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준이 교수는 어쩌다 '수포자'가 됐나
매일경제·조선일보 인터뷰에서 '수포자' 빗댄 질문…조선·연합 보도 후 대대적 보도
[미디어오늘 노지민 기자]
국제수학연맹(IMU)의 필즈상 수상자인 허준이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가 6일 한국 언론과의 온라인 기자회견에서 자신은 '수포자'(수학포기자)가 아니라고 해명했다. 이미 허 교수 관련 보도가 '수포자였던 수학천재'로 도배된 상황에서 사실을 바로잡은 것이다. 어떻게 된 일일까.
허준이 교수의 인터뷰 내용에 '수포자'가 처음 언급된 건 2021년 5월 매일경제 기사(인류난제 푼 '수학스타'의 첫 꿈은 시인..경계 넘나드는 무한한 상상력이 나의 힘)였다. 앞서 2014년 필즈상 수상이 기대되는 젊은 수학자 중 한 명으로 허 교수를 인터뷰했던 신문이 7년 만에 '세계가 주목하는 수학자'로서 허 교수를 조명한 때였다.
당시 스탠퍼드대 교수였던 그는 1968년 이후 처음 리드 추측을 증명한 수학자이자 '로타 추측' '다울링-윌슨 추측' 증명에 기여한 “수학계의 라이징스타”로 꼽혔다. 기자는 허 교수에게 '유년 시절부터 수학에 재능을 보인 건 아니라고 들었다 '수포자'였다는 우스갯소리도 들린다'고 질문했다. 허 교수는 “구구단 떼는 것도 꽤 늦었다. 초등학교 2학년 돼서야 다 외워다고 한다”며 “수학에 별 재능이 없는 편이었다(웃음)”고 답했다.
처음 제목에서 허 교수를 '수포자'로 칭한 건 올해 1월1일 조선일보 기사(''수포자'에서 '천재수학자'로…“인생도, 수학도 성급히 결론 내지 마세요”')다. 기사는 통계학자인 아버지가 풀라고 했던 문제집에 답지를 베껴 쓰고, 중 3때 과학고를 가려 했을 때 '너무 늦었다'는 말을 들었다던 허 교수 일화를 소개한다. 기자는 '수포자였지만 세계적 수학자가 됐다. 수학 머리는 타고나는 건가'란 질문을 이어갔다. 허 교수는 “능력 차이라기보다는 '취향의 밀도' 차이라고 생각한다. 정말 이걸 사랑한다는 강렬한 끌림을 느끼는 사람이 그 분야를 특화해 계발하는 과정에서 천재가 된다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그로부터 6개월이 지나 먼저 '수포자'의 수상 소식을 쓴 곳도 조선일보였다. 5일 기사 제목은 허 교수를 '고교 자퇴한 수포자'로 칭하기에 이른다. 연합뉴스가 이어서 ''수포자' 될 뻔한 한국의 수학 천재 필즈상으로 빛나다'라는 제목으로 “늦깎이 수학 천재”의 수상 소식을 다뤘다. “고등학교 자퇴 후 검정고시를 본 그는 2002년 서울대학교(물리천문학부)에 입학해 졸업 후 서울대 대학원 석사(수리과학부)를 마치고 미시간대에서 박사(수학) 학위를 받았다”는 설명이 붙었다.
이후 언론엔 대대적으로 '고교 자퇴 수포자가 한국인 최초로 수학계 노벨상을 수상했다'고 부각한 보도가 줄을 이었다. 지난 5일부터 6일까지 '허준이' '수포자' 키워드로 검색되는 기사는 다음, 네이버 등 포털 한 곳당 약 100건에 이른다.
일부 매체에선 '미국 뉴욕타임스(NYT)도 허준이에 주목했다'고 전했다. 이렇게 소개한 NYT 기사 원문은 네 명의 필즈상 수상자와 그들의 성과, 연구 내용을 고루 소개하고 있다. 허 교수와 더불어 필즈상을 수상한 젊은 수학자들은 마리나 비아조우스카 스위스 로잔연방공과대 교수, 위고 뒤미닐코팽 프랑스 고등과학원 교수, 제임스 메이나드 영국 옥스퍼드대 교수 등이다. 마리나 비아조우스카 교수의 경우 우크라이나 출신이자 역대 두 번째 여성 수상자라는 점에서도 조명했다. 이전까지 필즈상은 수상자 60명 중 59명이 남성이었다. 이를 언급한 기사는 소수에 그쳤다.
허 교수를 '수포자'라 할 수 있을까. 그는 한국에서 서울대 물리학과에 입학해 같은 학교에서 석사를 마쳤다. 이후 미국 미시간 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스탠퍼드대, 프린스턴대에서 교수로 일했다. 1983년 미국 유학 중이던 통계학 교수 아버지, 노어노문학과 교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가 학문적 성과를 이룬 곳은 미국이었다.
그러나 한국 언론은 한국에서 자퇴한 수포자의 성공신화에 매몰된 보도를 쏟아냈고 결국 허 교수가 이를 바로잡기에 이르렀다. 6일 온라인 기자회견에서 '교수님께서 수포자라고 들었는데 서울대 물리학과를 가게 되신 이유는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한 허 교수 답변은 아래와 같다.
“어린 시절 에피소드 같은 걸 어느 인터뷰에서 얘기하다가 초등학교 2학년 때 구구단을 외우는 데 힘들어 해서 부모님이 좌절하셨다는 이야기를 했더니, 기사 제목이 '수포자'로 나가서 그렇게 된 건데 사실 수포자였던 적은 없다. 수학 성적이 좋았을 때도 있고 좋지 않았던 적도 있지만 항상 중간 이상은 했기 때문에 수포자라고 말하기엔 좀 힘든 것 같고 특히 초등학교 중학교 땐 수학에 큰 흥미가 없긴 하지만 나이가 들어가면서 고등학교부터는 수학을 굉장히 재밌어하기도 했고 열심히 해서 충분히 잘 했기 때문에 수포자라 하기엔 적절하지 않은 것 같다.”
신미희 민주언론시민연합 사무처장은 “수상실적이 더 드라마틱하고 서사적으로 보이는 것을 노린 관행이 사실상 오보를 냈다”고 지적했다. “인물 보도의 경우 화제성을 높이기 위해 미담을 과장하거나 극적 요소를 추가하는 것쯤은 허용된다고 보는 언론계 관행이 개선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뒤늦게 수학에 관심을 가진 사례를 다루려면 왜 일본인 스승과 미국 교육시스템에서 본인의 재능, 능력을 발전시킬 수 있었는지 진지하게 조명했어야 한다는 지적도 더했다.
특히 인터뷰 기사에서 대상자가 하지 않은 발언을 쓰는 문제를 꼬집었다. 신 처장은 “기자가 질문으로 던지고 이를 제목에 부각하는 수법은 정직한 취재방식이 아니다”라며 “인터뷰이가 전혀 말하지 않은 말을 써서 오보가 나거나 인터뷰이가 피해를 입은 사례가 많다”고 했다. 단적인 예로 2012년 조선일보의 복싱국가대표 신종훈 선수 인터뷰 기사(“나는 일진이었다. 런던 金으로 속죄하겠다”)를 언급했다. 당시 신 선수는 본인이 그런 말을 한 적이 없고 사실이 아니라고 해명했지만, 그에 대한 퇴출 여론이 빗발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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