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기된 ABC의 유령.. 정부 광고 무슨 기준으로 집행할까

이정환 대표 2022. 7. 8.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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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언론학회 세미나] 열독률 조사에서 잡히지 않는 지역 신문도 상당수, "홍보 기여도는 언론사 줄 세우기로 악용될 가능성도"

[미디어오늘 이정환 대표]

종이신문 발행 부수는 한국 신문 산업의 구조 개편을 지연시켜온 거대한 사기극이었다. 한국에서 날마다 발행되는 종이신문이 900만 부. 이 가운데 700만 부가 팔린다는 게 한국ABC협회의 부수 공사 결과였지만 실제로는 최대 두 배 가까이 부풀려져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지난해 미디어오늘의 연속 보도로 발행 부수 조작 실태가 드러났고 급기야 지난해 7월, 문화체육관광부가 ABC 부수를 정책적으로 활용하지 않겠다고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정부가 ABC 부수를 공식적으로 폐기한 뒤 1년이 지났지만 지역에서는 여전히 ABC 부수가 신문사를 줄 세우고 정부 광고를 배분하는 지표로 활용되고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ABC 부수를 대체할 만한 지표가 없다는 지적도 나왔다.

▲ 8일 경남 창원시 진해이순신리더십국제센터에서 열린 한국지역언론학회 학술대회.

8일 오후 경남 창원시 진해이순신리더십국제센터에서 열린 한국지역언론학회 학술대회에서 허찬행 청운대학교 교수는 “ABC 활용 중단 이후 일부 지방자치단체에서 정부 광고의 집행 기준이 개선된 게 아니라 사실상 후퇴했다”고 지적했다. 이날 허 교수가 공개한 한 지방 정부의 광고 집행 계획에 따르면 과거 발행 부수를 기준으로 4개 등급으로 나뉘어 있는 광고 배정 금액이 여러 단계로 나뉘면서 광고주의 재량 범위가 넓어졌다. 심지어 허위 과장 또는 악의성 보도를 내보낸 언론사는 광고를 배정하지 않는다는 등의 기준을 내건 곳도 있다.

허 교수는 “폐기된 ABC 제도가 그대로 남아있으면서 언론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는 제도적 불일치가 지속되고 있다”면서 “이런 구조에서는 지역 신문들이 감시와 비판 역할을 할 수 없게 된다”고 덧붙였다.

▲ ABC 협회가 집계한 발행 부수와 유료 부수.

허 교수에 따르면 정부가 ABC 부수를 활용하지 않겠다고 발표했지만 ABC 부수의 대안이 마땅치 않은 상황이다. 첫째, 지역신문법에는 한국ABC협회 가입 신문사를 지원 대상으로 규정하고 있다. 둘째, 구독률과 열독률 등의 이용자 조사 자료가 참고 지표로 거론되고 있지만 일부 지역신문이 아예 조사에 잡히지 않는 등의 문제가 있다. 셋째, 지방 정부의 광고 집행 기준으로 활용되고 있는 홍보 기여도 역시 ABC 부수의 대안이라고 보기 어렵다. 허 교수는 “홍보 기여도는 기관의 보도자료 기사화 정도, 기자 회견 참석 건수 등인데 기관의 스피커 역할에 충실할수록 광고 수주에 유리한 기준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허 교수는 “지역신문법의 지원 대상에 ABC 가입 의무 규정을 삭제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또한 “정부광고법을 개정해서 지방 정부가 광고 집행 관련 조례를 제정하도록 명시하고 예산 집행을 위한 공식적인 기준을 도입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 전국언론노동조합이 한국언론진흥재단에 정보 공개 청구를 해서 확보한 2016년부터 2020년 5월까지 정부 광고 집행 현황.

실제로 토론자로 나선 강창덕 경남민주언론시민연합 대표에 따르면 유가 부수가 1167부인 양산일보는 열독률은 0.0051%인데 유가 부수가 1만4367부인 경남도민일보는 열독률이 0.0050%로 낮게 나타났다. 경남신문과 경남일보는 발행 부수가 각각 3만3424부와 1만4930부인데 열독률은 0.0182%와 0.0418%로 경남일보가 더 높게 나타났다. 부수 공사의 신뢰성도 의문이었지만 열독률 조사가 얼마나 정확한지도 의문이라는 이야기다. 거제신문이나 고성신문, 뉴스사천 등은 발행 부수 기준으로 선정할 때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우선 지원 대상이었지만 열독률 조사에서는 아예 잡히지도 않았다. 열독률 조사를 발행 부수의 대안으로 활용할 경우 상당수 지역 신문사들이 지원대상에서 배제될 수 있다는 이야기다.

▲ A 지자체의 정부 광고 집행 계획 변경 사항. 허찬행 교수 발표 자료 가운데.

토론자로 나선 우희창 충남대학교 교수는 “ABC 제도는 역사 속으로 사라져야 할 때가 됐다”면서 “특히 지역신문법의 ABC 가입 의무 규정은 즉시 삭제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 교수는 “정부는 매체 영향력과 사회적 책임 등과 관련해 복수 지표를 참고하도록 한다는 계획인데 조사 방식에도 문제가 많고 특히 지역 신문에 매우 불리하게 작용한다”고 지적했다. 우 교수는 “궁극적으로 종이신문의 영향력에 대한 판단 기준이 달라져야 할 때”라고 덧붙였다.

윤희각 부산외국어대학교 교수는 “정부 광고 집행 기준을 조례로 제정하는 과정에서 지역 언론사의 로비 또는 압력, 출입 기자의 로비 능력, 출입 기자단과 지방 의회 개입 가능성 등의 문제를 고려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윤복 충남대학교 교수는 두 번째 주제 발표에서 일본의 ABC 부수 조작 관행이 왜 근본적인 개혁으로 이어지지 않는지 분석한 결과를 소개했다. 이 교수에 따르면 일본에서는 이미 1970년부터 실제로 배포되는 부수보다 많은 부수를 판매소에 배정하는 이른바 '압지'가 사회적 문제로 떠올랐다. 1977년 조사에서는 발행부수의 8.3%가 '압지'에 해당한다는 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일본 경제가 호황일 대는 전단지 광고 수요가 늘어 압지의 손해를 상쇄할 수 있었지만 1990년 이후 신문 구독이 급감하면서 신문사와 판매소 사이의 소송이 늘어났다.

이 교수는 “이 부분을 개혁해야 한다는 주장이 미디어 업계 전반의 불이익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업계 관계자 누구도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라며 “일본의 사회적 소통 문화가 발행 부수 조작 관행의 근본 개혁을 방해하는 요인으로 작동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 ABC 부수 공사에 근거한 정부 광고의 집행 단가. 2019년 기준.

김대경 동아대학교 교수는 세 번째 주제 발표에서 지역 공공 포털을 지역 신문의 영향력 조사를 위한 대안으로 제안했다. 인터넷 신문의 영향력을 측정하는 데 포털 제휴 여부나 트래픽 정보 등으로 한계가 있기 때문에 지역 언론사들이 지역 단위 공공 포털에 뉴스를 공급하고 이용자 데이터를 수집해서 영향력을 측정하자는 제안이다.

김 교수는 “지역 신문 기사의 유통 구조를 개편해서 지역 주민들에게 양질의 정보와 콘텐츠를 제공하고 여론 수렴과 지역 문화 창달을 통해 지역 주민들이 소통할 수 있는 공론장으로 거듭날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박진우 건국대학교 교수는 “지역 언론 공공 포털이란 것이 만들어진다면 포털이라는 형식 보다는 지역 언론사들의 협력이라는 내용에 방점이 찍혀야 한다”면서 “포털이라는 형식은 피할 수 없는 대안이 아니라 선택 가능한 옵션 가운데 하나 정도로 위상을 낮춰서 고민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양문희 상지대학교 교수는 “공공 포털의 주체가 누가 될 것인지, 그리고 영향력 조사의 구체적인 방안 등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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