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나, 1980년 언제 끝나?" 59세 동생의 "눈 감으면 여전한 그날"
[편집자주]'80년 5월'은 현재 진행형이다. 40여년이 흘렀으나 피해자들은 그날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원인 모를 질병과 트라우마, 우울증 등으로 고통받는 이들이 부지기수다. 정신병원에 입원하거나 자살한 피해자들도 많다. 최근 이들에 대한 정신적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뉴스1광주전남본부는 5·18 피해자들의 생생한 증언을 통해 정신적 손해 배상의 필요성과 당위성을 점검한다.
(광주=뉴스1) 박준배 기자,이수민 기자 = "저 충성이 누난데요, 혹시 인터뷰를 좀 미룰 수 있나요?"
5·18민주화운동 피해자 임충성씨(59)를 인터뷰하기로 한 날, 임씨의 누나에게서 연락이 왔다.
인터뷰 약속 시간까지 30분도 남지 않았는데 인터뷰를 미루자고 한다.
"집에서 인터뷰하자고 하셨잖아요. 근데 동생이 집 비밀번호를 까먹었다고 해서… 어휴."
임씨에게 '치매' 증세가 있다는 말은 5·18부상자회 관계자로부터 사전에 들어 알고 있었지만 증세가 생각보다 심해 보였다. 인터뷰 장소를 집이 아닌 5·18단체 사무실로 바꿨다.
7일 오후 3시 광주 서구 쌍촌동에 있는 공법단체 5·18부상자회 사무실. 임충성씨와 누나 임맹희씨(63)가 나란히 앉았다.
충성씨는 짧은 까까머리에 눈빛은 초점을 잃은 듯 순해 보였다. 외모는 50대이지만 어린 아이같은 천진한 모습이었다.
"경동맥 혈관이 막혀서 반신마비 됐고요. 알코올성 건망증에 간질, 얼마 전엔 치매 판정도 받았어요. 제가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지(無知)'의 상태예요."
취재진의 눈길을 의식한 듯 맹희씨가 동생을 대신해 '그날'을 전했다. 40여년간, 치매를 앓기 전까지 동생은 매번 그날을 떠올리며 누나에게 당시 상황을 얘기했다고 했다.
1980년 5월, 열일곱 살 충성씨는 어머니와 형·누나에게 귀여움을 받는 7남매의 막냇동생이었다. 광주상고 2학년에 재학하며 은행원의 꿈을 키우던 평범한 소년이기도 했다. 당시 이들 가족은 광주 북구 중흥동의 '큰 주택'에서 살았다.
"당시 아버지가 병으로 돌아가시고 안계셨지만 할아버지 세대부터 살던 집을 물려받아 크게 경제적인 어려움은 없었어요."
집터가 크고 빈방도 있어 전남대 학생들에게 하숙을 놓기도 했다. 당시 큰형이 육군 대위로 진급해 동네에서는 '부러운 임가(林家)'로 통했다.
80년 5월19일 월요일 오후 5시쯤이었다. 충성씨의 긴 머리를 본 큰 매형이 "학교에서 단속에 걸리면 어떡하냐"며 이발소에 가자고 했다. 중흥동의 단골 이발소에 도착했다.
머리카락을 다듬기 위해 천을 두르고 거울을 보고 있는데 이발소 문이 열렸다. 돌아보니 아는 동네 형이 팔에 피를 흘리며 이발소로 들어섰다.
"형님, 약 좀 있소? 서방시장 앞에서 갑자기 군인 놈들이 대검으로 찔렀당께요."
이발소 주인은 깜짝 놀라며 서랍에서 연고와 붕대를 꺼내 팔에 둘둘 감아줬다. 충성씨와 매형은 무슨 일인가 싶어 이발을 포기하고 서방시장 앞으로 향했다.
시장 앞에는 이미 학생과 시민 등 수많은 사람이 몰려 있었다. 머리에 흰 천을 두르고 "전두환은 물러가라", "계엄령 철폐하라" 구호를 외쳤다. 군인들과 투석전도 벌였다.
충성씨와 매형은 그 모습을 구경하다 어느 순간 시민들의 행렬에 뒤섞였다. 수많은 시민에 치이면서 충성씨와 매형은 서로 떨어졌다.
여학생들은 보도블록을 깨 짱돌을 만들어 시민들에게 나눠줬다. 충성씨도 짱돌을 받아 군인에게 던지며 함께 구호를 외쳤다.
기세가 오른 시민들이 밀어붙이자 군인들은 신역(현 광주역)까지 후퇴했다. 군인들은 신역 앞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대치했다.
"이참에 저놈들을 우리 광주에서 확 쫓아내 버립시다."
교련복을 입은 한 청년이 목소리를 높였다. 충성씨는 당시 정치나 시국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지만 동조하고 싶어 "옳소! 옳소!"를 외쳤다.
시민들이 군인들을 향해 전진했다. 군인과의 거리는 30m 정도로 가까워졌다. 군인들이 '앞에 총'을 하더니 사격 자세를 잡았다.
"발사!" '탕탕탕'
1열에 있는 군인은 총을 쏘고 2~3열에 있는 군인은 바닥에 떨어져 있는 돌을 집어 시민들을 향해 던졌다.
신역 앞은 아수라장이 됐다. 충성씨는 총소리에 깜짝 놀라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그때 '퍽!' 하며 군인이 던진 돌이 충성씨의 턱을 명중했다.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다행히 총을 맞지는 않았지만 입과 머리가 전부 얼얼했다.
"충성이는 그제야 번쩍 정신이 들었나 봐요. 쓰러져서도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대요."
충성씨는 아스팔트에 쓰러져 엎드린 채로 군인 반대편으로 기었다. 총소리에 놀라 도망치던 시민들이 충성씨의 온몸을 밟고 지나갔다.
정신을 잃기 직전, 누군가가 쓰러진 충성씨를 발견하고 팔을 잡아끌었다. 그는 정신이 혼미한 충성씨를 데리고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그 사람 없었으면 우리 충성이는 아마 그냥 죽었을 거예요."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동생을 대신해 당시 들었던 이야기와 진술서를 토대로 취재진에게 설명하던 임맹희씨가 이번엔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갔다.
같은 시각, 스물한 살의 누나 맹희씨는 퇴근 후 집에서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형부와 동생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오후 8시쯤 형부는 집으로 돌아왔는데, 막내 충성이는 돌아오지 않았다. 형부는 함께 시위대에 휘말렸는데 그곳에서 충성이와 흩어지게 됐다고 했다.
당시 맹희씨는 광주 남구에 있는 한 소방설비 사무실에서 경리로 일했다. 사무실은 건물 2층에 있었다. 이틀째 밖에서 군인들이 험상궂은 표정으로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고 뭔가 심상치 않음을 짐작했다고 한다.
"동생이 돌아오지 않으니까 온 가족이 거실에 둘러앉아 전화기만 쳐다보고 있었죠. 갑자기 전화기 벨이 울렸어요."
40대 초반 정도 돼 보이는 남자가 건 전화였다.
"혹시 임충성씨 댁인가요? 충성씨가 쓰러져서 제가 업고 저희 집으로 왔습니다. 통행금지가 끝나면 내일 오전에 집으로 보내겠습니다. 저희 집은 중흥국민학교 쪽입니다."
걱정을 한시름 놓은 임맹희씨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다음날이었다. 이른 아침 누군가 문을 두드려 나가보니 막내 충성이가 문 앞에 서 있었다.
턱에 반창고가 붙어 있고 목까지 피딱지가 굳어 있었다. 입술과 볼이 퉁퉁 부었다. 상처는 심각해 보였다. 입고 나갔던 베이지색 봄 점퍼엔 사람들이 밟고 지나간 신발 자국으로 시커멓게 얼룩졌다.
"데려다주신 분은 어디 계시냐?"
어머니가 황급히 얼마간의 사례금을 담은 봉투를 들고나와 동생에게 물었지만 그 남성은 이미 떠난 뒤였다. 가족들은 충성씨를 데리고 병원에 가야 했다.
매형이 자전거 뒷좌석에 충성씨를 태우고 광주상고 앞에 있는 '김좌진 병원'으로 향했다. 원장은 턱을 보더니 상처가 심하다며 수술해야 한다고 했다. 22바늘을 꿰맸다.
수술 후 눈에 보이는 외상은 어느 정도 치료된 듯했지만 충성씨는 더 이상 예전의 평범하던 고등학생이 아니었다.
"상처 난 마음과 얼 먹은 몸뚱이는 방법이 없었어요. 어머니가 다니던 한의원을 쫓아 다니며 찜질과 한방으로 치료를 했지만 머리와 허리, 어깨에 고통이 가시질 않았죠.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했어요."
그때부터 충성씨는 집에서 생활했다. '은행원'의 꿈은 버린 지 오래고 눈만 떴다 감았다 인형처럼 살았다고 한다.
"어린애가 하도 몸이 쑤신다고 하소연하니 어머니는 여러 민간요법을 배워 오셨어요. 대나무 통을 썰어 화장실 똥통에 넣은 뒤 그 안에 밴 똥물을 마시면 몸이 낫는다는 얘길 듣고 1년 넘게 똥물을 먹기도 했죠."
하지만 차도는 보이지 않았다. 충성씨는 그날의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스무살이 넘어서면서부터는 술에 빠졌다.
"젊은 나이지만 망가져 버린 몸, 고장 난 턱 때문에 말을 하는 것도 바보 같았죠. 충성이는 '왜 하필 그곳에 가서 돌을 맞아 가지고…'라면서 매일 스스로를 원망했는데, 돌이킬 수도 없고 몸을 망가뜨리고 얼른 죽어야 고통을 잊을 것 같다고 했어요."
그즈음 군인이던 큰형은 그 모습을 보고 불같이 화를 냈다. 큰형은 "네가 내 앞길 막으려고 데모하는 델 나갔냐"며 동생을 때렸다.
임맹희씨는 "우리 충성이는 간첩도 아니고 데모를 나서서 했던 애도 아니지 않냐"며 말렸지만 큰형의 생각은 달랐다. 간첩이냐 아니냐가 중요하지 않았다. 그곳에 군인의 가족이 있었던 것만으로도 문제가 된다고 했다.
"나중을 위해서, 혹시라도 증거가 필요할까 봐 동생 다친 날 입었던 옷이랑 이것저것 다 챙겨놨거든요? 그걸 큰 오빠가 그날 다 버렸어요. 나랑도 울고불고 엄청나게 싸웠죠."
형이 휴가를 나올 때면 집안은 매일 싸움이 이어졌다. 틈만 나면 동생을 때리려는 형과 악을 쓰며 대드는 맹희씨, 술에 취한 충성씨까지 집안이 난장판이 됐다. 우애 좋던 남매는 서로의 가슴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하숙생들은 집에서 나갔고, 넓은 마당은 싸움터가 됐다. 충성씨의 트라우마는 더 심해졌다.
다친 턱으로 어눌하게 "누나 나 잘못 없는 거 알지? 나 간첩 아닌 거 알지?" 물었다.
"충성이가 거길 안 갔으면 형제들이 우애 있게 살았겠죠. 큰오빠랑 작은오빠는 남자는 남자답게 키워야 한다고, 얘 트라우마를 이해 못해요. 차라리 죽게 놔두래요. 그래서 7남매가 뿔뿔이 흩어졌어요."
1991년, 돈도 벌지 못하는 동생이 걱정돼 맹희씨는 자신이 운영하던 커피숍에서 종업원으로 일하도록 했다.
여전히 신체와 정신적 고통을 호소하고 술에 의존하는 동생이었지만 누나가 옆에서 지켜보니 조금 나아지는 듯했다.
마침 당시 국가에서 5·18 피해자를 대상으로 보상금을 지급했다. 임충성씨는 1200만원을 받았다.
그즈음 충성씨가 커피숍 손님 중 한 명과 사랑을 싹틔우다 연인 관계로 발전했다.
"동생이 결혼시켜달라고 하더라구요.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했죠. 살기 싫다고 맨날 지 몸을 혹사하던 앤데 결혼을 한다니 이제야 잘 살려나보고 생각했죠."
하지만 달라지지 않았다. 집에 가면 여전히 술을 마셨고 아내 앞에서 정신적 고통을 호소했다. 아내는 5·18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충성씨는 옷 보따리 2개를 들고 맹희씨 집으로 찾아왔다.
"아내가 바람을 피웠는데 오히려 그걸 따지니 쫓겨났다고 했어요. 알코올 중독 증세는 더욱 심해졌죠."
2015년쯤 알코올중독 치료를 위해 병원을 찾았다. 맹희씨는 그제야 동생의 수많은 병명을 알게 됐다고 한다.
"알코올 중독은 시작에 불과했어요. 간경화, 패혈증, 간질, 반신마비, 치매까지 매년 병명이 하나씩 늘었어요. 양쪽 발이 썩어가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됐어요."
혈전 약부터 알코올 중독 치료제, 불안 우울증 조절 약, 진통제 등 한번 병원에 가면 20만~30만원이 우습게 깨졌다. 수북한 영수증이 맹희씨 집에 쌓여 갔다.
갖고 있던 가게를 빼고 전남 담양에 사두었던 땅을 팔았다. 맹희씨 삶 역시 충성씨처럼 망가지고 있었다.
"근데 얘는 당연한 줄 알아요, 어휴. 내가 화를 내도 얘는 몰라요. 눈만 말똥말똥하게 뜨고. 얼마 전에는 갑자기 저수지로 뛰어들겠다는 거예요. 순수해서 그러는지, 정말 죽으려는지. 혼자 막 아장아장 걸어가면 나는 얘 또 죽을까 봐 따라가고…. 그래서 돌보고 돌본 것이 이렇게 시간이…."
말도 잘하지 못하는 충성씨는 가끔 어눌한 목소리로 "1980년이 언제 끝나냐"고 묻는다. 15층에서 뛰어내리려고 한 적도, 불을 지르려고 한 적도 있다고 했다.
여전히 순수하고 아기 같은 막냇동생 충성씨. 혼자 살아보라고 광주 북구 한 주공아파트를 얻어줬지만 누나와 떨어지기란 쉽지 않다.
"아프니까 걱정돼 죽겠는데 맨날 '누나 나 데리러 와?', '누나 비밀번호가 생각이 안 나. 문 열어줘' 하고 전화하니까 난 못 떠나요. 친구들은 자식들이 관광 보내주고, 여행 다니는데, 난 맨날 얘랑 병원 투어 다니는 거예요."
정신적 손해배상금을 받으면 뭘 하고 싶냐고 물었다. 충성씨는 눈만 껌벅거린다. 맹희씨가 깊은 한숨을 내쉰다.
"얘 기초생활수급자인데, 신청도 할 줄 몰라서 내가 해줬어요. 5·18 회원 신청도, 정신적 손해배상 소송도 내가 했어요. 술 사러 가서 거스름돈도 못 받아요."
충성씨는 지난해 2월 광주 북구청에서 '근로 능력 없음' 판정을 받았다.
맹희씨가 동생에게 바라는 것은 '혼자 살 힘'이 생기는 것이다. 맹희씨는 정신적 손해배상금을 통해 동생이 '병원'에 입원하거나, 혹은 '치료'를 받을 수 있길 바란다고 했다.
"나도 이제 짐을 좀 내려놓고, 내 삶을 살고 싶어요. 동생이 돈 버는 건 바라지도 않아요, 어디 가서 사고만 안 치길 바라죠."
맹희씨의 두 눈에 굵은 눈물이 맺혔다. 휴지로 눈물을 훔치는 맹희씨의 모습을 동생 충성씨가 말똥말똥 바라봤다.
"선생님. 누나 분한테 고마워요? 안 고마워요?" "고마, 고맙다 해요… 고마워…."
맹희씨가 "어이구…"하며 동생을 쓰다듬더니 고개를 푹 숙였다. 어깨를 들썩이며 목놓아 흐느끼는 울음소리가 5·18사무실을 한참 동안 맴돌았다.
breath@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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