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면, 그 기묘한 음식 [물에 관한 알쓸신잡]
[최종수 토지주택연구원 연구위원] “아, 이 반가운 것은 무엇인가 / 이 히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것은 무엇인가 / 겨울밤 찡하니 닉은 동티미국을 좋아하고 / 얼얼한 댕추가루를 좋아하고 / 싱싱한 산꿩의 고기를 좋아하고… / 이 그지없이 고담하고 소박한 것은 무엇인가.”
시인인 백석이 1941년 발표한 시의 일부 구절입니다. 시인이 그토록 반가워했던 이 음식은 무엇이었을까요?
백석 시인이 겨울밤 동치미국과 잘 어울린다고 했던 음식은 바로 냉면입니다. 당시에는 냉면도 국수라고 했기 때문에 글에서는 냉면을 말하고 있지만 시의 제목은 ‘국수’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여름철 별미로 즐기고 있는 냉면을 우리 조상들은 눈이 오는 겨울철에 즐겨 먹었습니다. 더운 여름 시원하게 먹는 냉면도 맛나지만 눈 내린 추운 겨울 살얼음이 동동 뜬 알싸한 동치미 국물에 말아 먹는 냉면도 분명한 별미였을 겁니다.
2008년 KBS가 방영했던 국수를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 ‘누들로드’에서는 국수를 기묘한 음식이라고 표현합니다. 음식에서 일반적으로 볼 수 없는 가늘고 긴 형태의 면발을 두고 한 표현인 듯합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4000년 전 중앙아시아에 뿌리를 두고 있는 이 기묘한 음식은 아시아뿐만 아니라 실크로드를 따라 유럽의 식탁에도 오르기 시작합니다. 국수가 ‘누들로드’를 통해 동서양으로 전해진 것을 증명하듯이 누들로드에 접한 이란과 이탈리아 시칠리아섬 등지에는 우리나라 칼국수와 비슷한 음식이 있습니다.
그런데 밀을 주재료로 하는 국수가 밀을 주식으로 하는 서양에서는 특별한 관심을 끌지 못합니다. 오히려 쌀을 주식으로 하는 아시아에서 널리 퍼져나갑니다. 왜 이런 아이러니한 일이 일어난 걸까요?
답은 국수를 먹기 위해 필요한 식사 도구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국수를 먹기에 가장 편리한 도구는 젓가락입니다. 물론 스파게티를 먹을 때는 포크를 사용하기도 하지만 가늘고 긴 면발 음식을 먹을 때는 젓가락 만한 게 없죠. 스파게티를 즐기는 이탈리아 사람들이 서양에서 유일하게 젓가락을 잘 쓰는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국수를 즐기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젓가락질은 할 줄 알아야 하기 때문에 국수는 자연스럽게 젓가락 문화가 발달한 아시아 사람들에게 친숙한 음식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젓가락을 사용하지 않는 서양에서는 국수 요리도 포크로 먹을 수 있게 국물 없이 요리하지만 젓가락 문화가 발달한 아시아에서는 국수를 육수라고 하는 국물에 말아 먹습니다. 우리나라의 칼국수와 냉면, 중국의 우육탕면, 일본의 우동, 베트남의 쌀국수가 모두 그런 형태의 국수입니다.
백석 시인이 시에서 말했던 냉면, 살얼음이 동동 떠 있는 국수는 다른 나라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음식입니다. 일본의 소바처럼 시원하게 먹는 국수가 있긴 하지만 얼음물에 면발을 말아 먹는 나라는 우리나라가 유일합니다.
중앙아시아에서 전래된 밀가루 국수가 왜 우리나라에서는 물에 말아 먹는 냉면이 됐을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기후와 토양 탓에 우리나라는 밀을 생산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밀가루는 진짜 가루라는 의미의 진가루로 불릴 만큼 귀하디귀한 재료였습니다. 드라마 ‘대장금’에서도 수라간 정식 궁녀가 되는 어선경연에 참가한 장금이가 진가루를 잃어 버려 한바탕 소동이 벌어지는 장면이 나옵니다.
우리나라에는 밀가루가 귀하다보니 국수를 만들기 위해서는 밀가루를 대체할 곡류가 필요했고 귀한 밀 대신 척박한 산지에서도 잘 자라는 메밀을 이용하게 된 것이죠.
오늘날 국수는 그저 한 끼 때우는 분식집 메뉴가 됐지만 옛날에 국수는 귀하신 몸이었고 아무 때나 아무나 먹을 수 있는 음식도 아니었습니다. 일반 평민들로서는 동네 결혼식이나 회갑연의 잔칫날 쯤 돼야 맛볼 수 있는 귀한 음식이었지요.
밀가루가 귀했던 시절 밀가루로 만든 소면은 정말 잔칫날에만 먹을 수 있는 ‘잔치국수’였고, 그래서 ‘언제 국수 먹여줄거냐’는 말은 곧 ‘언제 결혼할거냐’라는 의미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귀하던 국수가 지금처럼 대중화된 과정에는 안타깝게도 전쟁과 가난의 아픔이 묻어 있습니다. 6·25 전쟁이 끝나고 남북이 분단되면서 평양과 함흥을 중심으로 한 메밀의 보급은 줄어든 반면, 미국의 식량원조에 따라 밀이 대량으로 우리나라에 공급되기 시작합니다. 진가루로 불릴 만큼 귀하던 밀가루가 흔해지면서 밀가루로 만든 수제비와 칼국수가 전쟁 이후의 국민 허기를 달래줬습니다.
밀가루가 흔해진 덕분에 그간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일반적이었던 메밀국수가 오히려 특별한 취급을 받게 되었습니다. 특히 남북한이 첨예하게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평양냉면은 음식 그 이상의 의미로 여겨지곤 합니다.
냉면은 북한을 대표하는 음식이기에 남북한이 마주하는 식사 장소에 단골 메뉴로 식탁에 올라옵니다. 반갑기도 하고 어색하기도 한 자리에 준비된 메뉴이다 보니 어떤 때는 “냉면이 목구멍으로 넘어갑니까?”라는 ‘갑분싸’ 멘트의 주제가 되기도 하고, 어떤 때는 “어렵사리 평양에서 평양냉면을 가져 왔습니다”는 말로 상대방에 대한 환대를 표현하는 대명사가 되기도 합니다.
음식 하나가 나라 간 협상 분위기를 좌지우지하는 상황을 보면 국수는 가늘고 길게 생긴 기묘한 모습만큼이나 우리에게 참 기묘한 음식인 듯합니다.
△토지주택연구원 연구위원 △University of Utah Visiting Professor △국회물포럼 물순환위원회 위원 △환경부 자문위원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청 자문위원 △대전광역시 물순환위원회 위원 △한국물환경학회 이사 △한국방재학회 이사
이명철 (twomc@e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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