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거래 사기 급증에도 계좌 지급정지는 불가능.. "허술한 제도가 피해자 양산"

이학준 기자 2022. 7. 8.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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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스 피싱은 계좌 동결 가능한데, 중고거래 사기는 '불가능'
배상명령신청·민사소송 등 피해자 스스로 구제하는 수밖에
"허술한 제도가 중고거래 사기 피해자 양산"

A씨는 지난달 18일 인터넷에서 중고 오토바이를 판매한다는 글을 봤다. 평소 갖고 싶었던 모델이었기에 판매자인 박모씨 휴대전화 번호로 연락을 했고, 박씨는 자신을 오토바이 판매점 사장이라고 소개했다. 사업자등록증을 비롯해 자신의 신분증과 명함까지 보여줬다.

A씨는 박씨가 안내하는 한 안전거래 플랫폼을 통해 3000만원을 입금했다. 그런데 입금하자마자 박씨와의 연락이 두절됐다. A씨는 박씨가 운영하고 있다던 오토바이 판매점에 문의를 했으나 “그런 사람은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박씨가 보여줬던 신분증과 사업자등록증 등은 모두 가짜였고, 박씨가 소개했던 안전거래도 조작된 것이었다.

A씨는 자신이 사기를 당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은행을 찾아 박씨 명의 계좌에 대한 지급정지를 요청했다. 계좌 지급정지가 되고 입금한 3000만원이 사기 피해금이라는 사실만 증명하면 곧바로 돈을 돌려받을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은행은 “법적 근거가 없다”며 거절했다.

[그래픽] 이은현

최근 중고거래 사기 수법이 교묘해지면서 피해 금액은 날로 증가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피해를 줄일 수 있는 ‘사기이용계좌 지급정지’는 전화금융사기(보이스 피싱)를 제외한 중고거래 사기 등에는 적용되지 않아 허술한 제도가 피해자를 양산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박씨에게 중고거래 사기를 당한 건 A씨만의 일이 아니다. A씨 외에도 박씨로부터 사기 피해를 당했다는 글이 여러 인터넷 커뮤니티 사이트에 올라왔다. 피해자들끼리 모여 정보를 종합해 보니 박씨는 지난달 18일부터 약 일주일 동안 집중적으로 중고거래 사기 행각을 벌였다. 사기 물품은 오토바이를 비롯해 조립식 주택, 텐트, 레고, 시계, 핸드폰 등 다양했다. 피해자모임에 따르면 박씨에게 사기를 당한 피해자는 100여명이고, 피해 금액은 2억원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 만일 은행이 박씨 명의 계좌를 지급정지했더라면 피해 규모는 줄어들었을 것이란 게 피해자들 주장이다.

은행 입장에선 법적 근거가 없기 때문에 피해자들의 사정이 안타까워도 계좌 지급정지는 불가능하다는 입장이다. 통신사기피해환급법에 따르면 은행은 특정 계좌가 사기에 이용됐다는 의심이 들면 지급정지를 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이는 전화금융사기(보이스 피싱)에만 한정되고 ‘재화의 공급을 가장한 행위’인 중고거래 사기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보이스 피싱 피해에 대해서는 지급정지가 되지만, 중고거래 사기는 안 된다는 것이다.

주무부처인 금융위원회 역시 법에 따를 수밖에 없다는 입장이다. 금융위 관계자는 “중고거래 등 물품을 구매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것들은 형법의 영역이기 때문에 통신사기피해환급법에 해당되지 않는다”며 “금융회사에서 고객의 계좌를 지급정지할 법적 근거가 없다”고 설명했다.

A씨가 박씨에게 3000만원을 입금한 내역. 메일을 통해 '안전거래'로 등록됐다고 소개하고 있지만, 실상은 박씨가 조작한 것. /독자 제공

경찰을 통해 지급정지가 가능하지만 영장을 발부받아야 하는 문제가 있다. 사건 접수부터 영장을 받기까지는 7~10일이 소요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박씨처럼 단기간에 집중적으로 사기를 치고 빠져나가는 사기범이 활개치기 충분한 시간이다.

중고 오토바이를 구매하기 위해 박씨에게 880만원을 입금한 또 다른 피해자 B씨는 “사기 당한 걸 알고 송금한 돈에 대해 지급정지 요청을 했는데, 은행이 ‘재화 사기는 계좌 동결이 어렵다’는 말만 했다”며 “보이스 피싱을 제외한 다른 범죄에 대해서 계좌 동결이 어렵다면 허술한 제도가 피해자를 양산하는 것 아니냐”고 했다.

중고거래 사기 피해자들은 사기범이 붙잡히기 전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다. 사기범이 검거돼 재판을 받더라도 배상명령 신청을 해야 한다. 사기범이 배상명령을 무시하면 강제집행에 나서야 하고, 미처 배상명령 신청을 하지 못한 경우에는 사비를 들여 민사소송을 진행할 수밖에 없다. 범죄를 소명할 필요 없이 자동으로 사기 피해금을 돌려주는 사기이용계좌 지급정지 제도와는 차이가 난다.

다른 피해자 C씨는 “경찰에 신고해도 수사관이 배당되고 사건이 사기범 주소지 관할로 이관되고 하다 보면 통상 6개월 넘게 걸린다고 한다”며 불만을 드러냈다.

전문가들은 중고거래 사기 사건에도 계좌 지급정지 제도를 적용할 필요가 있다고 보고 있다. 다만 부작용도 함께 발생할 우려가 있는 만큼 지급정지는 신속하게 하되, 피해금액 환수는 범죄사실이 소명됐을 때 진행하는 등 유연성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곽대경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피해가 계속해서 발생하고 있는 긴급한 상황의 경우 경찰의 영장을 통해 지급정지를 하는 것은 다소 부족해 보인다”며 “빠르게 피해를 예방할 수 있는 제도와 장치 마련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이어 “계좌 지급정지는 거래 자체를 못하게 하는 것이니 신속하게 조치를 취하는 게 맞다”면서도 “추가적으로 새로운 사실이 밝혀지는 경우도 있으니 동결된 피해금 환수는 범죄 사실이 일정 수준 이상 밝혀졌을 때 하는 방법도 적절하다”고 했다.

한국인터넷진흥원에 따르면 중고거래 사기 건수는 2014년 4만5877건에서 작년 12만3168건으로 168% 증가했다. 같은 기간 피해금액은 202억1500만원에서 897억5400만원으로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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