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매 중단도 억울한데, 암호문 같은 펀드 안내문에 분통"
나이 든 피해자들 해독 불가능
'원금 받을 수 있나' 어디에도 없어
‘본건 펀드의 기초 자산은 싱가포르 소재 AGPI Fund 4, 5, 6입니다. 기초 자산을 운용하는 OO는 조달된 자금으로 싱가포르 소재 법인 PG가 발행하는 CB를 취득했으며….’
2018년 독일 헤리티지 펀드에 투자했다가 환매 중단 사태로 5억원을 날린 60대 A씨는 지난달 펀드를 판 증권사로부터 이 같은 내용의 ‘고객 안내문’을 우편으로 받고 “분통이 터졌다”고 했다. A씨는 “완전 암호 수준으로 쓰여 있어 해독이 안 된다”며 “정작 궁금한 것은 도대체 돈을 언제, 얼마나 돌려받을 수 있는지 여부인데, 그런 내용은 쏙 빼고 도무지 알 수 없는 소리만 잔뜩 적어 보낸다”고 했다.
큰 손실이 발생해 고객 돈을 돌려주지 못하게 된 사모펀드를판 은행과 증권사들이 주기적으로 투자자들에게 보내는 ‘고객 안내문’이 피해자들을 두 번 울리고 있다. 웬만한 금융 지식이 있는 사람도 알기 힘든 전문 용어를 그대로 옮겨놓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원성이 터져나온다. 사모펀드 피해자 중에는 목돈을 투자한 60대 이상 고령자가 많은데 이들에 대한 배려가 턱없이 부족한 것이다.
◇“나라 망하지 않는 한 손실 없다”며 팔았는데 원금 거의 날려
헤리티지 펀드 피해자 홍모(69)씨는 “안내문 내용도 어렵지만, 마치 판매사인 자신들은 아무 책임이 없다는 듯 ‘유체이탈 화법’을 쓰는 것도 얄밉다”며 “금융 당국에 꼬투리 잡히지 않으려고 면피성으로 보내는 서류 같아 불쾌하다”고 했다. 판매사가 고객 보호 노력을 다했다는 흔적을 남기기 위해 무성의하게 보내는 서류로 느껴진다는 것이다. 디스커버리 펀드에 8억원을 투자했다는 대구의 사업가 김모(79)씨는 “안내문을 읽으면 혈압이 올라서 아예 모든 서류는 변호사가 받아보게 하고 있다”고 했다.
사모펀드 피해자들은 애초 펀드에 가입할 때부터 상세한 상품 설명을 듣지 못했다고 입을 모았다. 미국 디스커버리펀드나 이탈리아 헬스케어 펀드, 독일 헤리티지 펀드와 같은 역외 펀드의 경우 담당 직원들이 “해당 국가가 망하지 않는 한 원금이 손실 날 일이 없다”는 똑같은 레퍼토리로 안정성을 부각했다는 것이다.
이의환 전국사모펀드피해자 공동대책위 집행위원장은 “가입 시 투자 제안서나 상품 설명서(요약본)를 받았다는 피해자가 드물고 대부분 구두 설명만 듣고선 ‘내용을 제대로 이해했다’는 칸에 기계적으로 서명했다고 한다”며 “변호사도 의사도 다 당했다”고 했다. 사모펀드는 1억원 이상의 투자금이 들어가는 고위험 상품인데도 상품 설명이 지나치게 허술하게 이뤄졌다는 것이다. 디스커버리 펀드 피해자 신모(65)씨는 “가입 서류에 적힌 운용사와 수탁사, 시행사가 어떻게 다른지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다가 환매 중단 사태 이후 피해자들끼리 조사하면서 알게 됐다”고 했다. 펀드 피해자들은 가입 당시 충실한 설명을 듣지 못했다는 점 등을 근거로 ‘불완전 판매’, 더 나아가 ‘착오에 의한 계약 취소’라며 100% 원금배상을 요구하고 있다.
◇암호투성이 안내문, 쉽게 설명해줘야
라임과 옵티머스 등 대규모 사모펀드 환매 중단 사태 이후 금융 당국은 재발 방지를 위한 제도 개선에 나서고 있다. 당국은 작년 10월부터 판매사의 설명 의무를 대폭 강화했다. 사모펀드를 팔 때 핵심 상품 설명서를 제공하고, 설명서에는 펀드의 위험요인과 환매 관련 사항 등을 반드시 기재하도록 한 것이다. 7일에는 금융회사들이 전문성을 갖추지 않은 일반 금융 소비자들에게 방문·전화 방식으로 장외 파생 상품과 사모펀드 등 고위험 상품을 권유하지 못하도록 하는 내용의 ‘금융소비자보호법 시행령 및 감독규정’을 금융위원회가 입법 예고했다.
개선책의 취지는 투자 위험과 관련한 내용을 소비자에게 빠짐없이 알리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다. 전지예 금융정의연대 사무국장은 “어려운 업계 용어로 설명을 해도 일반 소비자는 이해하기 어렵다”며 “심지어 사모펀드를 판매하는 PB(자산관리가)들도 상품 내용에 대해 잘 모르는 경우가 있다”고 했다. 헤리티지 펀드 피해자 임모(63)씨는 “투자 성향 조사에서 공격형, 적극형으로 분류된 투자자도 사모펀드에 대해 모르는 내용이 많다”며 “어려운 용어를 투자자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풀어서 설명해주는 게 필요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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