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적 상식 벗어나니 보이는 '존재의 무게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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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은 입어야 하고, '책'은 읽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비'는 허공에서 땅바닥에 내리꽂혀야 하는 것이다.
절대화한 우리의 시각적 상식에서 벗어난 비와 책과 옷의 이면들을 특출한 조형적 방식으로 끄집어냈다.
성경과 <어린 왕자> 를 비롯한 수많은 책과 옷마다 온통 구멍을 뚫어 너덜너덜한 종이 뭉치와 천 조각으로 변질시켜놓고 이 물질 덩어리들을 여러 모양새로 세우거나 늘려 내걸었다. 어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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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일까지 전남 오승우미술관
‘옷’은 입어야 하고, ‘책’은 읽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비’는 허공에서 땅바닥에 내리꽂혀야 하는 것이다.
비정할 정도로 의미와 기능이 명징한 세가지 존재의 숙명을 최근 미술판 소장 작가 두 사람이 비장하게 해체했다. 지난 5월 초부터 전남 무안 오승우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신호윤·이지현 작가의 초대 기획전 ‘마른 비, 마른 언어’는 이런 해체의 결실을 펼쳐놓은 무대다. 절대화한 우리의 시각적 상식에서 벗어난 비와 책과 옷의 이면들을 특출한 조형적 방식으로 끄집어냈다.
먼저 신 작가의 <마른 비>는 붉은색 종이 띠로 재현한 빗속 세계다. 현실에서는 보지 못하는 빗줄기의 질감과 빗줄기들 사이의 미지의 공간을 보여주려는 시도다. 작가는 물방울 대신 쓴 종이 띠 표면의 뚫음 무늬로 유기적 형상들이 새겨진 빗줄기의 질감을 드러내고, 종이 띠의 숲 같은 행렬로 땅에 내리꽂히는 찰나의 빗발을 구현한다. 컴퓨터 작업을 통해 불규칙한 뚫음 무늬가 구획되고 잘린 1m가량의 종이 띠들을 이어붙여 5m×30㎝의 거대한 종이 띠를 만든다. 종이 띠 수백개를 천장부터 전시장 바닥까지 늘어뜨려 빗줄기들이 내리꽂히는 형상을 만든다. 관객은 종이 빗줄기 속을 거닐면서 보이지 않았던 미지의 빗줄기 속 공간을 팔랑거리는 띠의 감촉으로 느끼게 된다. 작가는 사람들이 현실에서 겪는 상처와 아픔을 이 공간을 거닐며 치유받길 바라는 마음으로 작품을 구상했다고 한다. 하지만 수평의 바닥에 수직으로 늘어뜨려진 종이 띠의 이미지는 의외로 비장하다. 바닥에 쓰러지지 않고 꽂히면서 존재의 종말을 맞는 빗줄기의 산화를 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 허만하 시인이 1999년 낸 시집의 제목이자 시집의 시구인 ‘비는 수직으로 서서 죽는다’를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이지현 작가의 설치 작품 <꿈꾸는 책> 연작들은 책에 과격한 몸의 손짓이 개입되어 텍스트를 산산이 흩뜨린 작업들이다. 성경과 <어린 왕자>를 비롯한 수많은 책과 옷마다 온통 구멍을 뚫어 너덜너덜한 종이 뭉치와 천 조각으로 변질시켜놓고 이 물질 덩어리들을 여러 모양새로 세우거나 늘려 내걸었다. ‘마른 언어’란 부제에 해당하는 작가의 작업들은 생각을 이끄는 텍스트 대신 직관적으로 살피게 되는 책 종이의 물성을 강조한다. 마치 땅이나 습지에서 발굴한 고고학적인 출토품처럼 붇거나 거친 질감을 발산하는 출품작들은 책 너머 물질적 존재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변하지 않은 것에 대한 변화의 시도’와 ‘뭔가를 눈으로 마주하고 싶다는 것’이 작업의 시작점이 되었노라고 작가는 말한다. 디지털 시대 더욱 시각 일변도로 기울어진 우리의 사물 인식법을 파격적 표현 방식으로 두들기며 보이지 않는 존재의 무게감을 일깨우는 역작들이 나왔다. 17일까지.
무안/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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