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한국미술 '핫스팟'은 여기..'변방' 울산시립미술관의 반란
백남준 '시스틴 채플' 등 전시
서진석 관장 탁월한 기획역량
서울 작가·기획자 관람 줄이어
개관 6개월 만에 12만명 발길
국립현대미술관도, 삼성미술관 리움도 아니다. 올여름 한국 현대미술판에서 가장 뜨거운 현장으로 많은 미술인들이 지목한 곳은 바로 울산시립미술관이다.
대안공간 기획자 출신의 서진석 관장이 운영하는 이곳은 지난 1월 문을 연 이래 여섯달 만에 12만 관객이 다녀갔다. 외지인 관객 비중이 3분의 1에 육박한다. 개막 당시 서 관장은 변두리 대왕암 폐교에 백남준의 걸작 <거북이>를 비롯한 국내외 미디어아트 대가들의 수작을 망라한 기획전을 열었다. 본관에는 국내 최초 미디어아트 전용관도 설치했다. 파격적인 기획으로 대박을 터뜨린 데 이어, 올여름 다시 흥행몰이를 하고 있다. 백남준, 정연두, 나라 요시토모, 쑹둥 등 한국과 중국, 일본 대가들의 작품을 모은 대형 기획전들 덕이다.
지하 1층 미디어아트 전용공간 엑스아르 랩(XR LAB)에서 지난 4월 말부터 선보인 정연두 작가의 실감형 동영상 작업 <오감도>는 한국 미디어아트 역사에 회자될 기념비적 작업이다. 20대 넘는 비디오투사기(프로젝션)를 배치해 사면 벽과 바닥에 영상을 비춘다. 여러대의 드론을 동원해 찍은 울산 도시 공간, 10만마리 넘는 까마귀가 군무를 벌이는 군락지로 유명한 태화강 상공과 십리대숲, 도시 골목에서 처용 가면을 쓰고 버스킹하는 외국 출신 인디 가수 등을 담아 합성한 영상 작업이다. 태화강 상공을 후춧가루 뿌린 것처럼 뒤덮은 까마귀의 눈길로 노동자와 오토바이들이 물밀듯 밀어닥치는 공업도시 울산의 도심부를 포착했다가, 기괴한 처용 가면을 쓰고 울산 시장 골목 한가운데서 인생의 숨은 맛과 고뇌를 노래하는 아웃사이더 노래꾼의 모습이 찬란한 울산 수평선의 물비늘과 연속적으로 어우러지는 풍경 속에서 관객들은 찬탄하고 깊은 사색에 잠긴다.
그간 증강현실 미디어아트 작업은 서울 삼성동 코엑스 등에서 선보인 디스트릭트 그룹의 파도 이미지 같은 테크놀로지 중심의 스펙터클한 볼거리 중심이었다. 반면 정연두가 내놓은 <오감도>의 몰입형 미디어아트는 울산의 역사와 도시, 자연 경관을 바라보는 주관적 감수성과 인식을 녹여 넣은 콘텐츠 중심의 인문적 작업이란 점에서 선구적인 성취를 이뤘다고 할 수 있다. 31일까지.
지하 2층 2전시실에서도 놀라운 전시를 만날 수 있다. 백남준의 1993년 베네치아비엔날레 황금사자상 수상작 <시스틴 채플>을 지난해 자체 컬렉션으로 사들인 뒤 공개 전시 중이다. 생전 친구 보이스의 퍼포먼스, 성조기를 배경으로 한 미국 배우의 포르노그래피, 군복을 입고 포복하는 백남준, 동료 샬럿 무어먼의 첼로 연주 영상과 몽골의 도살 장면, 한국의 북춤 등이 어지러이 명멸하며 다양한 사운드와 함께 총체적인 영상 잔치를 펼쳐놓는다. 2019년 영국 테이트모던 회고전 전시보다 훨씬 더 넓고 돋보이는 공간 연출로 작품의 묘미를 살렸다. 한국 미술계와 심각한 불화를 빚고 있는, 백남준의 유족 켄 백 하쿠타가 기꺼이 소장품을 내놓고 축하 영상을 보내면서 화해 메시지를 보냈다는 점도 의미심장한 대목이다. 17일까지.
지하 2층 1전시실에서 선보이고 있는 ‘예술 평화: 0시의 현재’전은 나라 요시토모, 침폼그룹, 쉬빙, 쑹둥 등 동아시아 3국 현대미술 대가들의 평화와 연대를 위한 분투와 노력을 소개한다. 9·11 테러 현장에서 수거한 먼지를 깔고 그 위에 선불교 문구를 적은 중국 대가 쉬빙의 새 작업, 괴팍한 소녀상 연작으로 세계적 명성을 얻다 최근 동료 작가들과 해변에 밀려온 폐부유물을 모아 예술품으로 재생하고 있는 나라 요시토모의 근작들, 철거 직전의 중국 살림집 집기들을 모아 거대 설치공간으로 재생시킨 쑹둥의 미술관 기증 작품 등 현재진행형의 대가들 작품을 한눈에 볼 수 있다. 9월18일까지.
세계 현대미술의 최전선, 그것도 디지털시대 미디어아트의 새로운 모색을 보여주는 작업들이 미술 변방 도시였던 울산에 펼쳐지면서 미술계 전문가는 물론 컬렉터들도 모여들고 있다. 올해 관객이 30만명을 넘어설 거라는 예측이 나오는가 하면, 서울의 주요 작가와 기획자들이 울산에서 부산까지 1박2일 아트 투어 일정을 짜는 게 유행이 됐을 정도다. 국내 미술계 소장 기획자들 가운데 가장 방대한 국외 미술계 인맥을 지닌 것으로 알려진 서진석 관장의 기획 역량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는 게 중평이다.
개관 1년도 안 돼 한국 현대미술의 중심 공간을 만들고, 후속 전시들도 규모와 의미 등에서 다른 전시를 압도하는 콘텐츠를 내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울산시립미술관의 약진은 올해 미술계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사건 중 하나가 될 것으로 보인다. 미술평론가이자 기획자인 유진상 계원예술대 교수는 “미술관 쪽이 꾸준히 연간 단위 예산에 구애받지 않는 자체 적립기금을 조성해 국내외 대표적인 작가들과 계속 커미션 워크(협업 과정) 형식의 신작들을 양산하는 방식의 운영 틀을 설정한 것은 한국적 현실에서 매우 시의적절한 컬렉션 운영 시스템”이라며 “앞으로의 전시가 더욱 기대된다”고 말했다.
울산/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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