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주의인문정원] 정치가의 말

2022. 7. 8. 2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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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혁신 비전 안 보이는 새정부
위기 인식 못할 때 쓰나미 될 수도

말은 세계의 현존이고, 자아의 선언적 실천이며, 행동에 앞선 신호탄이다. 말은 발화되기 이전 우리 안에 전체성으로 존재한다. 그런 뜻에서 인간은 말로 만들어진 커다란 덩어리라고 할 수도 있다. 인간 언어를 연구한 철학자 막스 피카르트는 “말은 인간 안에 침묵하는 전체 언어로서 들어 있다”라고 말한다. 인간 내부에서 말은 지속성과 연속성으로 하나의 전체를 이룬다. 우리가 하는 말은 이 전체 언어에서 떨어져나간 파편이다.

인간은 말하는 존재다. 특히 정치가에게는 말이 전부다. 정치가란 끊임없이 말하는 직업이다. 말은 소통과 설득의 수단이고, 미래 비전과 가치를 드러내는 목적을 수행한다. 정치가의 말은 정제되어야 하고, 신의가 있어야 하며, 사안의 핵심을 정확하게 짚어야만 한다. 신의를 얻는 말은 신중함을 품고 느림을 미덕으로 삼는다. 그런데 대중매체에서 만나는 대통령의 말들은 지나치게 빠르다는 느낌이다. 약간의 조급증과 더불어 짧은 시간에 내용을 압축해서 전달하려다 보니 이런 사태가 빚어지는 게 아닌가 싶다.
장석주 시인
윤석열 대통령은 출근길에 멈추고 잠시 서서 기자와 이야기를 나누는 도어스테핑을 하는데, 이전 정권에서는 없던 꽤 적극적 소통 방식이고, 국민과의 소통 약속에 대한 실천 행위일 것이다. 문제는 대통령이 준비되지 않은 말을 불쑥 내놓거나 정제되지 않은 말을 쏟아내는 데 있다. 정부 요직에 검사 출신들을 임명한다는 지적엔 “전 정권에서도 민변 출신들로 도배되지 않았느냐?”라고 반문하고, 보건복지부 장관 내정자의 연이은 낙마와 교육부 장관 내정자와 관련된 논란을 거론하며 의견을 묻자 “전 정권이 지명한 장관 중에 이렇게 훌륭한 사람이 있었느냐?”라고 윤 대통령은 기자에게 반문했다. 이 말에 국민 중 어느 정도가 공감할 수 있을까?

결국 복지부 장관 내정자는 자진 사퇴하고, 만취 수준의 음주운전 전과와 논문 표절 의혹을 받는 교육부 장관 내정자는 임명 반대 여론을 뚫고 장관 자리를 차지했다. 교육부 장관을 꿰찬 이의 무엇이 그토록 전 정권의 장관과 견줘 훌륭하다는 것일까? 윤 대통령이 그토록 혐오했던 전 정권 장관 후보자들이 삶의 내력에서 보여준 흠결과 파렴치함을 판박이 하듯 드러냈는데, 이것을 감싼 것은 균형 감각을 잃고 진영 논리에 빠진 결과로 쩨쩨한 아집에 지나지 않는다.

대통령의 말을 전하는 뉴스를 보면서 내 귀를 의심했다. 대통령의 생각과 국민의 생각이 크게 어긋난다는 점에서 이 말은 아주 부적절하다. 준비되지 않은 채 하는 말은 자의성, 즉흥성으로 인해 실언 가능성이 커진다. 결국 올 것이 오고야 만 것이다. 도어스테핑이 안고 있는 메시지 리스크가 터진 순간이다. 신선한 아이디어로 받아들여진 도어스테핑은 실수의 잠재성을 없앨 수 없다면 결국 폐지의 수순이 마땅할 것으로 보인다.

윤석열정부의 국정 수행에 대한 여론조사에서 부정 평가가 긍정 평가를 넘어선 결과가 나왔다. 이 여론조사 결과는 윤석열정부에 대한 민심 이반 징후를 드러낸다. 민생, 외교, 인사 정책에서 국민의 눈높이에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대통령은 “지지율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그저 국민만 보고 가겠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정권 초기에 맞은 심각한 위기의 신호인데, 정작 대통령 자신만 이런 현실을 애써 부정하니 딱해 보인다.

지난 선거에서 국민이 전 정권을 심판하고 새 권력을 선택한 것은 변화와 혁신의 열망이 컸기 때문이다. 새 정권은 출범 초기에 이미 변화와 혁신에 대한 비전은 없고, 그것을 실천할 자원과 에너지는 빈곤함을 고스란히 노출하고 있다. 국민들은 크게 실망한 것으로 보인다. 바로 이것이 현 정권의 국정 수행에 대한 여론조사에서 데드크로스가 발생한 직접적인 원인이다. 위기를 위기로 받아들일 때 그 위기는 진짜 위기가 아닐지도 모른다. 위기를 반전의 계기로 삼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위기를 위기로 인식하지 못할 때 이 위기는 쓰나미처럼 덮칠 수가 있다. 윤석열 정권에 닥친 이 위기가 내 눈에는 전혀 사소해 보이지 않는다.

장석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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