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정치인생, 총성으로 마감한 '비운의 총리' [아베의 일생]

권영은 2022. 7. 8.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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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보수 우파 대표 정치인
최연소 총리로 최장 재임 기록 
'우경화'.. 한국과는 불편한 관계
2020년 3월 총리 관저에서 기자회견에 나선 아베 신조 전 총리의 모습. 도쿄=AFP 연합뉴스

8일 참의원 선거 유세 도중 피격당해 사망한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는 일본 보수 우익을 대표하는 정치인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태어난 일본의 첫 총리이자, 헌정사상 가장 긴 총리직을 수행한 기록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그의 정치 인생 목표는 일본을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 강하게 만들어, 전후 패배의 상처를 가지고 있는 과거의 일본과 단절하는 것이었다. 총리 재임 동안 '아베노믹스'를 내세워 '잃어버린 20년'으로 불리는 장기불황에서 벗어나려 했으며, 패전국으로서 전쟁을 할 수 없다고 규정한 '평화헌법'을 개정하려 한 것도 이 때문이다. 과거사 반성 없이 동북아 패권국가로 부상하려는 아베의 질주 때문에 그가 총리직을 수행할 때 한국과 중국 등 이웃국과의 관계는 악화일로를 걸었다.


일 보수정치 아이콘… 3대째 정치 명문가 출신

아베 전 총리는 일본의 정치 명문가 출신이다. 패전 후 A급 전범으로 기소됐으나 석방된 후 총리직까지 오른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1957년~1960년 재직)가 그의 외할아버지다. 아버지 아베 신타로도 외무상과 자민당 간사장을 지냈다. 외조부인 기시 노부스케는 미·일 안보조약 개정을 주도하며 일본 내 우익 득세의 초석을 다진 아베의 정치적 뿌리 역할을 하고 있다.

아베는 1982년 외무대신으로 입각한 아버지의 비서관으로 정계에 첫발을 뗐다. 유력한 차기 총리 후보로 꼽혔던 부친이 췌장암으로 급사하자 지역구를 물려받아 1993년 중의원에 당선됐다. 당시 그는 조부의 뜻을 이어 "미국에 의해 강요된 헌법이 아닌 일본의 자주헌법을 제정하고 싶다"고 포부를 밝힌 바 있다. '전쟁 가능한 국가'로 가기 위한 헌법 개정은 그의 필생 과업이었다. 헌법 개정과 미일동맹 강화 등을 강조하는 정통보수를 자처하면서 2006~2007년, 2012~2020년 두 차례에 걸친 장기집권의 발판을 마련했다.

8일 오후 서울역 대합실에서 시민들이 아베 전 일본 총리 피격 소식을 접하고 있다. 연합뉴스

북한 문제로 정치적 주목… 한국과는 내내 불편

정치적 주목을 받게 된 건 북한의 일본인 납치 문제를 걸고넘어지면서다. 대표적인 대북 강경파였던 아베가 일약 국민 영웅으로 떠오른 계기였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당시 총리는 2003년 자민당 간사장으로 그를 전격 발탁했다. 3년 뒤 아베는 52세 나이로 최연소 총리가 된다. 그러나 이듬해 선거 참패와 건강상 이유로 1년 만에 총리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정치적 시련 끝에 아베는 2012년 자민당 총재로 재기에 성공한다.

7년 9개월간 이어진 2차 집권 기간 일본 사회가 급격히 우경화한 건 분명한 그의 과다. 아베는 A급 전범 14명이 합사된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하면서 한국과 중국 등 주변국의 강한 반발을 샀고, △역사 문제 △안전보장 △외교 등에서도 우익 성향 발언을 되풀이했다. 20015년 박근혜 정권과 맺은 한일 외교장관 위안부 합의는 현재진행형인 한일 갈등 불씨가 됐다. 이후 들어선 문재인 정부가 합의 수용을 거부하면서 관계는 급속히 냉각됐다. 2019년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수출심사 우대국)에서 제외하면서 촉발된 일본 상품 불매운동이 대표적이다.

8일 일본 도쿄에서 요미우리신문사 직원들이 아베 신조 전 총리의 피격 소식을 전하는 호외판을 배포하고 있다. 도쿄=AP 뉴시스

집권 말 각종 의혹에도 여전한 아베 대망론까지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을 되찾기 위한 경제정책 '아베노믹스'는 그의 트레이드마크다. 이를 기반으로 한때 국민 지지 76%를 얻기도 했다. 하지만 코로나19 등 요인이 겹치면서 별다른 성과를 보지 못했다. 장기적으로는 일본 경제에 재정 부담을 지웠다는 비판도 나온다.

집권 말기에는 모리토모 학원에 국유지를 팔아넘기려 했다거나 공적 행사인 '벚꽃을 보는 모임'을 사유화했다는 의혹 등에 시달렸다. 2020년 코로나19 대처 실패로 지지율은 20%대까지 추락했고, 지병인 궤양성대장염을 이유로 사임했다.

그러나 퇴임 후에도 자민당 내 그의 영향력은 여전했다. 자민당 최고 파벌인 아베파의 수장으로서 자신의 후임인 스가 요시히데 전 총리와 기시다 후미오 현 총리를 만드는 데 막후에서 결정적 역할을 했다. 다시 총리직에 도전할 것이라는 관측도 꾸준히 흘러나왔다. 이번에도 '보수 구심점'으로서 참의원 선거를 앞두고 지원 유세에 나섰다 사망한 그는 결국 '비운의 총리'로 남게 됐다.

권영은 기자 you@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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