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맑실 칼럼] 책은 누가 만드는가

한겨레 2022. 7. 7.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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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맑실 칼럼]책이 빵처럼 구워지듯 책 속 메시지는 발효될수록 오래간다. 잘 발효된 메시지를 만들어내는 저자는 최초의 창조자다. 그 메시지를 어떤 모양새로 담아낼 것인가, 독자에게 어떻게 알리고 다가갈 것인가를 고민하는 건 출판사의 몫이다. 하지만 물성으로서의 책을 갓 구운 빵처럼 맛있게 만들어주는 건 출력소, 인쇄소, 제책소와 같은 제작처들이다. 장인정신으로 무장한 이들이 출판사와 함께 움직이지 않으면 책은 완성되지 않는다.

강맑실

‘코란도 아줌마’로 불리던 시절이 있었다. 편집장을 하던 때니까 시대는 1990년대다. 그때는 지금처럼 택배니 퀵이니 하는 서비스가 없었다. 시간을 다투는 책들은 출판사 담당자가 직접 제작처를 뛰어다니며 제작물이 완성되자마자 가장 빠른 운송수단을 이용해 최종 제작처인 제책소로 옮겨야 했다. 표지는 필름 출력소에서 필름 내용을 확인하자마자 차에 싣고 인쇄소로 달려가, 인쇄 끝나기가 무섭게 코팅을 하는 래미네이팅 업체로 가져간다. 코팅이 끝난 표지를 다시 차에 싣고 제책소로 옮긴다. 인쇄를 마친 본문의 경우에는 제작처에서 바로 배차가 안 될 경우 현장에서 인쇄 상태를 확인한 뒤, 용달을 불러 인쇄물을 싣고 제책소로 보내기도 했다. 지금이야 제작 담당자가 따로 있지만, 30년 전에는 출판사의 대표나 편집장이 이렇게 제작처를 직접 뛰어다니며 책의 제작까지 챙겨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인쇄물을 싣기에 좋은 코란도를 타고 제작처를 돌아다니다 보니 제작처 직원들이 나를 그리 불렀던 것이다.

<반갑다, 논리야>가 한창 잘나갈 때는 서점에 배본할 책이 없어 아침 일찍 코란도를 몰고 밤새 책을 만들고 있는 제책소로 달려갔다. 막 만들어진 책들을 급한 물량만 포장해 출판사로 싣고 오곤 했다. 서늘한 아침, 포장지에 싸인 책들을 받아 차에 싣노라면 손에 따뜻한 감촉이 느껴졌다. 갓 구운 빵만 따끈한 게 아니라 갓 구운 책도 따끈하다는 걸 그때 알았다. 책도 마지막에는 구워서 만든다.

“운반조가 인쇄소에 가서 인쇄물을 트럭에 싣고 온다. 인쇄물을 추림기 위에 놓고 잘 고른다. 판형에 맞게 재단한다. 접지기에서 인쇄물이 대수별로 접지되어 나온다. 저자 인지를 붙일 경우, 판권 대수만 따로 옮긴 뒤 판권 페이지를 찾아 일일이 인지를 붙인다. 노리끼라는 접간지 기계를 통해 앞면지와 뒷면지를 붙인다. 정합기에 접지를 페이지 순서대로 넣고 한꺼번에 정합한다. 등굳힘기에 대고 정합된 책등에 풀을 묻힌다. 무선철에서 표지를 씌운다. 날개 접지기에 넣고 표지 날개를 접는다. 옷을 걸쳐 입은 책을 삼방 재단기에 넣고 위아래 면을 깔끔하게 재단한다. 마무리된 책들을 일정 부수의 덩어리로 만들어 종이를 씌운 뒤 묶는다. 운반조가 트럭에 싣고 물류센터로 옮긴다.”

30년 전 내가 정리해놓은 제책 과정이다. 제책 과정 하나만 보더라도 12단계가 넘는다. 등굳힘기라는 기계는 흡사 둥그런 붕어빵 기계처럼 돌아갔다. 둥그렇게 돌아가면서 고체로 되어 있는 풀을 170도 안팎의 열로 녹여 책등에 묻혀가면서 표지를 씌웠다. 그래서 갓 구워진 책은 따끈했다.

30년이 지난 지금은 어떨까. 이 복잡한 과정이 단 한 과정도 단축되지 않고 그대로이다. 그만큼 제책 과정은 복잡해서 자동화 기계로 스르륵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정합기에서는 인쇄된 본문 용지가 대수별 페이지 순서대로 접혀서 컨베이어 벨트 위로 떨어진다. 책이 두꺼울수록 접혀서 떨어지는 대수는 많다. 그걸 하나씩 집어 페이지 순서대로 정합기에 넣는 일은 기계가 하지 않는다. 30년 전과 똑같이 사람이 한다. 그것도 열개씩 되는 칸 앞을 왔다 갔다 하며 하루종일 서서 넣어야 한다. 사람이 하는 일인지라 정합 과정에서 대수가 빠지거나 잘못 맞춰지면 페이지가 건너뛰게 되거나 뒤죽박죽되는 경우도 생긴다. 30년 전과 달라진 게 있다면 이런저런 실수를 체크하는 카메라가 칸별로 설치되어 있다는 점이다. 정합기 앞에서 일하는 분들의 평균 연령은 50대 중반이다. 70살이 넘은 분들도 꽤 된다. 임금은 수십년을 일해도 최저임금 수준인 경우가 허다하다. 제책을 하는 비용 단가는 부속물을 제외한 본문의 경우 오랫동안 똑같다. 책 판형 크기에 따라 한 페이지의 제책 단가는 50전, 70전, 80전이다. 통용되고 있지도 않은 화폐 단위인 ‘전’을 21세기에도 쓰고 있는 곳이 제책소이다. 정합기와 등굳힘기를 합해 제본기라 부른다. 지금은 새 제본기 한대에 18억원, 중고도 8억원 정도 한다고 한다. 겨우 현상 유지하며 버티고 있는 제책소의 경우 기계가 망가지면 문을 닫아야 한다. 실제로 수많은 제책소가 사라지고 있다.

모든 제작 과정을 하나로 연결하는 일을 맡고 있는 사계절출판사 제작팀장에게 최근 제작처 현황 조사를 부탁한 적이 있다. 꽤 두툼한 보고서를 나에게 내밀며 그는 말했다. “제작처들의 고단함과 소중함이 절실하게 다가왔다. 제작처 중에서 가장 열악한 곳은 제책소이다. 정합기 앞에서 하루종일 서서 일하는 한분 한분이 그렇게 소중해 보일 수 없다. 제작처의 목소리로 그들의 상황을 들으니 수십년 동안 제작 일을 하면서도 몰랐던 걸 이제야 알고 느꼈다.” 그의 목소리는 뭔가 묵직한 울림과 여운으로 젖어 있었다. 흔히 대상화한다는 말을 부정적으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상대를 대상화했을 때 비로소 그를 제대로 살필 수 있다. 이때의 대상화라는 것은 내가 주관적으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상대를 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 눈을 맞추면서 똑바로 바라보는 것,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 마침내 나의 위치를 제대로 살피는 것을 말한다. 제작팀장은 공정을 독촉하기에 급급했던 발주자의 자세를 벗어던지고, 비로소 제작처를 책을 함께 만드는 연대의 현장으로 바라보았던 게 아닐까.

책이 빵처럼 구워지듯 책 속 메시지는 발효될수록 오래간다. 책은 메시지의 힘으로 살아 움직이는 유기적 세계이다. 잘 발효된 메시지를 만들어내는 저자는 최초의 창조자다. 그 메시지를 어떤 모양새로 담아낼 것인가, 독자에게 어떻게 알리고 다가갈 것인가를 고민하는 건 출판사의 몫이다. 하지만 물성으로서의 책을 갓 구운 빵처럼 맛있게 만들어주는 건 출력소, 인쇄소, 제책소와 같은 제작처들이다. 보이지 않는 수많은 제작 공정에 참여하는 사람들이다. 장인정신으로 무장한 이들이 출판사와 함께 움직이지 않으면 책은 완성되지 않는다. 그 땀방울의 수는 헤아릴 수 없다. 한 권의 책은 수많은 땀방울을 먹고 자라는 나무에서 열리는 빛나는 열매다.

영화의 엔딩크레디트(제작진 소개 자막)에 해당하는 게 책에도 있다. 바로 책의 판권이다. 그러나 한 권의 책을 만드는 데 참여한 제작처 사람들,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그들의 이름은 판권 어디에도 없다. 인쇄소 이야기를 다룬 소설인 <책의 엔딩 크레딧>을 출판한 출판사 대표는 편집자 후기에서 이렇게 말한다. “책을 쓰는 사람, 기획하는 사람, 제작하는 사람, 배본하는 사람, 파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앞으로도 쭉 만들고 싶다”고. 그는 한 권의 책에 스며 있는 땀방울의 수를 정확히 헤아려 알고 있음에 틀림없다.

사계절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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