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일-북중러' 대결 허상에서 실재로..'동맹체인'이 부를 그늘

한겨레 2022. 7. 9.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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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S] 정욱식의 찐안보][한겨레S] 정욱식의 찐 안보
동아시아 남-북방 삼각동맹의 현실화
동북아 동맹, 전통적인 '양자' 체제
한미일 vs 북중러 동맹 원래 허상
신냉전 뒤 3각 대결 구도 실재화
'동맹 체인'서 오는 위기 경계해야
조현동 외교부 1차관(가운데)이 6월8일 서울 외교부 청사에서 열린 한·미·일 외교차관협의회에서 웬디 셔먼 미국 국무부 부장관, 모리 다케오 일본 외무성 사무차관과 만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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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 시대부터 우리에겐 한반도 문제를 바라보는 익숙한 문법이 있다. ‘한·미·일 남방 삼각동맹 대 북·중·러 북방 삼각동맹’의 대결 구도로 바라보는 시선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이분법적 이해와 표현은 허상에 가까운 것이었다. 한국전쟁 이후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치의 역사를 복기해보면, 이러한 대결 구도는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들어 한·미·일 대 북·중·러의 대결이 실제로 부상하고 있다.

이러한 허상과 실재를 인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한·미·일과 북·중·러는 오래전부터 대립해왔다는 관성적인 인식은 과거와 현재의 차이를 포착해야 할 시선을 흐리게 만든다. 시선이 흐려지면 위험을 제대로 인식할 수 없게 되고 대응책도 겉돌고 만다. 이에 따라 관성의 탈피와 변화하는 현실에 대한 직시가 절실해지고 있다. 그래야만 다양성은 사라지고 양극체제가 고착화될 위기에 처한 한반도 문제의 현실을 제대로 볼 수 있다.

60여년 전, 한·미·일 삼각동맹의 부상

다자간 동맹이었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와 바르샤바조약기구가 날카롭게 맞섰던, 그래서 진영 간의 대립이 확연했던 유럽과는 달리 동북아의 동맹 구조는 양자 중심으로 짜였다.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미국은 일본 및 한국과 차례로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했다. 하지만 한·일은 수교조차 맺지 못하고 있었다. 북한도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소련 및 중국과 상호원조조약을 체결했지만, 3자 간의 공식 동맹은 없었다. 오히려 1950년대 후반부터 중-소 분쟁을 비롯한 북-중-소 3자 관계의 균열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한·미·일 삼각동맹이 부상하기 시작한 시점은 1960년대 들어서다. 소련의 팽창과 중국의 핵무기 개발, 그리고 미국의 베트남 전쟁 개입이 초읽기에 들어가면서 미국은 한-일 관계 정상화를 강력히 요구했었다. 미국 주도의 한·미·일 협력 구도를 만들어야 공산 진영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다고 여긴 것이다. 1965년 한-일 협정은 그 산물이었다.

그런데 “국제정치에는 영원한 적도 우방도 없다”는 말을 실감할 수 있는 일이 벌어졌다. 1970년대 들어 베트남 전쟁에서 패색이 짙어진 미국은 중국과 소련을 상대로 동시에 데탕트에 나섰다. 이를 간파한 일본은 미국보다 앞선 1972년에 중국과 수교를 맺었다. 미국 역시 대만과 단교하고 중국과 관계를 정상화했다. 일시적인 데탕트로 끝났지만 남북한도 특사 교환과 회담을 통해 1972년에 7·4 남북공동성명을 채택했다. 북-중-소 관계에도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1960년대와 70년대 중-소 관계는 최악의 상황에 빠졌고 이에 따라 1950년에 체결한 중-소 조약은 유명무실해졌고 급기야 1980년에는 효력이 정지됐다. 중-소 갈등이 확연해지자 북한은 등거리 외교를 통해 실리를 극대화하려고 했다.

이처럼 일반적인 상식과는 달리 한·미·일 남방 삼각동맹과 북·중·소 북방 삼각동맹은 애초부터 없었다. 오히려 1970년대 초부터 미-소 냉전 종식 및 소련의 몰락이 일어난 1990년대 초까지는 소련을 ‘공동의 적’으로 삼은 미·중·일의 전략적 제휴 시기였다. 남북한의 엇갈림도 확연해졌다. 한국은 소련 및 중국과 차례로 수교하면서 북방 외교의 시대를 열었다. 반면 북한은 미국 및 일본과의 수교에 실패하면서 남방 외교의 좌절을 경험했다. 미국은 유일 패권국이 되었고 소련을 승계한 러시아는 ‘제 코가 석자’였다. 개혁개방에 나선 중국은 한·미·일과의 교역을 크게 늘리면서 경제성장을 구가했고 국제사회에서 외톨이가 된 북한은 ‘고난의 행군’에 돌입했다.

한·미·일 삼각동맹에 대한 미국의 미련이 되살아난 시점은 1990년대 말이었다. 미국이 ‘북한위협론’을 빌미로 삼아 미사일방어체제(MD·엠디)를 패권전략의 핵심으로 삼으면서 효과적인 엠디를 위해서는 한국과 일본의 참여가 필요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 한국과 일본의 선택은 엇갈렸다. 일본은 엠디에 참여하기로 한 반면에 김대중 정부는 불참을 선언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김대중 정부는 한-일 관계 개선을 추구하면서도 일본의 군사대국화 움직임에 대해서는 강하게 비판했다. 무엇보다도 김대중 정부는 한·미·일 군사협력의 대안으로 외교협력을 강조했다. 포용정책에 기반을 둔 한·미·일의 대북정책을 고안했고, 중국 및 러시아도 참여하는 동북아 평화체제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노무현 정부의 대외정책도 이와 흡사했다.

6자회담이 가져온 희망과 절망

엠디를 기반으로 삼아 한·미·일의 군사적 결속을 도모하려고 했던 미국의 의도는 쉽사리 관철되지 않았지만, 예견된 부작용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미국 주도의 엠디는 북한을 명시적인 적으로, 중국과 러시아를 잠재적인 적으로 삼은 것이었다. 이는 한·미·일 대 북·중·러의 갈등 구조를 잉태하기 시작했다. 미국이 한국과 일본은 포섭의 대상으로, 북·중·러는 위협으로 삼으면서 두 진영 간의 갈등이 차곡차곡 쌓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때 북한이 동북아 국제정치의 강력한 변수로 등장했다. 미국의 ‘적대시정책’에 맞서 2003년부터 핵무기 개발을 본격화한 것이다. 북한의 핵무장은 한·미·일은 물론이고 중·러도 바라는 바는 아니었다. 그래서 나온 것이 6자회담이다. 미국 주도의 엠디가 한·미·일 대 북·중·러의 대결을 잉태했다면, 북핵은 동북아에서 사상 처음으로 주요국이 모두 참여하는 다자회담을 낳았다.

6자회담은 동북아 상공에 출몰하던 신냉전의 유령을 쫓아낼 것으로 기대되었다. 한반도 문제 해결뿐만 아니라 동북아 평화안보체제도 추구하기로 했기에 더욱 그러했다. 하지만 청와대의 새로운 주인이 된 이명박 정부는 다른 꿈을 꾸고 있었다. 2008년 8월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뇌 관련 질환으로 쓰러지자 북한의 붕괴와 흡수통일 실현이 멀지 않았다고 여겼다. 이러한 ‘통일몽’은 2008년 12월에 6자회담이 결렬된 중요한 배경이 되고 말았다. 이명박 정부가 곧 망할 북한과의 협상을 부질없는 것으로 간주한 것이다.

2009년 1월 백악관의 새로운 주인이 된 버락 오바마 행정부는 어땠을까? 당시 미국은 조지 W. 부시 행정부가 시작한 아프가니스탄 및 이라크 전쟁에 허덕이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2008년부터는 금융위기가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계의 경제를 강타했다. 이 사이에 중국은 빠르게 부상하고 있었다. 그러자 오바마 행정부의 선택은 6자회담 재개보다는 한·미·일 군사협력에 방점이 찍혔다. 6자회담은 의장국 중국엔 좋은 일이고 부상하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한·미·일의 결속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힘을 얻은 것이다.

남북한의 엇갈림도 이에 힘을 실어주고 말았다. 이명박 정부 안팎의 인사들을 두루 만난 주한미국 대사관은 “이명박 대통령은 뼛속까지 친미·친일”이라는 취지의 외교전문을 본국에 보내고 있었다. 2007년 이후 남북·북미·6자회담이 선순환을 그리면서 잠잠해졌던 북한의 핵과 미사일 활동도 2009년부터 재개되기 시작했다. 4월 장거리 로켓 발사에 이어 5월에는 핵실험마저 강행한 것이다. 당연히 오바마 행정부는 이를 규탄하고 제재했다. 하지만 이게 다는 아니었다. 7월에 일본 도쿄에서 열린 한·미·일 국방회담에서 에드워드 라이스 주일미군 사령관은 북한의 로켓 발사 및 핵실험을 두고 “3자 협력을 제고할 수 있는 좋은 기회(good chance)”라고 말했다. 당시 국무장관이었던 힐러리 클린턴은 4년 뒤 골드만삭스 임원들을 상대로 한 비공개 강연에서 “북한이 주기적으로 문제를 일으키고 있지만 이는 굳이 나쁘게 볼 필요가 없으며 오히려 미국의 입장에서는 반길 만하다”고 말했다.

미국의 입장에서 “좋은 기회”이자 “반길 만한 일”은 바로 북한의 위협을 구실로 삼아 사실상의 한·미·일 군사동맹을 추진하는 것이었다. 오바마 행정부의 대북 무시정책인 “전략적 인내”와 대중 견제정책인 “아시아 재균형 전략”은 이렇게 만나고 있었다. 그런데 다 되어가던 밥에 재가 빠진 일이 벌어졌다. 2009년부터 한·미·일은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지소미아)을 밀실에서 추진하고 있었는데, 2012년 6월에 이 사실이 발각됐다. 그러자 이명박 대통령은 ‘친일 논란’을 불식하려고 한국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독도를 방문해 일왕의 사죄를 요구했다. 그러자 일본 정부는 거꾸로 이 대통령의 사죄를 요구했다. 온탕에서 냉탕으로 바뀐 한-일 관계는 박근혜-아베 시기에도 좀처럼 회복되지 못했다. 이를 방치할 미국이 아니었다. 한·일 정부를 압박해 위안부 합의를 성사시켰고, 한·미·일 군사정보보호 약정과 지소미아, 사드 배치 결정도 차례로 이뤄냈다. 이제 한·미·일 결속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되는 듯했다.

그런데 미국에서 반전이 일어났다. 미국 주류가 신봉해온 자유주의적 국제주의에 맹폭을 가하면서 “미국 우선주의”를 앞세운 도널드 트럼프가 클린턴을 꺾고 대통령이 된 것이다. 비즈니스맨을 자처한 트럼프는 동맹을 ‘돈벌이’의 수단으로 삼았다. 동맹 강화는 고사하고 돈을 주지 않으면 주한미군과 주일미군 철수도 불사할 것처럼 말했다. 또 미국과 맞짱을 뜨기로 결심한 김정은 위원장을 상대로 말폭탄도 쏟아냈다. 건곤일척의 승부를 벌이던 두 지도자의 머릿속에는 ‘만나볼까’라는 생각도 있었다. 한국에서도 반전이 일어났다. 국정농단에 분개한 시민들의 촛불혁명에 힘입어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되고 ‘평화 대통령’을 자임한 문재인이 대통령이 된 것이다.

왕이 중국 외교부장이 8일(현지시각)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외교장관 회의에서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과 악수하고 있다. 신화 연합뉴스

6자회담이 가져온 희망과 절망

2018년부터 남·북·미 정상이 주도하는 한반도 평화프로세스가 시작되자 동북아 국제정치도 요동쳤다. “일본 패싱”이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일본은 소외되는 듯했다. 반면 소원해졌던 북-중-러 관계는 빠르게 회복되었다. 이미 중·러는 2000년대 들어 미국이 엠디에 박차를 가하자 관계 회복에 나섰고, 나토의 동진과 미국의 아시아 재균형 전략이 맞물리자 반미 연대 수준을 높이고 있었다. 하지만 북핵 문제 및 이와 관련된 대북 제재를 둘러싸고 북-중과 북-러 관계는 악화되고 있었다.

그러다가 2018년에 한반도 평화프로세스가 개시되면서 북-중-러 관계는 밀착되기 시작했다. 집권 이후 한번도 북-중·북-러 정상회담을 하지 못했던 김정은이 시진핑 주석과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을 연이어 만난 것에서도 이를 알 수 있다. 이들 세 나라는 단계적 해법, 북한의 긍정적인 조치에 걸맞은 대북 제재 해결, 북한의 “합리적인 안보 우려 해결” 등에 대해 공동의 목소리를 냈다. 하지만 이 시기의 북·중·러의 관계 회복과 결속은 한·미·일에 대항하고자 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2019년 2월 북-미 정상회담이 ‘하노이 노딜’로 끝난 것과 6월 남·북·미 정상의 ‘판문점 번개팅’이 안 하느니만 못한 결과를 낳은 것은 한반도를 포함한 동북아의 전환기적 사건이었다. 가장 큰 전환은 북한에서 일어났다. 1990년대 이래 한반도 문제의 다양성의 핵심에는 북한이 때로는 벼랑 끝 전술로, 때로는 대화와 협상으로 한·미·일과의 관계를 풀겠다는 데에 있었다. 이랬던 북한이 대화의 문을 굳게 닫아걸었다. 남북·북-미 정상회담이 허망한 결과만 낳았다고 판단하고는 안보는 핵으로, 경제는 자력갱생으로, 외교는 중국과 러시아 중심으로 가져가겠다는 입장으로 돌아섰다.

북한을 대하는 중국과 러시아의 태도도 달라졌다. 이들 나라는 2017년까지만 하더라도 북한이 핵실험을 하거나 탄도미사일을 시험발사하면 대북 제재에 동참했었다. 그러나 2020년 이후 북한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 위반이 급증하고 있음에도 추가 제재 불가를 외치고 있다. 왜 그럴까? 전통적으로 북핵 문제는 미·중·러를 비롯한 국제사회의 협력적 의제였다. 이견도 있었지만 핵 비확산이라는 국제규범의 규정력은 강했었다. 하지만 신냉전의 기운이 확연해지면서 우선순위가 바뀌었다. 비확산보다 세력균형이 훨씬 중요해진 것이다. 이는 중·러가 공식적으로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할 수는 없더라도 북핵을 세력균형의 관점에서 바라볼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미국이 이스라엘과 인도의 핵무장을 묵인했던 것처럼 말이다.

동맹체인이 가져올지 모를 ‘그늘’

설상가상으로 최근 들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전쟁의 장기화, 미-중 전략 경쟁의 격화, ‘동아시아의 화약고’로 불리는 대만해협의 불안정, 윤석열 정부의 등장, 미국 주도의 북대서양-태평양 동맹 네트워크 등장 움직임, 일본의 대규모 군비 증강, 한·미·일 안보협력의 공식화 등이 맞물리고 있다. 처음으로 한·미·일 대 북·중·러의 대결 구도가 실제로 부상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이러한 대결 구도는 우리 국민의 마음속에서부터 확연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국내외 각종 여론조사를 종합해보면, 한국인들의 친미 감정은 역대 최고치이다. 북·중·러에 대한 반감도 역대 최고치를 향해 가고 있다. 또 한·미·일 대 북·중·러가 허상에 가까웠던 과거에는 이에 대한 경계심이 강했었다. 하지만 이러한 대결 구도가 확연해지고 있는 오늘날에는 이에 대한 문제의식이 크게 낮아지고 있다. 우리가 걸어가고 있는 길에 대해 치열한 토론이 필요한 까닭이다. 몽유병자처럼 동맹의 체인에 엮여 전쟁으로 빨려들어갈 수 있기에 더욱 그러하다.

한겨레평화연구소 소장

고려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북한대학원대학교에서 군사안보를 전공했다. 조지워싱턴대 방문학자로 한-미 동맹과 북핵 문제를 연구했다. 1999년 평화네트워크를 설립해 대표를 맡고 있다. <핵과 인간>, <한반도 평화, 새로운 시작을 위한 조건> 등 다수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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