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이 부추긴 '여혐', 교실에 스미다[헤드라인 속의 'OO녀']
20년째 한국여성민우회 미디어교육 강사로 일선 학교에서 강의를 하는 김현회(52)는 “요즘만큼 수업 진행이 어려운 적도 없었다”고 했다. 무엇이 성차별인지, 왜 여성혐오인지 툭 물으면 콕 짚는 베테랑 강사지만 요즘 자주 말문이 막힌다. 바로 ‘골칫거리 질문’ 때문이다. 이 질문은 궁금해서 하는 질문이 아니다. “선생님 페미니스트에요?”
청소년 인권단체에서 활동하는 고등학생 민서연(16)과 레빗(별명·17)의 사정은 비슷하지만 좀 더 복잡하다. 언론에 등장하는 여성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앞으로도 별로 달라질 게 없을 것 같지만 학교에서는 답을 구하기도, 의문을 품기도 어렵다. 여성으로 갖는 의문인데도 청소년이라 무시된 적도 있다. 어떤 어른들은 “예전엔 더했어”라 훈계하고, 어떤 이들은 외면하거나 답을 피한다. 방조와 외면이 익숙해진 학교 현장에서 질문은 대상이 바뀔 뿐, 보다 날선 형태로 되풀이 된다. “너 페미야?”
“진짜 페미니스트냐고 묻는 게 아니잖아요. ‘만약 네가 정말 페미니스트라면 사회적으로 매장하겠다’는 뜻이니까. 뭐가 나아졌다는 건지 모르겠어요.” 강단에 서는 김현회 강사의 감정이 ‘당혹’이라면, 교실에 머무는 민서연의 감정은 ‘두려움’이다. 당혹이든 두려움이든 말문이 막히는 건 김 강사, 레빗, 민서연이 똑같다. 어려워서가 아니라 그 의도를 알아서다.
경향신문은 과거와 현재, 미래의 독자인 이 세 사람을 만나 언론이 여성을 다룰 때 반복돼온 문제점과 독자로서 느끼는 감정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 ‘언론이 묘사하는 여성’의 문제에서 시작한 대화는 자연스럽게 ‘나와 내 주변 여성’의 문제, 학교 현장에 팽배한 성대결 분위기로 이어졌다. 언론 헤드라인에 담긴 여성의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달라지지 않았고, 성차별적 표현도 남아있다. ‘너 페미야?’라는 폭력이 언론에서는 ‘젠더 갈등’으로 명명되기도 한다. 노골적인 비하나 차별적 표현은 줄었지만 어떤 차별들은 교묘해졌고 공고해졌다.
10대 청소년 참가자들은 언론에서 포장한 ‘젠더 갈등’을 보다 생생한 형태의 ‘여성 혐오’로 학교 현장에서, 온라인 공론장에서 겪고 있었다. 민서연은 “여성이 등장하는 기사에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는 건 옳지 않다’는 댓글을 달려 해도 ‘너 페미지’ 같은 공격이 이어진다”며 “이런 이야기마저 ‘페미라서 여성혐오를 문제 삼는다’ ‘어린 것들이 꼭 저러더라’고 받아들이는 이들이 많았다”고 했다. 레빗도 “남녀공학인 중학교에서 ‘페미’는 그냥 욕이었다. 문제를 지적하거나 불편한 상황을 만든 사람의 입을 닫게 하고 싶을 때 하는 욕”이라고 했다.
성평등 미디어 교육을 하는 김 강사도 공감했다. “강의를 못할 정도의 백래시(반발)” 때문이다. 대놓고 엎드려 자거나, 책상을 두드리곤 안 그런 척 하는 등. 담임 교사도 통제하지 못하는 혐오를 접하고, 여성가족부를 없애겠다는 공약 등을 볼 때면 사회 전반으로 퍼진 ‘여성들은 실력도 없으면서 요구만 많다’는 분위기를 떠올린다.
김 강사는 ‘여경 무능론’처럼 온라인상에서 확산된 여성혐오를 언론이 무분별하게 확대 재생산하는 게 가장 큰 문제라 짚었다. 혐오를 마치 ‘대등한 쌍방의 갈등’인 것처럼 포장한다는 것이다. 그는 “젠더갈등이라는 용어는 문제의 구조를 파악하고 실체를 드러내는 데 목적이 있는 게 아니라 그냥 싸움을 붙이는 용어”라며 “언론은 ‘부주의하고 무능하고 실수가 잦다’는 이미지가 여성에게 붙는 게 마치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서’인 것처럼 다뤄왔다”고 말했다.
언론 헤드라인에서 가장 빈번한 성차별은 여전히 ‘성적 대상화’다. “○○○, 다섯째 임신한 몸매 맞아? 물에 흠뻑 젖은 사진 보니(2022년)” “가슴 축소 수술하고 女테니스 세계 1위 오른 ○○○(2017년)” “○○○, 풀파티서 아찔한 비키니 몸매 ‘우윳빛 피부’(2019년)” 등의 기사를 본 10대 독자들은 “여성은 누구인지 지워지고 외모, 나이, 몸매만 남는 것 같다”고 했다. 레빗씨는 “포털 메인을 보면 모두 영향력 있는 기성세대 남성들의 얘기 뿐”이라며 “그나마 보이는 건 여성의 외모나 몸매, 연애 레퍼토리 뿐이라 굳이 기사를 봐야하나 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범죄나 사건·사고에 등장하는 여성의 모습도 10대, 50대 독자가 입모아 비판한 지점이다. ‘술 취해’ ‘멋 모르는’ ‘중위권 성적의’ 같은 가해자의 서사를 담은 표현들과 ‘몹쓸짓’ ‘일탈’ ‘노렸다’ 등 범죄의 위중함을 흐릿하게 만드는 단어가 여전한 문제로 지목됐다. 레빗은 “성추행이나 스토킹 같은 여성 대상 범죄에서 유독 몹쓸짓, 노렸다는 표현이 많은데 너무 ‘가벼운 말’로 뭉뚱그린다는 느낌”이라고 했다. 김 강사는 “강도나 살인을 두고 몹쓸짓이라고 표현하는 기사는 없다. 성범죄를 가볍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고 말했다.
문제는 여전한 데 문제 제기는 더 어려워졌다는 게 공통된 고민이었다. 10대 참가자들은 학교 내 여성혐오가 점점 커지고, 그 폭력에 맞서주는 어른이 없다고 느꼈다. 50대 참가자는 정치마저 성대결을 부추기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페미니즘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학생들이 많아졌고 수업에 점점 어려움을 겪고 있다. ‘갈등의 원인은 페미니즘이고 여성’이라는 주장이 ‘젠더갈등’으로 포장돼 힘을 얻으면서 ‘성차별’을 입 밖으로 꺼내려면 용기가 필요해졌다. “페미니즘은 여성혐오와 싸우는 것이지 남성과 싸우는 게 아닌데 언젠가부터 페미니즘 때문에, 페미니스트가 있어서 문제가 생기는 것이 됐다.” 레빗의 말이다.
이들은 인터뷰가 부담스럽다고 했다. 여성혐오에 대해 말하는 것이 어떤 반응을 얻을지, 어떤 댓글이 달릴 지 예상되는 탓이다. “저희가 특정 성별과 연령대를 대표한다고 쓰지 말아달라”고 신신당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소리를 낸 것은 현실의 문제와 무관치 않기 때문이다. 민서연이 말했다. “기사는 어린이, 청소년, 여성 모두가 봐야하는 거잖아요. 일상에서 마주하는 혐오 표현을 적어도 기사에서는 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30년 전인 1992년 6월 경향신문은 <여성 골퍼 급증 “사치경쟁”>이라는 기사에서 골프 치는 여성이 늘어나는 현상을 문제 삼았다. 이를 두고 한 독자는 “골프는 개인의 자유이고 그것은 남성이건 여성이건 똑같다. 여성에 대해 편파적으로 보도하는 신문사에 분노를 느낀다”는 반론을 기고했다. 1991년 조선일보에서는 ‘성차별 폐지’ 논쟁이 벌어졌다. 어떤 독자는 “맞벌이 부부 자녀들은 탈선 비율이 높다. 여성들이 많이 진출한 교육계에서 편협한 사고를 청소년들에게 심고 있다”며 ‘여성의 사회 진출’을 비판했다. 아들을 낳지 못했다는 이유로 세상을 등진 여성의 사연을 두고 ‘아들을 더 원하는 건 여성’이라는 주장과 ‘남성우월주의가 저지른 간접살인’이라는 주장이 지면에서 충돌하기도 했다.
30년 후인 2022년 골프 치는 여성을 문제 삼거나 여성의 사회 진출을 막아야 한다는 주장은 발붙일 데가 없어졌다. 남아선호사상도 옛말이다. 성평등을 지향해야한다는 사회적 합의와 이를 뒷받침한 제도, 시민들의 인식 변화가 맞물린 결과다. 언론에서도 더디나마 작은 변화들이 있었다. 여성가족부 ‘성폭력 사건 보도수첩’, 법무부 ‘간행물 성폭력·성희롱 가이드라인’, 국가인권위 ‘성폭력 범죄 보도 세부 권고 기준’ 등 공적 영역에서 기준이 정립됐다. ‘미투 운동’ 이후 언론 자체의 반성과 자정 노력도 있었다. 노골적인 비하나 차별적 표현, 자극적 보도가 줄어드는 경향도 확인된다.
김 강사는 10대 참가자들에게 “미안하고 고맙다”면서도 “희망을 본다”고 했다. 그는 “수많은 사람들이 목소리를 내 왔지만 ‘정말 바꿔야 한다’에까지 이르렀는진 아직 모르겠다”며 “지금 10대들이 잘 자리 잡아 건강한 목소리를 내줬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했다. 김 강사는 청소년 참가자들에게 “여성스러움을 더 이상 강요하지 않는 것처럼 남성스러움도 강요하지 않는 사회까지 같이 고민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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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드라인 속의 ‘OO녀’] 취재팀
다이브(Dive) 조형국 ·이수민 기자, 플랫(flat) 이아름 기자, 디지털뉴스편집팀 신지혜 기자
조형국 기자 situation@kyunghyang.com, 이수민 기자 watermin@kyunghyang.com, 신지혜 기자 sjh321@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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