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 타다 실종된 대학생.. 의문의 사진만 남았다 [세계의 콜드케이스]
미국 뉴멕시코 '태라 캘리코' 실종사건
편집자주
‘콜드케이스(cold case)’는 오랜 시간 미해결 상태로 남아 있는 범죄사건을 뜻하는 말로, 동명의 미국 드라마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한국일보>는 격주 금요일 세계 각국의 미제사건과 진실을 쫓는 사람들의 노력을 소개합니다.
1988년 9월 20일 오전 9시. 미국 뉴멕시코주(州) 발렌시아 카운티에 사는 패티 도엘은 자전거를 타러 가겠다는 대학생 딸 태라(당시 19세)와 실랑이를 했다. 그 무렵 패티는 누군가 모녀를 쫓아다니는 것 같아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패티는 "호신용 스프레이를 들고 가라"고 했지만 태라는 듣지 않았다.
"오후에 남자친구와 테니스를 치러 갈 거니까 늦으면 데리러 와주세요." 그렇게 말하고 집을 나선 태라는 정오가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패티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은 집 근처 자전거 도로에서 태라의 소니 워크맨 부품과 카세트테이프를 발견했다. 누군가 태라의 자전거 방향을 급하게 틀면서 남긴 흔적도 찾아냈다. 이후 30년 넘도록 태라를 본 사람은 없었다.
"태라가 자전거를 타고 있었고, 밝은 색 픽업 트럭이 그 뒤를 따라가는 걸 봤다." 목격자 진술은 태라의 납치·사망설에 불을 붙였다. 발렌시아 카운티는 강력 사건이 자주 발생하는 곳으로 악명 높았다. 인구가 적어 범죄가 좀처럼 적발되지 않는 데다, 마약 거래가 빈번했다. 수백 명의 육군과 경찰 보안관, 헬리콥터 부대 등이 동원돼 지역을 샅샅이 수색했지만, 태라의 흔적은 없었다. 사건은 미궁으로 빠졌다.
실종 1년 뒤, 태라로 추정되는 사진이 발견됐다
사건은 1년 뒤 폴라로이드 사진 한 장이 발견되며 전환점을 맞았다. 젊은 여성 1명과 그보다 어린 소년이 결박된 채 카메라를 응시하는 모습을 담은 사진이 플로리다주(州) 포트세인트조의 편의점 주차장에 떨어져 있었다. 1989년 6월 12일이었다. 납치된 것처럼 보이는 둘의 입엔 검정 테이프가 붙어 있었다. "사진이 놓였던 자리에 흰색 도요타 차량이 주차돼 있었다"는 목격자 증언이 나왔지만, 경찰은 운전자를 붙잡는 데 실패했다.
사진 속 여성은 태라가 맞을까. 아이는 누구일까. 두 가지가 밝혀져야 사진이 결정적 단서가 될 테였다. 태라의 가족은 태라가 맞다고 확신했다. 태라는 다리에 교통사고로 생긴 흉터가 있었는데, 사진 속 여성도 같은 위치에 흉터가 있었다. 소년에 대해서도 곧바로 제보가 들어왔다. 마이클 헨리(9)의 부모가 자신들의 아들인 것 같다고 신고한 것이다. 마이클은 1988년 4월 뉴멕시코 주니산에 아빠와 여행을 갔다가 행방불명됐다.
그러나 수사는 진전되지 못했다. 미 연방수사국(FBI)을 비롯한 여러 기관들이 사진 판별을 시도했지만 사진 속 여성이 확실하다는 결론을 내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의 의견도 갈렸다. 유일한 단서는 사진 촬영에 쓰인 필름이 1989년 5월부터 판매된 제품이라는 것으로, 사진이 그 이후에 찍혔음을 가리켰다.
그로부터 다시 1년 뒤인 1990년. 마이클의 유해가 실종 장소에서 11km 떨어진 곳에서 발견됐다. 경찰은 마이클이 길을 잃고 헤매다 사망한 것으로 결론 내리고 마이클 실종 사건을 종결했다.
태라의 행방은 여전히 묘연했다. 태라로 추정되는 여성의 모습이 찍힌 폴라로이드 사진이 이후로도 계속 나왔다. 추가로 유출된 사진은 두 장이었다.
우선 1989년 6월 캘리포니아 몬테시토에서 발견된 사진. 같은 달 플로리다에서 발견된 사진과 마찬가지로 여성의 입이 테이프로 봉해져 있었다. 사진 배경에 하늘색 천이 걸려 있었는데, 플로리다 사진 속 담요와 비슷해 보였다. 패티는 사진 속 여성이 자신의 딸이 맞다고 주장했다.
두 번째 사진은 1990년 2월 발견된 것으로, 기차 안에서 찍힌 것으로 추정됐다.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짓는 남자 옆에 한 여성이 큰 선글라스를 쓰고 입에 재갈을 문 채 묶여 있었다. 경찰은 "남녀가 장난을 치는 사진으로, 태라 사건과 무관하다"고 판정했다.
제보는 넘쳤지만... 확실한 증거는 없었다
태라가 실종된 지 20년이 지난 2008년, 사건은 다시 한번 주목을 받았다. 1996년부터 12년간 태라의 사건을 담당한 발렌시아 카운티의 보안관 르네 리베라의 지역언론과 인터뷰가 불을 댕겼다. 그는 태라가 살해당했다는 제보를 받았다고 했다.
르네가 두 명의 정보원을 인용해 공개한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남성 청소년 두 명이 포드 픽업트럭을 타고 태라에게 접근했다. 그들은 태라에게 말을 걸기 위해 접근하다 실수로 태라를 차로 쳤다. 태라가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하자 겁에 질려 살해했다. 둘의 부모가 사건 은폐를 도왔다."
경찰은 르네의 증언을 토대로 수사를 재개했지만, 소득은 없었다. 태라의 가족은 "이런 이야기를 공개하기 전에 충분한 증거부터 모았어야 한다"며 분개했다.
2013년 태라의 실종 사건을 재수사하기 위한 태스크포스(TF)가 구성됐다. 발렌시아 카운티 보안관 출신인 프랭크 메톨라는 "헨리 브라운이라는 남성이 죽기 전 나를 불러 고백한 내용"이라며 새로운 증언을 공개했다.
"헨리는 태라가 실종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로런스 로메로 주니어라는 남성의 자택 지하실에서 파란색 방수포에 싸인 여성의 시체를 봤다. 헨리가 들은 바에 따르면 태라를 알고 있었던 로런스와 다른 남성 3명은 태라를 트럭으로 일부러 친 뒤 납치해 성폭행했다. 태라가 이들을 모두 감옥에 보내버리겠다고 하자 로런스는 태라를 칼로 찔러 살해했다. 시체를 지하실에 숨겼고 이후 인근 연못에 버렸다. 헨리는 '신고하면 죽이겠다'는 로런스 일행의 협박 때문에 입을 닫았다."
로런스의 아버지 로런스 로메로는 태라가 실종됐을 당시 발렌시아 카운티의 보안국장이었다. 그는 실종 8년 만인 1996년 지역언론과 인터뷰에서 "실종 사건 수사를 위해 모든 방법을 다 썼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로런스의 범행을 경찰 고위 간부인 아버지가 숨겨 줬다는 루머가 번지고 프랭크도 같은 주장을 했지만 진상 규명을 할 순 없었다. 로메로 부자가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기 때문이다.
사건 발생 35년째, 가족들은 태라를 기다린다
패티는 포기하지 않았다. 2006년 세상을 뜨기 직전까지 딸을 찾아 헤맸다.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여성을 전부 "태라"라고 불렀다. "뉴멕시코대학교에 다니며 운동도, 공부도 잘하던 태라는 독립적이고 자랑스러운 딸이었다." 언론과 인터뷰를 할 때마다 딸을 그리워했다. 태라의 가족은 전국에 20만 장이 넘는 전단을 뿌리고, 뉴스와 유명 방송에 출연해 제보를 호소했다. 수사에 진척이 없자 심령술사까지 고용했다. 1996년엔 한 심령술사가 '뉴멕시코주 로스웰에 있는 농장에 태라가 있다'고 말해 일대 농장을 수색했지만, 헛수고였다.
태라인 듯, 아닌 듯한 여성이 찍힌 사진이 자꾸 발견되는 건 가족을 지치게 했다. 진짜 태라가 담긴 사진은 결국 한 장도 없었다. 끔찍한 폭력을 당한 여성의 모습이 찍힌 사진이 많다는 것도 문제였다. 태라의 오빠 크리스는 미국 피플지와 인터뷰에서 "어머니는 그 사진들을 차마 보지 않을 수 없어서 매번 확인은 했지만, 사진들이 그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놨다"고 했다. 또 "여동생의 실종과 지지부진한 수사가 어머니의 수명을 단축시킨거나 마찬가지"라고 했다.
2018년 수사에 드디어 빛이 드는 듯했다. FBI와 지역 보안 당국은 태라의 실종과 관련해 최소 두 명 이상의 용의자를 조사 중이라고 밝혔지만, 체포·기소로 이어지진 않았다. FBI는 2019년 태라의 실종과 관련한 제보에 최대 2만 달러(약 2,600만 원)의 사례금을 걸으나 역시 허사였다.
태라의 가족은 직접 수사에 나섰다. 태라의 언니 마이클과 고등학교 친구 멀린다 에스키벨은 지금도 자체 수사한 내용을 소개하는 팟캐스트를 진행 중이다. 마이클은 2018년 피플지와의 인터뷰에서 "태라가 어디 있는지라도 알고 싶다"며 "누군가가 대가를 치렀으면 좋겠다. 용의자들이 살아있는지 죽었는지 모르지만, 최소한 이런 사건을 저질렀다는 걸 확실히 인정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흔적조차 없이 사라진 태라를 가족과 친구들은 여전히 기다리고 있다.
장수현 기자 jangsu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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