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자 내도 혼나고, 이익 내도 혼나는 한전…상장 공기업 딜레마
국제 유가 상승세에 '적자 행진' 당분간 이어질 듯
[비즈니스 포커스]
글로벌 인플레이션 상황에서 7월부터 전기와 가스 요금이 동시에 오른다. 서민 가계와 자영업자의 부담이 가중될 것으로 보인다.
한국전력공사(이하 한전)가 전기 요금 약관을 바꿔 3분기 전기 요금에 적용되는 연료비 조정 단가를 킬로와트시(kWh)당 5원 인상하면서 월평균 307kWh를 사용하는 4인 가구는 매달 전기 요금을 1535원 더 내야 한다.
민수용(주택용·일반용) 도시가스 요금도 메가줄(MJ)당 1.11원 올라 가구당 평균 도시가스 요금이 월 2220원 오른다. 서울시 주택 기준 가구당 월평균 가스 요금은 3만1760원에서 3만3980원으로 오른다. 전기와 가스 요금의 동시 인상으로 7월부터 가구당 월 공공요금 부담액이 3755원 늘어나는 것이다.
문제는 몇 천원 인상이 아니라 시장 경제 체제에서 정부가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자 ‘최후의 보루’로 여겨지는 공공요금 인상이 치솟는 물가를 자극해 연쇄 인플레이션을 유발할 수 있다는 점이다. 특히 전기 요금은 산업 활동의 기본 비용이자 소비자 생활에 밀접하게 연관된 만큼 상품과 서비스 등의 물가에 전방위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30조 적자로 공기업 개혁 1순위로 찍혀
새 정부 들어 억눌렸던 공공요금이 줄줄이 오르고 있다. 새 정부는 공기업을 개혁 대상이라고 천명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6월 21일 “공기업이 방만하게 경영되고 있다”며 강도 높은 공공 기관의 개혁을 주문했다. 추경호 경제부총리는 “공공 기관의 파티는 끝났다”며 성과급 자진 반납과 호화 청사 매각을 요구하며 공기업에 대한 대대적인 구조 조정을 예고했다.
공기업 직원들은 부글부글 끓고 있다. 그동안 수차례 요금 인상 요구에도 아랑곳하지 않던 정부가 정권이 바뀌자 공기업에만 책임을 전가하는 형국이기 때문이다.
한전 직원은 직장인 익명 커뮤니티 블라인드에 “지난 몇 년간 한전 사장이 전기 요금 인상의 필요성을 주장했음에도 정부의 반대로 하지 못했는데 연료비가 폭등하는 와중에도 전기 요금을 올리지 못해 역대급 적자가 났다”면서 “코로나19 시국에서 민생 안정을 위해 싼 전기 요금으로 부담을 낮춰 줘 적자가 난 것인데 직원들에게 월급을 반납하라고 하니 억울하다”고 토로했다.
또 다른 한전 직원은 “흑자를 내려면 전기 요금을 대폭 인상하면 된다”며 “정부의 지시를 따랐을 뿐인데 적자를 내면 정부·정치권·국민 모두에게 공공의 적이 되는 상황이 개탄스럽다”고 말했다.
새로운 정권이 출범할 때마다 공기업은 개혁의 1순위에 오른다. 과다 부채와 만성 적자, 방만 경영에 대한 지적이 단골 소재다. 이런 현상이 정권마다 되풀이되고 있는 이유는 공기업이 경제적 합리성에 의해 운영되기보다 정치적인 잣대로 운영되고 있기 때문이다.
‘딜레마’로 탄생한 한전
당초 공기업들은 탄생부터 딜레마의 산물이었다. 전기·수도·가스와 같은 필수 에너지와 공항·철도 등 교통은 필수재로, 전 국민이 필요로 하지만 투자비 대비 사업성이 저조해 민간에서 사업자를 찾기 어려웠다. 결국 국가가 공공 부문의 원활한 운영을 위해 국민의 세금으로 공기업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시대가 변화하면서 공기업들은 공공성과 수익성을 요구받기 시작했다. 공공성과 수익성의 조화는 공기업의 가장 큰 딜레마다. 그 중심에 공기업의 요금 정책이 있다.
공기업들은 기획재정부와 산하 공공기관운영위원회의 영향력 아래 있어 적정 이윤 확보나 주주 가치 극대화보다 정부와 집권 여당의 정책 기조를 따를 수밖에 없는 구조적인 문제를 안고 있다. 전기 요금을 포함한 공공요금 수준을 결정하는 최종 권한 역시 정부가 가지고 있다.
상장 공기업의 상황도 다르지 않다. 1961년 설립된 한국 최대 에너지 공기업인 한전은 상장 공기업 딜레마의 대표 격이다. 한전 설립 당시는 산업 구조가 취약한 상황에서 대규모 설비 투자가 요구되는 전기 사업을 추진할 만한 민간 자본이 절대적으로 부족했고 정부 주도의 공기업 형태로 전력 산업을 이끌어 가는 것이 합리적이었다.
한전은 포항제철(현 포스코)에 이어 1989년 유가증권시장에 상장된 ‘국민주 2호’다. 당시 정부는 우량 공기업의 주식을 일반 국민에게 매각해 주식 투자 인구의 저변을 넓히고 자본 시장을 발전시킨다는 목적에서 한전 등 일부 공기업을 국민주 방식으로 공개 상장했다.
공기업의 상장은 정부의 중·장기적인 민영화 계획의 일환으로 추진됐다. 하지만 상장 이후 정부가 지배 주주의 지위를 유지할 때 발생할 수 있는 기관의 공공성과 상업성 충돌에 대한 신중한 고려가 전제되지 않은 상태에서 민영화가 진행되다가 여러 가지 문제로 민영화가 중단되면서 한전은 결국 완전한 민간 기업도 공기업도 아닌 어정쩡한 형태로 남게 됐다.
상장 후에도 정부 통제 받는 숙명
한전을 비롯한 상장 공기업들은 공공 부문이 주식의 51% 이상을 소유하면서 다른 공기업들과 동일한 운영 관리 체계를 적용받고 있다. 다른 공기업들처럼 정부에 인력·예산 운용 통제를 받는다.
주식 시장에서의 기업 가치와 주가를 통해 경영 성과를 평가받는 게 아니라 공공 기관 경영 평가를 통해 경영 성과를 평가받는다. 상장 공기업 특성상 수익성과 공익성의 상충으로 일반 소액 주주의 권리를 훼손할 수도 있다.
한전이 상장 기업이면서도 시장 경제 원리와 상관없이 정부 정책과 규제에 큰 영향을 받기 때문에 시장에서는 ‘개미들의 무덤’이자 ‘정책 피해주’로 불린다.
한전은 2001년 이전까지는 발전·송전·배전·판매 부문을 모두 독점했다. 2001년 전력 산업 구조 개편으로 발전 부문이 6개 자회사로 완전 분리되면서 한전은 송전·배전·판매를 독점하는 구조가 됐다.
한전은 이들 발전사에서 전력 도매가격(SMP)으로 전기를 구매하는데 국제 유가·액화천연가스(LNG)·석탄 등 발전용 원자재 가격이 가파르게 오르면서 최근 SMP가 급등했지만 그동안 정부의 반대로 전기 요금에 생산 원가 상승분을 반영하지 못했다. 전기를 사 오는 가격은 계속 오르는데 한전이 정부의 요금 규제에 막혀 전기 요금을 올리지 못하면서 적자가 심화되고 있다.
요금 규제를 받는 것도 공기업의 숙명이다. 공기업은 정부가 주도하는 대규모 정책 사업을 추진하고 전기·수도·가스·철도 등 전 국민에게 저가에 제공돼야 하는 공적 서비스를 제공하기 때문에 정부의 요금 규제를 받는다.
한전은 비용이 합리적으로 전가되지 못하는 구조적인 문제를 완화하기 위한 방안으로 2021년 1월부터 연료비 연동제 시행이 골자인 전기 요금 체계를 변경했다. 연료비 연동제는 발전에 쓰이는 원자재 가격을 전기 요금에 3개월마다 조정하게 하는 체계다.
과거에도 한전은 연료비 연동제를 시행하기 위해 전기 공급 약관까지 변경했지만 당시 물가 상승 우려에 따라 시행하지 못했다. 하지만 연료비 연동제 시행 후 연료 가격이 상승함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압력으로 단가 인상이 여러 차례 유보됐다.
올해 3분기 전기 요금 인상이 확정됐지만 정부 통제를 받는 공기업인 만큼 연료비 연동제 시행에 대한 불확실성도 높은 상황이다. 한전은 올해 1분기에만 약 8조원의 적자를 낸 데다 부채가 156조5352억원에 달하는 등 심각한 경영난을 겪고 있다.
한전은 올해 최대 30조원에 달하는 적자를 낼 것으로 추정된다. 국제 유가 등 에너지 가격 상승세가 이어지고 한전의 적자 상쇄를 위해 정부가 추진 중인 SMP 상한제 도입도 미뤄지고 있어 적자 행진은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안옥희 기자 ahnoh05@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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