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튤립값 거품' 사라져도, 꽃 키우는 농부는 남는다..고흐처럼
튤립과 얀 반 호이언
잘나가던 화가 얀 반 호이언
튤립 투기 몰두하다 빈털터리
빚 갚으려 헐값에 판 그림이
사후 재평가받아 가격 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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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게 드리워진 구름 속을 뚫고 네덜란드공화국 상선들을 호위하는 프리깃함이 닻을 올리며 출발한다. 이제 프리깃함은 상선들과 함께 수평선 너머로 돌진해 조국에 돈을 벌어다 줄 것이다. 마침 프리깃함의 포구에서 출발을 알리는 대포가 불을 뿜는다. 그러나 이 장엄한 시작에는 관심 없다는 듯 바다는 잔잔하다.
그러고 보니 그림 빛깔도 전체적으로 무채색에 가깝다. 이 작품은 네덜란드 화가 얀 반 호이언(1596~1656)이 말년에 그린 <어선들과 프리깃함 두 대가 있는 하구>이다. 반 호이언은 독특하게도 저렴한 오크나무(참나무) 패널에 이 잿빛 그림을 그렸다. 사실 이유가 있다. 그는 캔버스값과 물감값을 아낄 수밖에 없었다. 반 호이언은 억대 빚을 진 파산자였기 때문이다. 잘나가던 화가였던 그는 어쩌다가 빚쟁이로 전락했을까.
반 호이언이 살던 당시 네덜란드는 부자 나라였다. 네덜란드 사람들은 부를 과시하기 위해, 오스만제국에서 들여온 튤립을 재배하기 시작했다. 네덜란드인들의 눈에 튤립은 너무도 매혹적이었다. 일단 이국의 꽃이었기에 드물었고, 튤립 특성상 씨앗을 심은 후 3년에서 7년 정도가 지나야 꽃을 피웠기에 더 희귀했다. 날이 갈수록 튤립의 인기는 치솟았고 이 인기를 따라잡기엔 튤립의 공급량이 부족했기에 자연스레 가격이 오르기 시작했다. 아니, 자연스럽지 않았다. ‘튤립이 돈이 된다’는 것을 감지한 사람들이 전략적으로 튤립을 사들였기 때문이다.
튤립 가격은 미친 듯이 뛰었다. 나중에는 어떤 꽃이 필지 모르는 구근을 두고 선물거래를 하는 일도 벌어졌다. 땅속의 튤립 구근을 미래의 특정한 시점에 특정한 가격으로 살 수 있는 권리를 확보한 뒤, 약속한 결제 시점이 오면 시가와 거래가의 차액을 현금으로 결제하는 방식이었다. 1637년 1월, 튤립 구근의 가격 상승세는 절정에 달했다. 한달 동안 2600%나 가격이 상승하자 너나없이 집과 땅을 팔아 튤립 구근을 샀다. 그러나 그게 끝이었다. 마침내 1637년 2월3일, 네덜란드 하를럼에서 튤립 거래가 갑자기 멈춰버렸다. 이 상황이 비정상적이라는 것을 단체로 감지한 것일까. 며칠 사이에 전 네덜란드로 소문이 퍼지더니 튤립 거래가는 거의 100분의 1로 대폭락했다. 거품이 터진 것이다.
풍자 그림 속 주인공으로
당시 상황은 네덜란드 화가 피터르 놀퍼(1613~1652)의 <플로라의 바보 고깔모자, 혹은 한 바보가 다른 바보를 낳은 놀라운 해인 1637년의 광경, 게으른 부자가 재산을 잃고 현명한 자가 판단력을 잃다>라는 긴 제목의 그림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현재 코르넬리스 당커르츠(1603~1656)가 찍어낸 동판화로 전하는 이 그림은 계약서 하나에 의존해 튤립을 사고팔다가 혼란에 빠진 네덜란드의 당시 모습을 풍자하고 있다.
그림 중앙부에는, 꽃의 여신 플로라가 화난 군중에 둘러싸인 채 당나귀를 타고 도망가고 있다. 왜일까. 전경에 보이는 사람들이 바구니와 수레에 가득 찬 튤립 구근을 퇴비 더미에 버리러 가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가격이 폭락하면서 금보다 더 귀했던 튤립이 순식간에 밭에 뿌리는 거름만도 못한 것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림 중앙에는 여전히 투기꾼들이 저울을 앞에 놓은 채 거래 중이다. 그들이 모여 있는 곳은 두 사람이 싸우는 모습이 그려진 깃발 모양의 간판이 내걸린 한 여인숙. 그런데 여인숙 모양이 특이하다. 바보 어릿광대가 쓰는 커다란 고깔모자처럼 생겼는데, 이는 그들이 어리석은 거래 중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그런데 그 바보 모자 속에 있던 주인공이 바로 얀 반 호이언이었다. 그는 하를럼에서 튤립 가격 폭락 사태가 벌어진 이후였던 1637년 2월27일, 네덜란드 헤이그의 시장인 알버르트 반 라벤스테인에게서 구근 10개를 샀고, 8일쯤 후에 40개를 더 사서 구근값으로 총 912길더와 자신의 그림 두점을 지불했다. 그 뒤에도 자신이 가진 재산 거의 전부를 쏟아부어 858길더어치를 추가로 거래했다.
이윽고 그날이 왔다. 헤이그의 튤립 시장도 95%나 폭락한 것이다. 이때부터 반 호이언의 인생은 급전직하한다. 빚더미가 몰려왔고, 튤립 투기에만 전념하느라 3년 동안 그림을 그리지 않았던 반 호이언은 오로지 돈을 갚기 위해서 다시 캔버스 앞에 앉아야 했다. 그 후 19년 동안 2천점의 작품을 완성할 정도로 죽기 살기로 그림을 그렸지만 늘 가난에 시달렸고, 결국 자신의 그림을 급하게 팔기 위한 대중 경매까지 벌여야 했다.
이때 그린 그림들은 하나같이 차분한 잿빛이다. 이는 당시 튤립 거품이 빠져 활력을 잃은 네덜란드 사회의 분위기를 담은 것일 수도 있고, 반 호이언 자신의 심리 상태를 반영한 것일 수도 있다. 여하튼 그는 결국 빚을 다 갚지 못한 채 총 798길더의 빚을 남기고 죽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상황이 반전됐다. 반 호이언이 튤립 거래를 하며 돈을 벌었더라면 탄생하지 않았을 그 잿빛 그림들이 재평가를 받은 것이다. 옅게 채색된 무채색 풍경화가 자아내는 분위기가 “마치 안개가 낀 듯 묘하다”는 평가를 받으며 그림값이 오른 것. 생전 반 호이언이 빚에 쫓겨 헐값에 내놓은 그림을 샀던 사람들이 막대한 차익을 얻은 건 물론이다.
미술 자체의 가치
네덜란드의 천재 화가 빈센트 반 고흐는 생전 자신의 작품을 단 한점만 팔 수 있었다. 1889년 10월, 그는 약 200년 전 자신의 나라를 쑥대밭으로 만든 튤립 투기에 빗대어, 자신의 작품을 알아보지 못하는 세상에 대해 어머니에게 낙심 어린 편지를 보냈다. “간혹 듣게 되는 꿈같은 그림값! 살아 있을 때는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던 화가들, 죽은 후에야 평가받는 화가들의 작품이 그렇게 팔립니다. 튤립 거래와 비슷하다고나 할까요? 이런 거래에서 살아 있는 화가들은 아무런 혜택도 받지 못한 채 그저 고통스럽기만 합니다.”
하지만 반 고흐는 미술에는 명성이나 돈 이외의 다른 가치가 있다는 걸 확신하듯 글을 잇고 있다. “튤립 거래와 같은 것도 언젠가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나 튤립 거래가 사라지고 잊히더라도 튤립을 재배하는 사람은 남아 있을 것입니다. 저는 그림도 같은 것이라 생각합니다.”
요즘 미술 시장은 ‘대체 불가능한 토큰’(NFT·엔에프티)으로 들썩인다. 문제는 엔에프티를 거래하는 시장이 위험할 정도로 과열됐다는 데 있다. 과연 미술 시장의 튤립이라 할 만하다. 엔에프티 시장 속 작품 가격은 본연의 가치와는 상관없이 투자자가 밀물과 썰물처럼 밀리고 빠질 때마다 요동친다. 하지만 거대한 돈이 오가는 거래가 잊힌 후에도 튤립 자체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위해 꽃 농사를 짓는 농부는 반드시 있다. 그 농부의 마음이 최종적으로 승리할 것이다. 빈센트 반 고흐가 이를 충분히 증명하지 않았던가.
<화가의 출세작> <화가의 마지막 그림> <캔버스를 찢고 나온 여자들>을 냈다. 그림을 매개로 권력관계를 드러내고, 여기서 발생하는 부조리를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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