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에 대한 불신 가득한 아랍, "먹고 사는 게 정치체제보다 중요"
10여 년 전 독재정권에 맞서 ‘아랍의 봄’을 불러왔던 중동·북아프리카 지역에 다시 찬 바람이 불고 있다. 훈풍을 불러올 것으로 기대했던 민주정권이 정치 불안·경제난 극복에 실패하면서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도 식었다. 일부 국가에서 권위주의 정권이 다시 들어서는 등 과거로 회귀하는 모습까지 나타났다. 아랍인의 다수가 경제 안정을 이룰 수 있다면 정부 형태는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BBC방송과 미국 프린스턴대 소속 여론조사 기관인 ‘아랍 바로미터’는 6일(현지시간) 중동·아프리카의 아랍권 9개국과 팔레스타인에서 주민 2만2765명을 대상으로 한 2021~2022 여론조사 결과를 공개했다. 조사 결과 이라크, 튀니지, 리비아, 요르단 등 7개국과 팔레스타인에서 “민주주의하에서 경제가 안정되기 어렵다”는 데 동의한 이들은 2018~2019년 조사 때보다 크게 늘었다. 3년 전 조사 대상이 아니었던 모리타니와 이번에 해당 질문이 빠진 이집트를 제외하면 조사 대상에 포함된 모든 아랍 국가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신뢰도가 떨어진 셈이다.
특히 ‘아랍의 봄’으로 드물게 민주화에 성공한 튀니지에서 이런 경향이 크게 두드러졌다는 점은 눈길을 끈다. 튀니지에서 “민주주의 체제하에서 경제 안정을 이루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2011년도 조사에서 17%에 불과했지만, 이번 조사에선 70%로 증가했다. “민주주의는 뚜렷한 답을 내놓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응답자들의 비중도 10년 만에 19%에서 67%로 48%포인트나 늘었다. 또 10명 중 9명은 현 대통령이 총리를 전격 해임하고 의회 기능을 정지시킨 것에 찬성한다고 답했다. 부패 척결을 위해선 민주주의 원칙을 뒤흔드는 행동에도 눈감을 수 있다고 답한 것이다.
능력만 있다면 정치 체제는 신경 쓰지 않겠다는 인식도 아랍인들 전반에 걸쳐 확인됐다. 조사가 이뤄진 모든 국가에서 “경제 문제를 해결할 수만 있다면 어떤 형태의 정부든 상관없다”는 문항에 동의한 이들은 61~79%로 높은 비중을 차지했다. 또 “일을 처리하기 위해 법을 어기는 강력한 지도자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는 문항에도 이라크(87%), 튀니지(81%), 레바논(73%), 리비아(71%), 모리타니(65%), 수단(61%), 요르단(53%), 팔레스타인(51%) 응답자 과반수가 동의했다.
이러한 민주주의에 대한 인식 변화는 민생의 어려움에서 기인한 것으로 풀이된다. ‘아랍의 봄’ 당시 고취됐던 새 정치에 대한 열망이 더 팍팍해진 삶으로 인해 절망으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조사 대상 국가 중 8개국에서 ‘경제난’은 ‘부패’, ‘불안정’, ‘코로나19 확산’ 등을 제치고 가장 시급한 해결 과제로 꼽혔다.
11년 전 빈곤·청년실업·양극화 등에 대한 해결을 부르짖으며 혁명의 근원지가 됐던 튀니지는 여전히 실업난에 시달리고 있다. 2021년 튀니지의 실업률은 16.8%로 혁명이 일어나기 전인 2010년(13.1%)보다 오히려 증가했다. 지난해 기준 청년 실업률은 38.3%를 기록했다. 빈곤 문제도 해결이 요원하다. 이번 조사에서 “먹을 것이 떨어지기 전에 새로 살 돈이 없었다”고 한 이들은 55%에 달했다. 이집트나 모리타니 등에선 상황이 더 심각해 3명 중 2명이 종종 굶는다고 답했다.
아랍 바로미터의 공동 창립자인 아마니 자밀은 “민주주의가 튀니지에서 경제적으로 실패했다는 믿음 때문에 권위주의 회귀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평가했다. 마이클 로빈스 아랍 바로미터 국장도 “이 지역 주민들은 굶주리고 있고, 먹을 게 급한 이들은 현 시스템에 좌절하고 있다”며 “민주주의가 완벽한 형태의 정부도, 만병통치약도 아니란 인식이 확산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혜리 기자 harr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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