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 보다 '석유' .. 자존심 접고 빈 살만에 손 내민 바이든

김현아 기자 2022. 7. 7.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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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왼쪽)과 사우디아라비아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

■ Global Focus - 바이든, 13~16일 사우디 등 중동 순방

바이든, 빈 살만을 사우디 언론인 암살 배후로 지목

“왕따 국가의 독재자” 비판 … 취임 직후 통화도 패싱

11월 중간선거 앞두고 고유가 ‘위기’… 화해 제스처

‘영원한 우방도, 영원한 적도 없다’는 외교격언 실감

국제정치에는 영원한 우방도, 영원한 적도 없다는 헨리 존 템플 전 영국 총리의 격언이 이처럼 잘 어울리는 때가 있을까. 대선 후보 시절 사우디아라비아가 반체제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 암살 사건의 배후에 있다며 국제사회의 ‘왕따(pariah)’로 만들겠다고 공언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오는 13~16일 사우디를 포함한 중동 지역을 방문한다. 미국이 ‘1등 국가’ 지위를 유지할 수 있는 근간인 경제가 최악의 인플레이션(물가 상승)과 고유가 위기 속에 사정없이 흔들리자, 주요 산유국인 사우디와 관계 개선을 통해 해결책을 모색해보겠다는 취지다.

7일 이를 바라보는 국제사회의 시선은 엇갈리고 있다. 템플 전 총리가 “영원한 것은 오직 국가의 이익”이라 했지만, 미국이 ‘슈퍼파워’ 영향력을 키워온 방식은 자국의 이익을 기반하되 자유와 인권의 ‘가치’에도 방점을 찍었기 때문이다. 미·중 패권경쟁,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사태 등 그 어느 때보다 국제사회가 격동하는 만큼 ‘가치 연대’는 보다 중요한 명분이 됐지만, 미국이 국익 우선주의를 선택하며 서방 세계 전체가 딜레마와 직면했다는 비판도 나왔다. 전문가들은 “미국과 사우디의 관계는 구부러지긴 해도 끊어지진 않을 것”이라고 했다. 외교관계를 시작한 이래 부침은 있었지만,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얽혀 있기 때문이다.

◇77년의 동맹관계, 최악으로 치닫다=미국과 사우디의 관계는 1945년 양국이 우방이 된 이래 서로를 보완하며 이어져 왔다. 패권국의 지위에 오르고 싶었던 미국은 석유가 필요했고, 이란·요르단 등 주변 강국에 비해 신생 국가였던 사우디엔 미국이란 든든한 방패막이가 필요했다. 안보와 경제의 교환이다. 하지만 사우디를 맹주로 중동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넓혀가던 미국은 1973년 중동전쟁으로 인해 1·2차 오일 쇼크를 겪게 된다. 미국은 석유의 무기화로 인한 유가 폭등을 처절하게 경험했고, 에너지 독립 방안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의 ‘피벗 투 아시아(Pivot to Asia·아시아로의 외교중심축 이동)’ 정책은 이러한 미국의 속내를 고스란히 보여줬다. 오바마 당시 대통령은 ‘셰일가스 혁명’을 강력하게 지원하며 사우디에 대한 원유 의존도를 낮추기 시작하는 한편, 중동 지역에 대한 관여를 줄이고 아시아로 눈을 돌렸다. 파키스탄과 이스라엘 등 다른 중동 국가들이 미국과 패권 경쟁 중이던 중국을 바라보기 시작한 것도 그 시점이다. 사우디 역시 예멘 반군을 공격하며 미국산 무기가 아닌 중국산 자주포를 동원하는 등 ‘디커플링’(탈동조화) 움직임이 관측됐다.

그러다가 2017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집권 이후 사우디에서도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가 실권을 잡으며 관계가 다시 복원되는 듯 보였다. 트럼프 대통령은 첫 해외 방문지로 사우디를 택했고, 사우디의 숙적 이란을 겨냥해 수천 명의 병력을 사우디에 파병하기도 했다. 2020년 국제유가 폭락 사태 당시에도 두 정상은 해당 문제를 함께 논의했고, 사우디가 곧바로 증산 계획을 발표하기도 했다.

하지만 양국 관계는 바이든 정부의 출범과 함께 다시 경색되기 시작했다. 후보 시절부터 “빈 살만은 결함투성이”라며 왕세자를 비난한 바이든 대통령이 취임 후 사우디와의 정상 간 통화를 ‘패싱’한 데다, 이란 제재 해제를 의미하는 핵합의(JCPOA) 복원 협상에도 나서며 사우디의 심기가 불편해진 것이다. 사우디 주도 아랍연맹군과 예멘 후티 반군이 벌이고 있는 예멘 내전에 대해 미국의 공격 지원을 중단하겠다고 밝히며 양국의 밀월관계가 사실상 끝났다는 평가도 나왔다.

◇우크라 사태 속에 결국 바이든 사우디 방문, 그리고 남겨진 숙제들=사우디 정부의 한 관리는 이러한 상황에서도 “바이든 대통령이 사우디를 필요로 하는 날이 올 것”이라고 했다고 미 외교 전문매체 포린폴리시가 전했다. 예견은 사실이 됐다. 1981년 이래 최악의 인플레이션과 고유가 문제에 직면한 바이든 대통령이 결국 내주 사우디를 방문해 빈 살만 왕세자와 회담하기로 한 것이다. 당장 오는 11월 바이든 행정부가 중간평가 격인 선거를 앞뒀으니, 과거의 발언은 잠시 접어두고 발등의 불부터 끄겠다는 의도로 보인다. 바이든 대통령의 지지율이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점이 그의 마음을 더 급하게 만들었을 것이라고 외신들은 전했다. 미 싱크탱크 중동연구소(MEI)는 “인생이 그렇듯 정치와 외교정책에서도 ‘타이밍’이 큰 영향을 준다”며 “빈 살만을 ‘왕따 국가의 독재자’라고 부르던 때 석유는 배럴당 41달러(약 5만3800원)였지만, 이제는 100달러(13만1200원)가 넘는다”고 꼬집었다.

사실 사우디 입장에서도 미국만 한 파트너가 없다고 MEI는 분석했다. 미국과의 관계 부침 속에 사우디도 미국을 대체할 안보 파트너를 물색했고, 실제로 2021년 러시아와 군사협력 협정도 맺은 상황. 하지만 대미 의존도가 높은 안보시스템을 전환하기 위해 막대한 비용을 지출하려는 움직임은 그 어디서도 관측되지 않고 있다. MEI는 “전임자들과 달리 빈 살만에겐 러시아에 대해 이념적 경멸은 없지만, 블라디미르 푸틴이 이란으로부터 사우디를 지켜주리라는 환상도 없다”며 “미국과의 관계는 구부러질 수는 있어도, 부러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란의 영향력 억제를 원한다는 점은 여전히 두 국가의 공통분모이기도 하다.

두 정상이 내주 회담으로 당장 서로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순 있겠지만, 이후 풀어야 할 숙제가 상당할 것으로 보인다. 당장 바이든 대통령의 경우 카슈끄지의 암살 배후로 지목된 빈 살만 왕세자를 만나는 것 자체가 국내외를 막론하고 정치적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 미국이 추구하는 ‘자유’와 ‘인권’의 가치에 공감했던 서방 세계와 동맹국의 믿음, 미국이 그 가치의 확장을 위해 때로는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권위주의와 싸울 것이라는 신뢰가 흔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당장 미 연방법원이 카슈끄지 사건과 관련한 민사소송에서 빈 살만 왕세자에게 ‘면책특권’이 있느냐고 묻기 시작했다. 빈 살만 왕세자에게 정부 수반으로서의 면책권을 적용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의견서를 내달 1일까지 제출하라고 정부에 요구한 것. 인권단체들의 반발도 만만치 않다. 사우디로서도 일단 인권 문제를 잠시 덮어두는 수준이다. 고유가 특수를 톡톡히 누리는 현 상황이 전환되면, 언제든 불편한 진실을 요구받게 될 수 있다.

김현아 기자 kimhaha@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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