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전 공적 기려 王이 내린 시호.. 후손은 "가문의 영광" 극진하게 영접
■박정혜의 옛그림으로 본 사대부의 꿈 - (5) 연시례도
이조판서 지낸 이정영 사망 26년 뒤 시호 ‘孝簡’… 1711년 손자가 서대문 본가서 주인 역할 하며 수락
의금부사 박충원·병조판서 박계현 부자는 200년 지나서야 후손들이 한꺼번에 묘소서 연시례
시호(諡號)는 사후에 국가로부터 바꾸어 받는 이름이다. 학식과 덕망을 갖추고 국가에 공적이 있는 정2품 이상의 실직을 지낸 문무관과 종친이 시호를 받을 수 있는 대상이었다. 시호 두 글자 안에 해당 인물의 평생 공적과 행실을 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함축해서 담아야 했으므로 그 시호의 주인공은 유교 국가가 지향하는 가치를 실천한 인물임을 나라에서 인정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런데 시호가 정해졌다고 해서 바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후손 중에서 한 사람이 대표가 돼(이를 ‘주인’이라고 부른다) 시호를 받아들이는 연시례(延諡禮)를 치러야 공식적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자손으로서 조상의 시호를 받는 은전은 더할 나위 없는 영광으로 여겨져 의례를 마친 다음에는 일가친척과 손님들에게 연시연(延諡宴)을 베풀어 축하하는 자리를 마련하고 때로는 그 모습을 그림으로 남기기도 했다.
연시례의 모습은 이조판서와 판돈녕부사를 지낸 이정영(李正英, 1616∼1686)이 사망한 지 26년 만인 1711년에 ‘효간’(孝簡)이라는 시호를 하사받은 사실을 기념한 ‘효간공이정영연시례도첩’(孝簡公李正英延諡禮圖帖)에서 대표적으로 살필 수 있다. 이경직(李景稷, 1577∼1640)을 부친으로, 이경석(李景奭, 1595∼1671)을 작은아버지로 둔 이정영의 집안은 전주이씨 덕천군파로 왕실의 한 계파이면서 서울에서 대대로 세거하던 경화사족이었다. 이정영 자신은 당대 최고의 전서와 주서의 전문가이기도 해서 그의 글씨는 현재 전하는 여러 비문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정영의 집안사람들은 이경직의 시호가 ‘효민’(孝敏)이었으므로 대를 이어 아들의 시호에 ‘효(孝)’ 자가 들어간 것을 매우 영광스럽게 여겼다고 한다.
이정영의 연시례도 화첩은 교지를 실은 행렬이 행사장으로 가는 모습을 그린 ‘교지지영도’(敎旨祗迎圖), 교지를 선포하는 절차를 그린 ‘교지선독도’(敎旨宣讀圖), 의례 후에 벌어진 연회 장면을 그린 ‘빈주연회도’(賓主宴會圖) 등 시간의 흐름에 따른 주요 장면이 세 폭의 그림으로 꾸며져 있다. ①조정에서 파견된 관리 일행의 도착 ②교지의 선포 ③축하연을 내용으로 하는 그림의 구성은 40여 년 전에 작은아버지 이경석이 1668년 궤장을 하사받은 것을 기념해 만들어진 ‘이경석사궤장례도첩’과 동일하다. 사궤장과 연시 의례의 핵심은 사가에서 교지를 받아들이는 데에 있었으므로 두 행사의 절차가 서로 비슷했던 이유가 가장 컸으며, 이정영의 연시례도 화첩을 기획할 때 집안에 전해지던 사궤장례도 화첩의 형식과 내용을 선행 사례로 당연히 참조했던 결과이다.
시호의 하사가 결정되면 먼저 주인공의 본가에 연시의 가부를 물어보는데 후손이 이를 수락하면 조정에서는 선시관(宣諡官)을 보내 시호 교지를 선포하고 전달하는 역할을 맡겼다. 선시관으로는 주로 이조정랑이 파견됐으며 이정영의 시호 교지를 받들고 온 당시 이조정랑은 임상덕(林象德, 1683∼1719)이었다. 연시를 주관한 자손 대표는 이정영의 손자 이진유(李眞儒, 1669∼1730)였으며, 이진유의 본생가 동생인 이진검(李眞儉, 1671∼1727)이 행사의 실무를 도왔다. 이정영의 아들 이대성(李大成, 1651∼1718)은 당시 61세로 호조참의였는데, 행사에는 참여했으나 연로했기 때문인지 손자가 연시례의 주인 역할을 했다.
의례의 가장 중요한 순서인 교지 선포는 세 폭의 그림 중에서 두 번째 장면인 ‘교지선독도’에서 자세하게 볼 수 있다. 그림의 배경이 되는 연시례 장소는 서대문 밖에 있는 이정영의 본가인데 이 집은 이경석이 궤장을 하사받았던 곳이기도 하다. 멀리 산자락에 성곽 일부가 표현돼 있어 이 장소가 도성 밖임을 시사한다.
대문과 중문을 지나면, 너른 마당에 돗자리를 넓게 깔아 만반의 준비를 마친 행사장이 나타난다. 푸른 단이 달린 흰 차일을 대나무 기둥 위에 걸고 그 아래 병풍과 붉은 칠을 한 탁자를 준비했다. 탁자 위에 모셔 놓은 교지를 선시관이 낭독하고, 자손들은 그 앞에 머리를 조아리며 엎드린 모습이다. 이조정랑이 교지 선독을 마치면 자손들은 네 번 절을 했다. 맨 앞줄의 인물은 연시의 주인인 이진유이며 그 뒷줄의 인물들은 이진검을 포함한 친손과 외손들일 것이다. 탁자 양쪽에 각각 서 있는 인물은 서울에서 이조정랑과 함께 파견된 승문원 정자(正字)와 부정자(副正字)이다.
선시관 일행을 인도해 집으로 들어온 악공 7명이 차일 밖에서 음악을 연주하고 있다. 대문 밖에는 교서를 실었던 용정자(龍亭子), 선시관 일행이 타고 온 말, 손님들이 타고 온 덮개 없는 의자형 탈것인 남여(籃輿)도 여러 채 그려져 있다. 원경과 근경의 산수는 청록산수로 그려진 반면, 몽글몽글 밀려오는 서운(瑞雲)에 반쯤 가려진 화면 왼편의 산수는 조선 전기에 유행했던 수묵 위주의 보수적인 화풍으로 그려져 있어 대조를 이룬다. 사각형의 돗자리로 표시된 행사장은 바로 위에서 내려다보는 조감시로 그려졌지만 차일이나 건물 등 그 밖의 부분은 정면관이나 측면관으로 그려졌다. 이처럼 여러 방향에서 바라본 시점이 한 화면에 섞여 있는 것은 전통적인 기록화 표현의 특징이기도 한데, 합리적인 비례나 통일된 시점보다는 이야기의 내용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것이 더 중요했기 때문에 약간의 불합리한 표현은 감수해야 할 부분이었다.
연시례는 주로 시호 주인공의 본가에서 거행됐지만, 자손이 부임해 있는 지방의 관아에서 치러지기도 하고 주인공의 묘소에서 간단하게 치러지기도 했다. 묘소에서 치러진 연시례는 영조 대에 만들어진 ‘문경공문장공양대연시첩’(文景公文莊公兩代延諡帖)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연시첩은 의금부사를 지낸 박충원(朴忠元, 1507∼1581)과 병조판서를 지낸 박계현(朴啓賢, 1524∼1580) 부자의 시호를 연시했던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박충원은 1758년 ‘문경’(文景)이란 시호를 받고 박계현은 1761년에 ‘문장’(文莊)으로 시호가 결정됐는데 후손들은 1767년(영조 43)에 한꺼번에 연시례를 치렀다.
이 연시첩에서 주목되는 것은 그림이 채색 없이 먹으로만 그려졌으며, 화가는 진경산수화의 대가 정선(鄭敾)의 손자인 정황(鄭榥, 1735∼?)이라는 점이다. 정황의 외증조모가 밀양박씨였으므로 그림에 특기가 있던 정황은 외손 자격으로 연시례에 참여해 그림 제작까지 맡았던 것이다. 이 연시례의 후손 대표는 박충원의 6세손 박성원(朴聖源, 1697∼1767)이었다.
문경공 박충원의 연시 장면을 그린 ‘문경공연시도’를 보면 묘소 앞에 설치된 차일 아래 공손하게 꿇어앉은 박성원에게 이조정랑 이형원(李亨元)이 교지를 전달하고 있다. 그 좌우에는 교하군수 홍계우(洪啓宇, 1694∼1733)와 금천현감 차형도(車亨道)가 집사관으로서 행사의 진행을 돕고, 자손들은 그 주위를 에워싸고 있다. 산소가 경기 고양군에 있었으므로 교하군수와 금천현감 외에도 행사를 돕기 위해 인근의 수령들이 참석했다. 화면에는 인물 옆에 이름과 역할이 쓰여 있어서 내용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묘소 옆에는 유난히 크게 우뚝 솟은 모양으로 그려진 문경공의 신도비도 보인다.
문장공 박계현의 산소는 부친 박충원의 산소 아래쪽에 있다. ‘문장공연시도’에는 두 묘역이 한 화면에 들어오도록 좀 더 먼 시점에서 연시례를 내려다보았다. 화면에 쓰인 글씨에 의하면 선시관과 집사관은 같았지만 후손 대표는 7세손 박천환(朴天煥)이 맡았음을 알 수 있다.
미점(米點)으로 질감을 처리한 산, 가로로 긴 먹점을 규칙적으로 겹쳐 형태를 잡은 상록수, 줄기의 가운데를 희게 남긴 나무 등 산수 묘사는 정선의 진경산수 화풍과 많이 닮았다. 이 그림만 보아도 정선의 산수화풍을 가장 충실히 계승한 화가 중의 한 사람은 바로 그의 손자였음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짧은 시간 안에 빠른 붓놀림으로 현장의 인상을 담아낸 스케치 같은 그림이지만, 부족한 내용은 글씨로 보완해 전달력을 높였다. 앞서 ‘효간공이정영연시례도첩’처럼 정형화된 방식을 따르는 화원이 그렸다면 이와 같은 자유로운 표현이나 개성적인 분위기 표출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미술사학자·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 시호 제정 절차
시호가 결정되기까지는 여러 단계의 엄격한 과정을 거쳤다. 시호를 받을 자격이 되는 인물이 사망하면 집안에서는 시장(諡狀)을 만들어 예조에 접수했다. 예조로부터 시장을 받은 봉상시(奉常寺)에서는 홍문관 관원들과 합좌해 시호의 삼망(三望)을 정했다. 이 삼망은 다시 예조, 이조, 의정부를 거쳐 왕에게 올려졌고, 왕은 이 중에서 하나에 낙점했는데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그 적합성 여부를 심의하는 서경(暑經) 과정을 거쳐야만 시호가 최종 확정됐다. 이처럼 공정함을 기하기 위해 여러 관청이 공조했지만, 관청 간에 협조가 잘 이루어지지 않으면 시호 신청에서 결정까지 수십 년이 걸리기도 했다.
또 후손들은 연시례에 드는 비용을 감당할 수 있어야 했고, 후손 대표는 관복을 입고 연시에 임해야 했으며, 하급직이라도 실직에 있는 인물이어야 했으므로 시호 결정에서 연시까지도 적지 않은 시간이 소요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러니 시호를 받는 건 절대 쉽지만은 않은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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