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나의 죽음은 동반자살 아닌 '비속살해' [배정원의 핫한 시대]
부모의 자식 살해는 '오죽했으면..' 하는 온정주의로 인해 잘못된 사회적 인식 만들어
(시사저널=배정원 세종대 겸임교수 (보건학 박사))
최근 전 국민의 관심을 모았던 한 가족의 실종이 비극적인 죽음으로 확인돼 국민의 마음을 비탄에 젖게 했다. 전남 완도에서 실종된 유나양 가족은 살아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국민의 염원을 뒤로한 채 처참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실종 수사가 진행되면서 유나양 부모가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수면제' '극단선택 방법' 등을 검색했다는 것이 밝혀지고, CCTV에 찍힌 축 늘어진 아이를 업은 부모의 행적은 더욱 불안감을 키웠다.
이에 대해 한 정치인은 SNS에서 '동반자살'이라는 용어를 썼다가 호된 비난에 직면했다. 유나양은 부모와 합의된 자살이 아니라 부모에게 살해된 것이 분명한데, 이에 대해 '동반자살'이라는 가해자 시각의 단어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우리 사회에서는 경제난이나 개인의 신병 때문에 자살을 선택한 부모들이 일방적으로 먼저 자녀들을 살해하는 죽음에 대해 '동반자살'이라는 용어를 사용해 왔다. 하지만 엄격한 의미로 볼 때 이런 죽음은 동반자살이 아니라 부모가 자녀를 살해한 후 자신이 자살하는 형태의, 피해자인 자녀의 입장에서 보면 엄밀하게 '가장 믿고 의지했던 부모에 의해 살해당한' 것이다.
'아동살해'나 '자녀살해' 또는 '가족몰살'이 더 적합
동반자살이란 용어를 사용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이 용어가 명백한 자녀 살인임에도 '오죽했으면…'이라는 온정주의를 불러일으키고, 오히려 사회가 가해자의 논리를 내면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부모가 자신의 뜻대로 자녀의 죽음을 결정할 수 있다는 잘못된 인식을 가져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부모의 처지가 절망스럽다 해도 부모가 자녀의 목숨을 빼앗을 권리는 당연히 없다.
또 동반자살이라는 말은 사회적 안전망의 부재라는 사회공동체가 져야 할 책임의 무게를 개인의 문제와 비극으로 몰아갈 수 있다. 부모가 이웃과 사회를 믿지 못해 부모 없이는 자기 아이가 사회에서 어른으로 잘 성장할 수 없으리라는 생각으로 자식의 목숨을 끊는 데는 부모 자신의 잘못된 예측뿐 아니라 그가 속한 사회 또한 분명한 책임이 있다. 개인이 믿고 의지할 사회공동체의 안전망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증표이기도 하므로
다행스럽게도 최근의 언론 보도에서는 동반자살이라는 용어 사용을 지양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부모가 자신의 일방적인 결정으로 자녀를 살해하고 자신도 죽음을 선택하는 것을 마치 모두가 동의해 자살한 것처럼 표현하는 것에 대한 문제제기가 10여 년 전부터 계속돼 왔고, 이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서구에서는 이런 살인범죄에 대해, 죽임을 당하는 자녀의 시점에서 '아동살해(child homicide)' '자녀살해(filicide)'라고 인식하고 그 후에 이뤄진 부모의 자살은 별도의 문제로 다뤄왔다. 최근에는 '가족몰살(family amnihilation)'이란 용어가 등장했는데, 자신의 이기적이고 그릇된 판단으로 한꺼번에 가족의 죽음을 가져온다는 점에서 가장 적절한 용어가 아닐까 싶다.
서구의 많은 연구에 의하면 가족몰살의 주 가해자는 '가장의 역할에 대해 고정관념이 강한 남성'들인데, 가족 내 성별 역할의 고정관념이 강한 우리 사회에서는 엄마가 가해자인 경우도 적지 않다. 대체로 가족에게 충실해 보였지만(실제로 충실했지만), 친구가 별로 없고, 사회적으로 고립돼 있거나, 가족 구성원을 독립된 개체로 보기보다 자신의 일부로 여겼던 이들이 위기가 닥치면 자살 심리에 의해 가족몰살을 자행한다고 한다. 심지어 기르던 애완동물이나 자기가 살던 집을 불태우기도 하는데, 자기를 구성하는 모든 것을 없애버리는 심리다.
우리나라는 유독 '가족몰살'의 역사가 깊은 나라다. 그것은 자녀에 대한 부모의 친권의식이 지나치게 강하고 가족 내에서의 부모의 양육방식을 치외법권적 '천륜'으로 치부하는 인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가족을 '운명공동체'라 생각하고 부모는 자녀에게 무한책임 및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가족몰살 가해자의 유서에는 '데려간다'는 표현이 많다. 자기가 책임진다는 뜻이다.
또한 자식을 자기와 분리하지 못하고 자신의 소유물처럼 귀속된 존재로 생각하는 가족주의 탓인지 자녀가 부모를 살해하는 범죄는 '패륜'이라 여겨 가중 처벌하지만, 부모가 자식을 살해한 것에 대해서는 보통의 살인죄로 처벌한다.
최근 비속살해는 연간 40여 건으로 점점 증가하는 추세인데, 사회의 경제적 어려움과도 깊은 연관이 있고 비속살해에 대한 사회의 그릇된 인식에도 역시 책임이 있다. 따라서 비속살해 역시 존속살해처럼 가중 처벌되어야 한다. 자신의 자녀지만 엄연히 독립된 개체이고, 자녀의 안전을 누구보다 더 도모해야 할 부모가 오히려 자녀의 안전권과 생명권을 빼앗았다는 것에 대해서는 더욱 엄한 처벌이 있어야 비속살해를 가벼이 생각하지 않게 될 것이다.
사회공동체의 안전망 잘 작동되는지 돌아봐야
또 함께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은 우리 사회공동체의 안전망을 견고하고 치밀하게 작동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근대 이후 우리 국가는 경제성장만을 목표로 '선 성장, 후 분배'를 지향하면서 사회공동체가 함께 부담해야 할 복지·의료·돌봄·부양의 책임을 오롯이 개인과 가족에게 전가해 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로 개인의 위기 상황 시 부모가 없는 자녀가 정상적인 사회 성원으로 자라기 어려운 사회구조인 것도 분명하다. 경제적 위기와 신변에 문제가 생겼을 때 개인이 회생하도록 도와주는 사회안전망이 작동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절망에 빠진 개인에게는 가장 좌절감을 맛보게 할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부모 외에는 누구도 아이를 돌봐주지 않는다'는 축적된 사회적 경험들은 사회안전망에 대한 불신을 낳고, 이는 결국 절망에 빠져 죽음을 생각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아이들과 함께 죽는 것을 결정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이를 기르는 것은 한 개인의 책임이 아니다. 독일에서는 하다못해 어린아이가 배우로 활동하려 해도 부모뿐 아니라 학교, 지자체, 정부의 동의가 필요하다. 부모가 아이를 위해 항상 가장 좋은 결정을 한다고 보기 어렵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며, 아이의 돌봄에는 부모뿐 아니라 그가 속한 지자체, 학교, 정부의 공동 책임이 있음을 보여주는 예다.
'아이 하나를 키우려면 마을 하나가 필요하다'는 말이 있듯 한 아이의 죽음에는 한 마을, 사회공동체, 나아가 국가에 그 책임이 있다. '모든 아동은 생명에 관한 고유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유엔아동권리협약' 제6조의 조항이나 '자녀의 보호와 교양은 자연적인 권리이자 일차적으로 부모에게 부과되는 의무다. 그의 행사에 관하여는 국가 공동체가 감독한다'는 독일 기본법 제6조 2항의 조항을 다시 한번 되새기게 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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