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공 행진하던 국제유가, 경기침체 공포로 멈췄다
경기침체 공포가 쏜 국제유가 하락
반면 미국과 유럽 국가들을 비롯한 세계 각국은 고유가에 따른 물가 폭등으로 고통을 겪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38개 회원국의 올해 물가상승률 전망치를 지난해 12월 4.4%에서 올해 6월 8.8%로 2배 올렸다.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의 경우 2.7%에서 7.0%로 대폭 높여 잡았다. 5월 미국 소비자물가는 전년 동월보다 8.6% 뛰어 40여 년 만에 최대 상승폭을 기록했고, 유로존은 같은 달 8.1% 올라 1997년 관련 통계 집계 이래 가장 높은 수준을 보였다. 영국은 9.1%로 1982년 이후 최고치를 나타냈다.
많은 전문 기관들은 각국 물가가 앞으로 더 치솟을 것으로 전망했다. 서방의 러시아 제재 조치가 더욱 강화되면 석유 수급에 상당한 문제가 발생해 국제유가가 고공 행진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전망이 다소 흔들리고 있다. 경기침체 우려로 수요가 감소할 것이라는 전망이 커지면서 7월 5일(현지 시간) 미국 서부 텍사스산 원유 8월물 가격이 8.23% 급락한 배럴당 99.50 달러를 기록한 것이다. 또 영국 런던 국제선물거래소에서는 브렌트유가 9.45% 급락한 배럴당 112.77달러로 거래를 마감했다.
당초 유럽연합(EU)은 연말까지 러시아산 석유 수입을 90% 줄일 예정이었다. 미국은 이미 3월부터 러시아산 원유와 가스를 수입하지 않고 있다. 일본과 캐나다 등도 러시아로부터 석유 수입을 단계적으로 중단하거나 금지했다. 현재 러시아는 세계 3위 석유 수출국으로, 전 세계 석유 수출량의 11%를 담당하고 있다. 국제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러시아는 4월부터 하루 평균 1065만 배럴에서 100만 배럴씩 감산해왔는데, 제재 조치에 따라 하반기에는 하루 평균 300만 배럴로 감산 규모가 확대될 수 있다. 따라서 지금까지는 러시아의 석유 공급 감소분을 보충할 수 있느냐에 고유가 지속 여부가 좌우될 것으로 봤다.
美, 사우디 증산 위해 화해 제스처
실제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사우디의 반체제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 암살 사건을 더는 거론하지 않기로 하는 등 무함마드 왕세자에게 화해 제스처를 보냈다. 바이든 대통령은 그동안 카슈끄지 암살 사건 배후로 지목된 무함마드 왕세자를 '살인자' 취급하면서 계속 문제 제기를 해왔다. 이 같은 갈등으로 미국과 사우디의 관계는 최악 상황에 빠졌고, 무함마드 왕세자는 바이든 대통령의 증산 요청을 거부해왔다. 결국 바이든 대통령은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최악의 인플레이션이라는 '발등의 불'을 꺼야 하기에 사우디의 인권 문제를 접어야만 했다. 바이든 대통령이 7월 15~16일 사우디 제다에서 열리는 걸프협력회의(GCC)+3(이집트·이라크·요르단) 정상회의에 참석하기로 한 것도 석유 증산을 요청하려는 의도 때문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사우디 등 'GCC+3'와 '석유 동맹'까지 모색하고 있다.
하지만 사우디를 비롯한 석유수출국기구(OPEC)와 러시아 등 비(非)OPEC 산유국 협의체인 OPEC 플러스(+)는 6월 30일 정례 모임에서 7월과 8월 하루 석유 증산량을 64만8000배럴로 유지하기로 합의했다. 이런 결정은 OPEC+가 6월 2일 합의한 내용을 그대로 반복한 것이며, 하루 64만8000배럴은 전 세계 수요(9557만 배럴)의 0.7%에 불과한 양이다. 그 대신 OPEC+는 8월 3일 회의에서 추가 증산 여부를 결정하기로 했다.
그렇다면 사우디가 대폭 증산에 나서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우디 입장에서는 '비전 2030'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데 천문학적 자금이 필요하기에 고유가가 상당 기간 지속되는 것이 중요하다.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증산에 소극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세계경제가 침체에 빠져들면 석유 수요가 크게 줄어들면서 국제유가도 폭락할 것이 분명하기에 막무가내로 증산을 거부하기도 어렵다. 따라서 사우디도 적정 수준의 증산이 필요하다는 의견이다. 게다가 사우디는 국제사회에서 '스윙 프로듀서'(swing producer: 국제 석유시장에서 자체적인 생산량 조절을 통해 전체 수급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산유국) 지위를 유지하기를 바라고 있다.
‘석유 가격 상한제'는 고유가 촉발 변수
한편에서는 사우디가 대폭 증산할 수 있는 능력이 안 된다는 말도 나온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6월 27일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에서 바이든 대통령을 만나 "사우디와 UAE가 석유 생산을 늘리기 쉽지 않은 상황"이라고 말했다. 마크롱 대통령은 "할리파 빈 자이드 알 나하얀 UAE 대통령이 UAE의 생산 능력이 최대치에 있다고 주장했다"면서 "알 나하얀 대통령이 사우디는 하루 15만 배럴을 증산할 수 있지만, 양국은 향후 6개월간 추가 생산할 여력이 없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사우디와 UAE 등은 그동안 전 세계적인 '탄소중립' 추세에 맞춰 석유 생산 시설에 대한 투자를 대폭 줄여왔다. 이 때문에 증산 여력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글로벌 금융기업 UBS의 지오바니 스타오노보 전략가는 "상당수 OPEC+ 회원국이 이미 산유량 한계에 직면해 있다"고 지적했다.하지만 경기침체라는 새로운 변수로 국제유가가 하락하면서 향후 유가가 어떻게 움직일지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이런 가운데 G7이 정상회의에서 합의한 러시아산 '석유 가격 상한제'라는 초유의 제재 조치가 고유가를 다시 촉발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이 조치는 유가를 안정시키면서도 러시아가 석유 수출로 얻는 이익을 전비로 사용하지 못하도록 막기 위해 러시아산 석유를 일정 가격 이상으로 사들이지 않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러시아가 이 조치에 반발해 석유 생산 및 수출 축소에 나설 경우 유가가 폭등할 수도 있다. 미국 투자은행 JP모건체이스는 "러시아는 현재 재정 상태가 양호해 하루 원유 생산량을 500만 배럴까지 줄일 수 있다"면서 "러시아가 서방 경제에 고통을 주려고 석유 생산과 수출을 줄이는 방식으로 보복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서 JP모건체이스는 "러시아가 하루 공급량을 300만 배럴 줄이면 유가가 배럴당 190달러까지 올라가고, 500만 배럴 감산 때는 배럴당 380달러까지 치솟을 수 있다"고 내다봤다.
이장훈 국제문제 애널리스트 truth21c@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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