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죽어야 내가 산다"..편 가르는 국제사회와 '모난 돌' 한국
미국 주도의 ‘세계화’ 시대가 종말을 알리고 있다. 전환 신호를 가장 두드러지게 보내는 곳은 경제다. 가장 싼 곳에서 물건을 생산해 가장 비싼 곳에서 팔고, 가장 세율이 낮은 곳에서 세금을 내던 시대가 끝나가고 있다. 세계는 동일한 경제질서, 가치, 규범을 공유하는 국가들끼리 뭉치는 글로벌 가치사슬(GVC·Global Value Chain) 시대로 재편 중이다. GVC에 속하지 못한 국가를 무역 공급망에서 배제하고, 산업 경쟁력을 잃게 만드는 것이 목표다. 거창한 이름으로 포장하지만 실상은 ‘편 가르기’인 셈이다.
‘국제정치’는 세계화 시대의 종말을 추동한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세력 간 이합집산을 촉진했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는 우크라이나 정부를 지원하며 러시아와 대립한다. 중국은 우크라이나 사태에 ‘중립’을 고수했지만, 사실상 러시아와 같은 입장으로 분류됐다. 지난 6월 29~30일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열린 나토 정상회의는 이러한 분류에 쐐기를 박았다. 나토는 2010년 이후 12년 만에 ‘전략개념’을 재정립하며 중국을 ‘이익과 안보, 가치에 대한 도전자’, 러시아를 ‘유럽·대서양의 평화와 안정에 가장 중대하고 직접적인 위협’으로 규정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이를 두고 “역사적인 회의였다”고 평가했다.
대대적인 ‘편 가르기’ 움직임에 국제사회는 발 빠르게 대응 중이다. 20세기 중반 이후 반세기 가까이 이어져온 ‘냉전’은 여러 교훈을 남겼다. ‘규칙을 만드는 자(Rule Maker)’는 ‘규칙을 따르는 자(Rule Taker)’에게 희생적 역할을 ‘강요’한다는 것, 여론이 분열된 국가는 각 세력의 대리전을 수행하게 된다는 것 등이다. 한반도는 냉전 시기 ‘규칙을 따르는 자’이자 양대 세력의 대리전을 수행했다. 같은 역사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정부의 냉철한 인식과 시의적절한 대응이 필요하다.
■‘신냉전’인가, ‘블록화’인가
변화에 대한 대응은 상황에 대한 정의에서부터 출발한다. 나토 정상회의 이후 국제사회를 설명하는 데 가장 많이 인용되는 말은 ‘신냉전’이다. 국제질서를 신냉전 시대로 정의하기 위해서는 과거 냉전 시대처럼 명확한 대립 구도, 기준, 갈등 사례가 필요하다.
지난해 5월,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부 장관은 ‘신냉전’ 상황을 언급하며 “인류에 가장 큰 위협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런데 키신저가 경고한 신냉전과 현재 상황은 구도가 조금 다르다. 키신저는 미·중 전략경쟁이 과거 미·소 냉전처럼 비화하는 상황을 지적했다. 반면 우크라이나 사태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갈등은 중국과 직접적 관련이 없다. 그럼에도 ‘신냉전’이 언급되는 것은 나토가 동맹의 외형적 확장을 시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럽을 공산 세력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1949년 출범한 나토는 소련 붕괴 이후 존재감이 줄었다. 나토의 비중 약화는 2개의 거대 세력이 대립하는 양극체제에서 미국 중심 단극체제로의 전환을 의미했다. 그런데 나토가 우크라이나 사태 이후 다시 주목받고 있다. 새로운 회원국을 받아들이는 외형적 성장뿐만 아니라 아시아·태평양 지역으로까지 영향력 확장을 시도 중이다. 한국, 일본, 호주, 뉴질랜드를 회의에 초청하고, 이들 국가 정상이 참석한 자리에서 중국을 ‘도전자’로 규정했다. 유럽이 아시아 문제에 개입한다는 비판을 무력화하고, 세력 간 구분까지 완료한 셈이다.
냉전 시기 ‘이념’이 양대 세력을 구분했던 것처럼 각 세력을 구분할 기준도 만들어졌다. 나토는 이를 민주진영 대 권위주의 행위자들(Authoritarian Actors)의 대결로 정의한다. “중국이 규칙에 기반을 둔 국제질서를 전복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나토의 신전략개념은 이를 잘 보여준다. 강선주 국립외교원 교수는 “갈등의 경계선은 왜 서구 세력이 이 문제에 나서야 하는지를 의미하기 때문에 중요하다”며 “러시아와 중국을 과거처럼 공산주의 체제로는 묶을 수 없기 때문에 권위주의 체제에 대한 비판을 새로운 경계선으로 둔 것”이라고 말했다.
대립의 구도, 기준은 신냉전 시대로의 전환을 알린다. 그럼에도 “신냉전 시대라고 하기에는 조금 더 지켜봐야 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대체적 평가다. 냉전 시기 한반도처럼 시대를 표상하는 대립점이 나타나야 한다는 의미다. 우크라이나 사태는 열전(Hot War)상태다. 전쟁을 어떻게 수습하느냐에 따라 국제사회가 ‘신냉전’으로 흐를지, 단순히 경제를 중심으로 나뉘는 ‘블록화’로 갈지가 결정된다. 김준형 한동대 교수(전 국립외교원장)는 “아직까지 완전히 신냉전 시대로 이행됐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30여년의 탈냉전 시대가 끝났다는 점만은 분명하다”고 말했다.
■겨울이 온다
국제질서를 판가름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은 장기화되고 있다. 러시아가 압도적 군사력으로 전쟁을 빠르게 종결시킬 것이란 예측과 달리 우크라이나의 저항은 거셌다. 미국을 비롯한 서구 세력의 물적 지원까지 더해지며 어느 쪽이 승리한다고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대치국면도 서서히 한계를 보이고 있다. 세계경제가 타격을 받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분업화된 공급망 시장에서 전쟁은 원유, 원자재, 곡물 등의 공급에 차질을 빚었다. 이로 인해 각국의 소비자물가지수가 폭등하기 시작했다. 미국 역시 급등한 물가를 낮추기 위해 금리를 인상하며 총력전을 펼치고 있다. 문제는 그 효과가 미국의 물가하락이 아닌 개발도상국의 국가부도(디폴트) 위기로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의 금리 인상으로 유동성이 줄어들면 개도국에 투자된 자본부터 급속히 빠져나간다. 개도국도 금리를 인상해 자본유출을 막아야 하지만 급속한 경기 침체에 빠질 수 있어 적극적인 대응이 어렵다. 결국 미국발 금리 인상으로 촉발된 달러화 강세는 개도국의 수입물가를 상승시키고, 채무 부담만 키운다. 지난 10여년간 미국의 저금리 기조 속에 달러 부채를 증가시켰던 개도국들부터 차례로 무너지기 시작할 것이라는 의미다. 실제로 세계은행은 중·저소득 국가가 외국계 기관에 지고 있는 대출 부채가 전년 대비 평균 9조3000억달러 증가한 것으로 추정한다. 수치로 따지면 6.9% 증가다.
스리랑카는 이미 지난달 디폴트를 공식화했다. 잠비아, 레바논, 파키스탄은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 등을 타진 중이다. 한 국가의 위기는 세계질서 위기와 연동된다. 특히 이들 국가의 부채가 중국의 일대일로 정책과 관련이 있다면 의미는 더욱 커진다. 중국은 개도국에 도로, 항만, 공항 건설 등에 필요한 자금을 빌려줬다. 부채를 상환하지 못할 경우 항만, 공항 등의 운영권이 중국으로 넘어갈 수 있다. 미국발 고금리 정책이 신흥국의 연쇄 부도를 만들고, 이는 결국 중국의 영향력을 공고히 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결국 이 상황을 해결하려면 전쟁을 끝내야 한다. 미국이 가치, 규범을 외치는 상황에서도 정전협상이 시작될 것이란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 김준형 교수는 “미국은 우크라이나 사태로 유럽을 결집했고,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한국, 일본 등을 나토와 연결하는 데까지 성공했다”며 “이제는 휴전에 들어가도 손해 볼 것이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빠르면 가을 무렵 휴전을 통한 우크라이나의 분쟁지역화가 이뤄질 수 있다”고 전망했다.
전쟁 장기화가 부담스러운 것은 유럽도 마찬가지다. 러시아는 유럽에 천연가스 등의 에너지를 공급한다. 유럽은 러시아를 대체할 에너지 공급지를 찾지 못했다. 이 때문에 우크라이나 사태의 변곡점으로 ‘겨울’을 주목한다. 에너지에 대한 계절적 수요가 폭증하는 겨울이 오면 러시아의 협상력이 높아진다. 이미 러시아는 천연가스 공급 중단 가능성을 내비치며 유럽을 압박하고 있다. 지난 6월 16일부터 설비 수리 지연을 이유로 ‘노르트 스트림’ 가스관을 통해 독일로 보내는 천연가스 공급량을 60% 감축했다. 로이터, 블룸버그 통신 등에 따르면 러시아는 오는 7월 11~21일에도 정기 점검을 이유로 가스관 운영을 중단할 계획이다. 김흥규 아주대 정외과 교수는 “러시아산 천연가스 공급 등에 의존해온 유럽이 에너지 수요량이 급증하는 겨울에도 지금처럼 단합된 모습을 유지할 수 있을지 미지수”라고 말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지난 6월 7일(현지시간)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와의 인터뷰에서 “서방 국가들이 우크라이나를 배제한 채 정전을 타진하려는 시도가 있다”며 “우크라이나 뒤에서 얘기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하지만 국제정치가 우크라이나의 입장을 배려할 것으로 기대하기는 어렵다. 우크라이나 영토를 동·서로 쪼개고 각각 러시아와 나토 영향권 아래에 두게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대로라면 우크라이나가 한반도의 전철을 밟을 수 있다는 의미다.
■중국부터 끊어내는 한국?
국제질서의 전환점을 맞아 윤석열 정부도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방향은 선명하다. 나토 정상회의 참석부터 한·미·일 3국 정상회담까지 미국에 발을 맞추는 식이다. 이 과정에서 최상목 경제수석은 “지난 20년간 우리가 누려 왔던 중국을 통한 수출 호황의 시대는 끝나가고 있다”며 “중국의 대안인 시장이 필요하고 다변화가 필요한 실정”이라고 말했다. 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이라는 이른바 ‘안미경중’ 기조의 변화를 공개적으로 언급한 것이다.
문제는 발 빠른 언급만큼 대안도 충분히 마련했는가 여부다. 한국은행이 지난 6월 말 발표한 ‘우리 경제 수입공급망 취약성 분석’을 보면 한국의 대중국 무역의존도를 알 수 있다. 보고서는 “지난 10년간 핵심교역국으로서 중국의 영향력이 지속적으로 확대되면서 글로벌 교역 네트워크의 중국 의존도가 심화됐다”고 분석했다.
특히 광물, 철강, 비금속(알루미늄합금) 등 주요 취약품목의 경우 중국으로부터 수입하는 비중이 29.1%에 달한다. 주요 국가들의 취약품목에 대한 중국 수입 비중이 20.5% 정도인 점을 감안할 때 상당히 높은 수치다. 구리, 알루미늄, 아연 등 주요 광물의 경우 중국으로부터 수입하는 비중은 평균 67%다. 이는 한국의 주요 수출품목인 반도체, 이차전지 산업 등과 관련돼 있다. 정제되지 않은 말 한마디에 국가경제가 송두리째 흔들릴 수 있다는 의미다.
유럽이 중국의 대안이 될 수 있느냐도 따져봐야 한다. 전병서 중국경제금융연구소 소장은 “중국은 홍콩까지 포함할 경우 우리 수출의 28% 정도인 반면, 유럽은 14% 정도인데 이 구조를 4~5년 안에 바꾸기는 어렵다”며 “수출 구조를 보면, 88%가 중간재나 원자재 같은 것들인데 소비 중심의 유럽에 중간재를 얼마나 팔 수 있느냐도 의문이다”고 말했다.
나토 정상회의 이후, 중국 관련 기업들의 주가는 하락하고 있다. 투자자들을 중심으로 “왜 쓸데없는 발언을 하며 ‘신냉전’의 선두에 한국이 서느냐”는 볼멘소리가 나온다. 정부가 서구 진영의 대표주자로까지 보이는 상황을 두고 김흥규 교수는 “한국 정부가 조급함을 그대로 노출하고 있다”며 “마치 시소를 타듯 전 정부와 반대 방향으로만 급격하게 움직이는 모습은 치밀한 전략이 없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국제정치 구조가 흔들리는 상황에서 강대국 정치에 휘말리면 우리가 희생자가 될 수 있다”며 “미국과 유럽조차 러시아와 중국을 적으로 돌리는 것에 확신이 없는 상황에서 한국이 마치 갈등의 한복판에 있는 것처럼 행동할 필요는 없다”고 덧붙였다.
■한·미·일 공조 강화가 일본 재무장 핑계되나
정부의 발 빠른 움직임은 비단 경제 분야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윤 대통령 스스로 이번 나토 정상회의의 가장 큰 성과로 ‘한·미·일 정상회담’을 꼽는다. 약 4년 9개월 만에 성사된 회담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안보협력의 확대다. 북핵, 탄도미사일 등에 대한 정보를 교환하는 수준을 넘어 실질적 군사협력 확장 가능성을 논의했다. 한반도 문제에 국한했던 협력을 지역 및 세계 문제에 대한 대응으로 넓히려는 의도도 나타냈다.
이미 지난 5월, 정부는 한미정상회담을 통해 북핵 대응을 위한 확장억제전략협의체(EDSCG) 재가동과 연합훈련 범위 및 규모 확대를 합의했다. 지난 6월 11일 싱가포르에서 열린 ‘아시아안보회의(샹그릴라 대화)’에서는 한·미·일 국방장관 회담을 열었다. 미사일 경보훈련과 탄도미사일 탐지·추적훈련 공동시행을 합의했고, 추가 조치 시행 가능성도 열어뒀다. 북한이 7차 핵실험 등으로 도발 수위를 높일 경우 한·미·일 공동 군사대응도 가능하다는 의미다.
그런데 한·미·일 협력을 통해 일본이 얻고자 하는 것은 대북억제 정도가 아니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한미동맹의 억지력 강화를 위해서도 일본의 방위력을 근본적으로 강화할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은 궁극적으로 ‘적 기지 공격능력 확보’를 달성하고자 한다. 이는 지역 문제에 대한 대응 능력을 포함한다. 미국이 바라는 중국 견제를 위한 ‘무기’가 일본이 될 수 있다는 의미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과의 관계개선은 일본 재무장을 추동하는 요인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 정부는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문제의 해법을 찾기 위해 민관협의회가 지난 7월 4일 출범했다. 묘한 시기에 묘한 한 수가 놓였다.
한국과의 협력 강화로 일본 재무장에 대한 국제적 제약 하나가 사라졌다면, 국내적 제약 역시 주요한 변곡점을 맞았다.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가 지난 7월 8일(현지시간) 선거유세 도중 총격으로 사망했다. 일본은 오는 7월 10일 참의원 선거를 앞두고 있었다.
아베 전 총리의 정치적 숙원은 ‘일본 헌법 9조 개정’에 있었다. ‘전쟁 포기’를 명시한 내용을 수정해 ‘보통국가’로 일본으로 전환하겠다는 것이다. 아베 전 총리가 유세에서 마지막까지 강조한 것 역시 개헌이다. 그는 “자위대의 위헌 논쟁에 종지부를 찍고 싶다. 일본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건 것은 자위대”라며 개헌 필요성을 주장했다.
아베 전 총리가 불의의 사건으로 사망하면서 일본은 충격에 휩싸였다. 그가 평생 ‘의미’를 찾는 정치인으로 살아온 만큼 죽음 마저도 ‘의미’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 이루지 못한 정치인의 신념은 어떤 식으로든 계승되기 마련이다. 개헌에 대한 명분을 찾던 일본에 ‘바람’이 불었다. 일본은 유력 정치인의 죽음을 계기로 완전히 다른 나라로 변모할 수 있는 기로에 섰다.
■확장억제가 정말 북핵문제를 해결할까
일본의 사정과 별개로 한국 정부가 일본과 관계개선에 나선 것은 결국, 북핵 문제 때문이다. 윤석열 정부는 미국이 바라는 ‘한·미·일 공조’를 강화하고, 반대급부로 ‘확장억제’ 강화를 얻고자 한다. 문제는 국제질서, 북핵 수준 등에 비추어 볼 때 해당 전략이 실용성이 있느냐 하는 측면이다. 북핵에 대한 국제적 연대는 이미 무너졌다. 당장 북한의 핵실험, ICBM 미사일 발사 등에 대한 유엔 안보리 제재부터 불가능한 상황이다. 앞으로 국제질서가 신냉전으로 갈수록 북한은 핵, 미사일 기술을 고도화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잡게 된다. 러시아와 중국이 ‘무기’로 이용할 수 있는 북한에 대한 제재를 허용할 리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확장억제가 제대로 기능할 것인가는 의구심을 낳는다. 정성장 세종연구소 북한연구센터장은 “북한이 미국 본토를 타격할 능력을 갖게 되면, 한국을 도발해도 미국이 개입하기 어렵다”며 “미국이 서울을 지키기 위해 워싱턴을 포기할 수 있을지 생각해보면 확장억제 무력화가 어떤 수순으로 진행될지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지난 6월 21~23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당중앙군사위원회 8기 3차 확대회의를 열고, 전방부대에 ‘중요 군사행동계획’ 임부를 부여했다. 노동신문은 경북 포항지역으로 추정되는 한국의 동부지역을 놓고 회의하는 북한 수뇌부의 모습을 공개했다. 북한은 지난 4월 16일 ‘신형전술유도무기’를 함흥 일대에서 발사하고 “전술핵 운용의 효과성”을 언급한 바 있다. 이에 따라 이번 ‘중요 군사행동계획’은 전술핵무기의 실전배치 아니냐는 해석이 나온다. 전술핵의 실전배치는 확장억제 무력화가 한발 더 나아갔음을 의미한다.
정 센터장은 “윤 대통령이 미국의 요구를 수용해 나토 정상회의도 참석하고, 한·미·일 협력에도 적극 나섰다면 그 반대급부로 이미 무력화가 시작된 확장억제를 넘어선 선물을 받아야 했다”며 “러시아, 중국의 견제까지 받게 된 상황에서 핵에 맞설 한국군의 역량 강화 방안은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한국 외교에 필요한 것
미국은 국제질서의 ‘규칙을 만드는 자’의 입장에 서 있다. 규칙을 어겨도 변경해버리면 그만이다. 세계를 향해 가치, 규범을 강조하면서도 정작 바이든 대통령은 사우디를 방문하고, 중국에 대한 관세 인하 방침을 고민한다. 미국이 자국 물가 관리를 신경 쓰는 사이 러시아와의 전쟁은 우크라이나가 담당하고, 중국에 대한 견제는 한국, 일본, 호주 등이 분담한다.
윤 대통령 역시 국제사회를 향해 “보편적 가치와 규범을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 지금까지 윤 대통령이 보여준 ‘외교적 인식·전략’은 가치와 규범을 강조하는 국제정치의 ‘이상주의’가 말하는 것들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이상주의는 미국 중심의 단극질서가 형성된 후 힘을 얻은 논리다. 그런데 국제질서가 현실적으로 변하고 있다. 한국은 국제질서의 ‘규칙을 만드는 자’도 아니다. 결국, 윤 대통령이 말하는 가치와 규범은 현실적으로 변하는 시대 상황 속에 행동반경을 스스로 한계짓는 것과 같다. 오직 ‘규칙을 따르는 자’로만 살아 온 국가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그런데 국제사회에는 ‘규칙을 파괴하는 자(Rule Breaker)’도 있다. 인도와 튀르키예(터키)는 미국과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모든 규칙을 따르지는 않는다. 엄밀히 따져, 일본 역시 변화하는 국제질서를 이용해 헌법 개정, 재무장이라는 목표를 향해 걸어나가고 있다. 지정학적 요충지라는 외교적 지렛대(레버리지)를 활용해 원하는 것을 쟁취하고 있는 것이다. ‘규칙을 만드는 자’가 아니어도 국익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을 이들은 보여준다.
김흥규 교수는 “한국이 북핵 중심의 안보체제에서 세계적 안보문제에 참여하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은 주목할 만하다”면서도 “문제는 정부가 전략적 비전과 역량을 가지고 새로운 도전에 나선 것이 아닌 단순히 특정 강대국을 추종하는 수준의 모습만 보이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준형 교수 역시 “미국 입장을 그대로 추종하고 반복하면 한국은 다 잡아놓은 고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며 “중국 바로 옆에 붙어 있는 나라가 ‘신냉전’이라고 제일 앞에서 달리면 보복만 당한다. 지금은 속도 조절을 해야 할 때”라고 말한다.
국제질서는 빠르게 신냉전, 현실주의로 옮겨가고 있다. 가치와 규범을 말하면서도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이를 내던지는 모양새다. 미국도 유럽도 일본도 마찬가지다. 한국 정부의 ‘원칙론’이 현실 국제정치에서 과연 언제까지 통용될 수 있을지 주목된다.
김찬호 기자 flyclose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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