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리산 레인저] 교사 되려다 지리산 지킴이가 되다

글·사진 조형구 함양분소장 2022. 7. 8.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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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터목에서 세석 방향, 연하봉 지나 일명 꽁초바위에서 찍은 천왕봉.
지리산에서 자라고, 또 국립공원공단 재직 시 대부분을 지리산에서 보낸 한 레인저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오직 지리산에 대한 사랑과 애정으로 살아온 그의 역정을 돌아보며 눈부시게 고독하며, 아침 햇살처럼 따뜻한 레인저의 삶을 엿본다. -편집자 주
나는 경남 산청군 시천면 서촌부락에서 7남 5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유년시절 덕산의 천평들, 구곡산, 이방산, 서촌, 양당, 사리마을 뒷산에서 땔감을 하고 논에서 벼농사, 밭에서 고구마, 감자 등 부모님 농사일을 도우면서 자랐다.

주말이면 숙제를 해놓고 덕천강에서 창과 족대 등으로 꺽지, 메기, 뱀장어 등을 잡았다. 여름철엔 낚시 방법이 달랐다. 국그릇에 밥풀과 된장을 풀어 넣고, 물고기가 들어가서 먹을 수 있게 구멍을 낸 비닐을 국그릇 위에 덮은 뒤 고무줄로 탱탱하게 묶는다. 강 속에 자갈을 모아 국그릇을 그곳에 놓아두고 다음날 아침 그 장소에 가면 민물고기가 가득 들어 있었다. 이렇게 잡은 물고기를 구이반찬이나 찜으로 부모님께 내어드렸었다.

원랜 남명 조식 선생처럼 교사가 꿈이었다. 회계학을 전공하고 사범대와 교육대학원 졸업 후 중등교사자격을 2개 취득하고, 중학교 임용고시를 준비 중에 있었다.

그러다 우연찮게 국립공원공단 채용공고를 봤다. 그리고 원서를 넣었다. 당시는 임용 준비도 병행하며 경험을 쌓을 생각이었다. 특히 합격하면 ‘내 고향 뒷산을 내가 지킨다’는 자부심을 크게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합격하고, 지리산으로 왔다. 고향 마을에 있던 공원사무소가 왠지 반갑고 찾아가는 그 자체가 많이 설렌다. 이미 그 곳에는 지역 선후배들이 많이 근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합격하고 사전 연락 없이 사무실에 들어가 인사했더니 합격자 명단에 익숙한 내 이름이 있어서 동명이인인 줄 알았다고 했다.

당시 신규 임용교육 일정에 산행이 있었다. 우리 기수는 북한산 종주였다. 산을 안 탄 지 거의 10년이 넘어 체력을 우선 키워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래도 지리산 촌놈이네’ 라는 말을 들어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으로 당장 다음날 지리산을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일단 배낭이 없어서 진주 중앙시장으로 가서 나름 큰 사이즈의 배낭을 단 돈 2만 원 주고 샀다. 당일 산행이라 작은 배낭을 사야 했는데 말이다. 지금 생각해도 웃음이 나오고 어처구니가 없다.
지리산 일출.
뻘쭘하게 간식 얻어먹어
다음날 지리산 천왕봉을 등정하기 위해 덕산 버스정류장 슈퍼에서 간단한 음료와 간식을 구매한 후 시장에서 산 이름 없는 배낭에 수건, 옷가지 등을 넣고 버스에 몸을 실었다. 지금 생각해도 너무 등산에 대해 무지했다. 운동화에 트레이닝복 차림이었고, 등산스틱도 없었다. 참으로 우스운 광경이었다.
덕산서 버스를 타고 중산리 버스정류장에 하차한 후 당시 중산리분소(현 산청분소)까지 걸어갔다. 당시는 국립공원 입장료를 받고 주차료를 받는 때여서 많은 사람들이 매표소 앞에서 입장권을 구입 후 올라갔다.
산을 안 타다 오랜만에 타서 그런지 처음부터 숨이 조금 가빴고 힘이 들었다. 주말이라 많은 사람들이 산행을 해서 심심하지는 않았다. 특히 나보다 나이 드신 어르신, 삼촌, 학생들도 산행하기에 같이 말동무 하면서 칼바위 가기 전 넓은 쉼터까지 동행했다. 그곳에서 10분 정도 쉬며 물과 간식을 먹고 또 산행을 시작해 로타리대피소에 도착했다.
김밥을 먹고 법계사(1,380m)를 둘러보았다. 당시 사찰엔 큰 바위 위에 삼층석탑과 법당, 요사채 정도밖에 없었던 걸로 기억하고 있다. 사찰 규모도 작고 전체적으로 절보다는 그냥 공부하는 암자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다시 산행을 시작해 개선문을 지나 천왕샘에서 물 한 잔 마시고 정상을 향했다. 높은 산을 가 본 적이 거의 없었던 탓에 천왕봉 바로 아래 마지막 600m 가파른 구간에서 진을 뺐다. 한국인의 의지였을까 드디어 어렵게 천왕봉 정상(1,915m)에 올라섰다.
정말 가슴이 두근두근 거렸다. 남한 육지에서 가장 높은 천왕봉에서 멀리 내려다보는 금수강산 자연경관은 정말 천하제일의 절경 그 자체였다.
지리산국립공원 레인저인 필자.
그 옛날 수많은 선조들도 이곳을 다녀갔을 것이다. 조선시대 퇴계 이황과 성리학의 양대산맥인 실천 성리학자 남명 조식 선생이 이렇게 올라와서 나와 같은 느낌을 느끼고 나라의 안녕을 기원하며 후학들을 길러냈겠구나 생각하니 앞으로 내 고향 뒷산 지리산을 잘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이 생겼다.
천왕봉에서 비상식량을 다 소진하고 하산을 서둘렀다. 다리가 풀렸는지 종아리, 무릎이 시큰하게 느껴졌다. 빨리 내려가려 했지만 무리하면 중산리까지 내려가기 힘들까봐 법계사 위 넓은 바위(일명 마당바위)에 앉아서 잠시 쉬고 있었다.
어느새 대학생 일행이 뒤따라 내려와 내 옆에 앉아 간식을 먹는다. 다른 사람이 음식을 먹고 있는 걸 쳐다본다는 것이 뻘쭘해서 괜스레 먼 산 아래를 하염없이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좀 애처로워 보였는지 그 대학생 일행들이 가지고 온 간식을 나에게도 주었다. 괜찮다고 했는데도 한 번 더 먹으라고 내민다. 동생들에게 얻어먹는다는 게 부끄러웠었다. 결국 나는 잘 먹겠다면서 우유와 초코파이를 받고 대화를 나눈 뒤 서둘러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산행하면서 비상식량을 좀 더 준비해서 베풀고 정을 나눠야겠다는 생각을 가졌던 것 같다. 지금도 등산할 때면 비상식량은 넉넉히 준비하고 구급약품도 반드시 챙기는 습관을 가졌다.
법계사 바로 아래에 위치한 로타리대피소 화장실에 갔다 온 후 칼바위까지 곧장 내려와서 잠시 5분 정도 쉬었다. 덕산가는 버스 시간 때문에 곧장 중산리분소에 도착했고 매표소 직원에게 “잘 다녀왔습니다. 수고하세요. 다음에 찾아뵙겠습니다”라고 인사했다. 중산리버스정류장으로 내려와 버스를 타고 덕산서 하차, 당시 덕산에 유일한 동네목욕탕에 들러 온몸의 근육을 푼 후 집으로 돌아와 잠을 청했다. 며칠 후 신규 임용교육을 받으러 서울로 떠났다. (다음호 계속)

월간산 2022년 7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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