즘 같은 끈적끈적한 여름철에 인기 만점이다.

풍기인삼이 명품 브랜드로 자리잡는 데에도 개성과 황해도 등지에서의 보다 앞선 재배기술을 익힌 피난민들의 영향이 크다. 풍기읍내 평양냉면집인 ‘서부냉면’도 피난민들 덕분에 생겨난 곳이다. 지금은 전국의 냉면 마니아들이 꼭 들러야 하는 순례지로 꼽힌다.



영주에는 묵집도 많다. 산간 지방이 많은 영주는 예부터 메밀 재배가 흔해 제사나 잔치를 지낼 때 메밀묵이 빠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묵집에는 김치찌개와 비슷한 ‘태평초’라는 다소 낯선 이름이지만 맛이 기가막힌 메뉴가 있다. 잔칫날 먹고 남은 메밀묵과 돼지고기, 김치를 넣어 끓여 먹은 찌개라고 한다. 먹고 살기 힘들던 시절, 어머니께서 묵을 쑤어 배고픈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나눠주던 영주의 향토음식이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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