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바람 순례단'이 그린 18편 전국 투쟁지도

김상목 2022. 7. 6.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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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의 영화들' 리뷰] <봄바람 프로젝트 - 여기, 우리가 있다>

[김상목 기자]

▲ "봄바람 프로젝트"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봄바람 프로젝트
 
1_변혁적 사회운동과 현장을 지키는 카메라, 만나다

2022년 3월 9일, 20대 대통령 선거가 끝나고 많은 이들이 좌절하거나 낙담하던 시간, 혹은 지방선거 준비에 여념이 없던 시기에 다른 것을 실행하는 이들이 있었다. 3월 15일부터 4월 30일, 약 40여 일 기간 동안 <다른 세상을 만나는 40일 순례>란 이름으로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는 다양한 투쟁현장을 연대 방문하던 이들이다. 이 일군의 방문자들은 '봄바람 순례단'이라 불리곤 했다. 고산자 김정호가 대동여지도를 만들기 위해 방방곳곳을 표랑하던 것처럼 이들은 서로 연결되기 어려워 보이는 곳곳의 '투쟁'들을 잇고자 했다. '정치극단주의'가 횡행하는 징후 속에서 정작 민생은 나날이 어려워져가는 시절에 가장 그런 모순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곳들을 찾은 것이다.

대선 국면에서 '자유민주주의'라는 개념에 대한 논란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한국사회의 현실과 지향에 대한 건설적인 토론으로 이어지기보단 극한대립에서 상대방을 적대시하는 데 오용되는 것으로 끝났다. 과거 군사독재 시절에는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제도권 정당들의 의회정치와 언론의 감시 대신에 '재야'라 불리는 사회운동의 역할이 작지 않았다. 하지만 6공화국 이후 사회운동의 대안체제 모색과 전망 제시는 점점 주변부로 몰려났다. 이제 우리 사회 구성원 대다수와 사회변혁을 꿈꾸는 이들은 유리된 상태다. 그러나 여전히 곳곳에서 (과거라면 '불온세력' 딱지가 붙곤 했던) 사회운동을 목격할 수 있다.

누군가는 '노동해방'을, 누군가는 '반전평화'를, 누군가는 '성 평등'을, 누군가는 '기후정의'를, 누군가는 '장애인 탈 시설'을 요구하며 이들은 항상 우리 주변에 존재한다. 이런 요구는 일정시간이 지나면 체제 내부로 반영되어 제도화된다. 그리고 우리 사회의 일부로 자리를 잡게 된다. 지금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수많은 것들이 원래는 금지되거나 불온하게 간주되던 것들이다. 과격한 주장이라 치부하기 쉽지만 분명 사회가 전향적으로 나아가야 할 부분을 선도적으로 제기하고 여론화하는 데 이런 '변혁적' 사회운동의 역할은 작지 않다. 현재도 엄연히 이들은 존재하지만 우리는 외면하거나 잊어버리곤 한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모순에 고통당하는 이들에겐 이런 사회운동단체나 활동가들이 유일한 도움이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한국사회가 보다 노동중시, 복지강화, 생태평화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믿는 이들에겐 지난 문재인 정부는 반신반의하는 가운데에도 기대를 거두진 않았던 시기다. 하지만 비정규직 정규직화나 차별금지법 제정, 탈 원전과 군사대결구도 극복은 이룩되지 못했다. 불완전한 개혁은 역풍을 맞았고 그 결과 누군가에겐 역사의 시계바늘이 거꾸로 돌아가는 절망감으로 정치지형은 지각변동을 일으켰다. 여전히 정치 관련 여론조사 등에서 이런 극단적 대립구도는 여전히 확인된다. 하지만 변혁적 사회운동에는 오히려 충격파가 덜한 듯하다. 애초에 큰 기대가 없었기 때문일 테다. 그러나 윤석열 정부의 보수회귀 움직임은 이들에게도 달가울 리 없다. 친 대기업, 원전 부활, 여성가족부 폐지, 사드 배치 정식화 등의 어두운 징후가 먹구름처럼 끼는 가운데 이들은 자신들의 연대가 필요한 '현장'을 순회하며 하나의 지도를 그리기로 한다. 여기에 코로나19 관련 사회적 거리두기 완화 상황을 활용해 '현장을 지키는 카메라'들이 결합한다.

한국독립영화에서 이런 사회운동과의 결합은 오래된 전통에 가깝다. 예술적 실험과 표현의 자유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한국사회의 억압적 상황은 체제에 대한 의문을 불러왔고, 제대로 독립영화를 창작하거나 감상하기 위해선 '검열'을 뚫어야 하는 게 일상이었다.

이를 위해 집결한 전국의 미디어 활동가들은 각자 5분 전후의 단편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기로 한다. 개별 작업으로 18편이 완성되었고 여기에 순례단 인터뷰와 개별 현장투쟁 영상들을 테마별로 묶어주는 기능에 특화된 브리지 영상들이 일종의 단막 개념으로 활용되어 감독 각자의 관심사와 연계된 단품들 간의 구획을 정리해준다.

2_방방곳곳 '투쟁'의 '섬'과 '섬'들을 횡단하다
 
▲ "봄바람 프로젝트"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봄바람 프로젝트
 
18편의 단편들은 5개의 굵직한 테마로 나뉘어 조합된다. 이런 조합을 통해서 특정 지역이나 분야의 개별 사안으로만 간주되던 한국사회 일반의 쟁점을 통합적으로 살펴보도록 시야를 제공하려는 기획이라 하겠다.

2_1. '기후위기의 시대'
 

정권이 바뀌면서 가장 먼저 급격하게 변화를 겪고 있는 탈 원전과 에너지 정의 관련 쟁점을 다룬 <기후위기의 시대>가 1막 노릇을 하며 가장 먼저 등장한다.

첫 번째 출발은 월성 핵발전소 인근지역 주민들의 이주대책 관련 투쟁을 다룬 <원전 말고 사람>이다. 전작 <핵마피아>(2016)를 통해 한국의 핵발전 산업에 대해 조명했던 김환태 감독은 이번에는 경북 경주의 월성 원전을 조명한다. 1983년부터 가동된 월성 원자력발전소는 국내 유일의 가압중수로로 플루토늄 농축에 유리한 조건이라 국제 핵사찰의 주요 타깃이기도 하다. 이 원전은 국내 4번 발생한 원전 사고 중 2번을 기록한 곳으로 근래 노후화된 1호기 수명 연장 논란이 거셌던 곳이기도 하다. 기존의 4기에 새로 2기가 추가되고 1호기 안전과 경제성 문제는 대선 논쟁의 일부가 될 만큼 뜨거운 감자였었다.

하지만 감독은 그런 정치적 논란에는 별 관심이 없어 보인다. 카메라는 월성 원전 내부 사고가 속출하던 2014년 당시 인근 주민들의 이주대책 요구 시위 기록영상으로 출발해 8년이 지났는데도 별반 조치가 이뤄지지 않은 현재와 교차시킨다. 동일한 경로를 동일한 요구를 담은 시위행진이 시차를 넘어 등장하는 교차는 원전 옆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불안을 화면 너머로 전이시키려는 의도다. 그리고 주민들의 인터뷰가 이어진다. 흔한 제3자들의 색안경, 보상금 올려 받으려는 것 아니냐는 차가운 시선에 항변하는 듯 격렬한 입장이 전해진다.

두 번째는 강릉에 정착해 지역영화인 양성과 라이브러리 구축에 맹렬히 활약 중인 독립 다큐멘터리 계의 고참, 이마리오 감독이 담당한다. <삼척화력발전소 - 석탄을 넘어서>는 인근 지역인 삼척에서 끈질긴 반대투쟁으로 원전 유치를 겨우 막았더니 이번엔 다시 석탄 화력발전소가 추진되는 상황에 처해 다시 전열을 정비하는 투쟁주체들을 다뤘다. 다양한 발전소 수요 주장에 반대하는 이들의 대항논리와 지난한 싸움의 과정이 소개된다.

세 번째는 밀양 송전탑 투쟁과 성주 소성리 사드 저지 투쟁을 다큐멘터리로 기록했던 박배일 감독의 작업 <밥과 탑>이다. 감독은 그에겐 이제 고향 친척들 같은 '할매'들이 사는 밀양 송전탑 설치 지역에서 출발해 거미줄처럼 한반도 전체로 뻗어나가는 고압 송전탑 문제를 환기한다. 밀양의 문제는 밀양에서만 끝나는 게 아니다. 주로 동남부 해안지대에 설치된 국내 원전은 발전한 전기를 고압 송전탑을 통해 수도권으로 보내야 한다. 밀양이 그 초반 정류장이라면 중간 계류지가 당연히 필요하게 마련이다. 청도 송전탑 문제가 그렇게 발생했었고 이번에는 동해안 신가평 송전탑 이슈를 카메라에 담았다. 대도시와 기업의 전력 편의를 위해 늘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해야 한다!"고 앵무새처럼 누군가는 말하지만 그 희생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똑바로 직시하라는 선포의 기획이다.

그리고 네 번째로 김선구 감독의 <제로섬게임>이 등장한다. 청주 지역에 추진 중인 하이닉스 LNG발전소 추진과정의 문제를 제기하는 내용이다. 상대적으로 화석연료에 비해선 탄소 배출 측면에서, 원전에 대해선 안전문제에서 장점이 있는 것으로 선전되는 '청정에너지' 발전소 건립에도 문제가 충분히 발생할 수 있다는 선도적 의제를 제기하는 에피소드다. 지방정부는 여러 지원책을 통해 대기업이 주도하는 지역개발 구상을 진행하려 한다. 이런 프로젝트가 갖는 문제점에 대한 우려가 전해져온다.

2_2. '빼앗긴 노동'
 
▲ "봄바람 프로젝트"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봄바람 프로젝트
 
이번 조합의 네 편은 '노동'이 주제다. 한국사회 대부분의 구성원이 노동자인데도 항상 간과되고 배제되는 노동 의제를 놓고, 특히 비정규직 불안정노동 투쟁현안을 소개하는 코너다.

하샛별 감독은 쌍용자동차 정리해고, 기륭전자 비정규직, SK브로드밴드와 LG유플러스 통신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꾸준히 카메라에 담아온, 농성장 전문 기록자다. 감독의 카메라가 도착한 곳은 코로나19 위기 이후 이를 이유로 정리해고가 시행된 최초 사례, 아시아나 케이오 노동자들의 농성장이다.

< 아시아나, KO >의 주 무대인 아시아나 케이오는 아시아나 항공 '하청업체'인 아시아나 에어포트 '하청업체'다. 말 그대로 하청의 하청인 셈. 그런데 하청업체 실제 소유주는 아시아나 그룹 회장이라는 기이한 실상이 자막으로 소개된다. 아웃소싱이 합리적이니 뭐니 들이대기 전에 그냥 봐도 이상하지 않은가. 하지만 회장님이 우기면 모두가 맞장구치는 한국 재벌 특유의 기업문화는 요지부동이다. 그 결과 고령의 기내청소 노동자들은 코로나19로 인한 경영위기를 이유로 국내 최초 해고된 노동자들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그들이 해고회피 노력으로 회사가 제안한 무기한 무급휴직(!?)을 동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노조는 부당해고 소송에서 계속 승소하고 있지만 사용자 측은 소송비용과 이행 강제금 수억을 부담하면서도 재판결과를 수용하지 않고 버티는 중이다. 노조의 '떼'법이 아니라 재벌의 오만이 법치주의를 위협하는 중이다. 8명의 해고자들은 3년째 본사 앞에서 천막농성을 견디고 집회와 시위에 결합하는 중인데 단 1명을 빼고 이미 모두 정년을 넘겼다고 한다. 투쟁을 더해봐야 얻을 게 없는 것이다. 대체 이건 무슨 상황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회사는 고령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제풀에 나가떨어지길 기대하며 제2, 제3의 사례를 막기 위해 버티는 중이고 노동자들도 그 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하지만 해고자들은 돈을 넘어 자신들의 주장이 정당하다는 자존심과 연대의식으로 견디는 중이다. 경제위기 때마다 기업이 붕괴되면 초래될 파생효과를 염려해 서민들에겐 접근하기 힘든 다양한 지원이 제공된다. 아시아나 항공엔 근래 2조 4천 억이 지원되었다. 재벌총수의 경영능력이 아니라 국민세금으로 부지되는 대기업이 8명의 나이든 비정규직 노동자부터 해고하는 게 대체 어떤 논리로 정당화될 수 있을까 카메라는 묻는다.

신효진 감독의 <포크레인 - 현대건설기계 사내하청 서진 노동자>는 긴 제목 안에 사실상 단편 내용이 다 들어가 있다. 영상 속에는 제조업 비정규직 문제가 압축된 것처럼 채워진다. 현장에서는 호황기엔 정당한 대가 없이 불법파견으로 일하다 불황기가 올라치면 위장폐업으로 '원활한 경영'을 위해 '일회용' 노동자들을 크리넥스 티슈 뽑아 쓰고 버리듯 '정리'해버린다. 그렇게 소리 없이 사라져야 할 운명을 거부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권리선언을 현장영상과 당사자 인터뷰로 요약해 소개하는 에피소드다.

< Hotel K >는 강정 해군기지 투쟁을 기록하다 제주에 정착한 김성은 감독의 작업이다. 변방의 섬 제주도에서 벌어지는 노동자 투쟁은 육지에는 거의 알려지지 못한다. 그런 투쟁을 특별히 조명하는 차원의 기획이다. 제주의 유서 깊은 칼 호텔은 경영악화로 매각과정을 밟았다. 하지만 안 좋은 건 만국 공통이듯 육지의 여느 사업장들처럼 이곳에서도 비정규직들은 그 과정에 말 한마디 끼어들 틈이 없는 것은 물론 아무런 통보도 사전에 받지 못했다. 그런 이중의 '소외'가 생생하게 묻어난다.

양동민 감독의 <콜센터 노동자의 봄날>은 한국장학재단에 카메라를 비춘다. 학창시절 학자금 대출을 경험한 이들이라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바로 그곳이다. 현재 재단 본사는 대구에 있다. 카메라는 2022년 3월, 4개월이 넘어가던 본사 앞 천막농성과 그 연장선상에서 진행된 열흘간의 로비농성 현장으로 시선을 이끈다. 농성하는 이들은 대출을 신청해야하는 학생들이 부대끼는 콜센터 상담원 노동자들이다. 민주노총 서비스연맹 서비스일반노조 한국장학재단 콜센터지회 소속이다.

이들의 주요 요구는 비정규직 정규직화와 민간위탁 폐지 내용이다. 콜센터 상담원이 비정규직인 경우는 허다하다. 몇 해 전 논란이 되었던 서울 다산콜센터 정도가 직접고용이 이뤄진 상태다. 한국장학재단은 거기에 추가로 민간위탁, 그것도 3개 업체로 나누어진 도급계약 형태다. 누구나 직고용에 비해 이들의 조건과 처우가 낮을 것을 직감한다. 실제로 이들과 다산콜 상담 노동자들 월 급여는 100만 원 차이가 난다고 한다.

문재인 정부의 공공부문 정규직 전환에 대한 기대는 재단 내부 심의위 결정에 따라 증발했고 코로나 이후 노동 강도는 높아졌지만 안전대책은 미흡했다. 정규직원이 아니기 때문이다. 2020년부터 지속적으로 처우개선과 직고용 요구 투쟁을 이어갔지만 재단은 직접 책임질 게 없다며 외면한다. 그 가장 최근 투쟁이 이 단편에 담겼다. 직고용이 아니기에 재단은 불법 점거 꼬리표를 붙인다. 그저 로비 한구석 차지하고 면담과 교섭을 요구할 따름이지만 이들은 한 번 밖으로 나가면 다시 못 들어오는 처지라 점거는커녕 오히려 감금에 가까운 신세다.

몸이 아파 부득이하게 건물을 나가야 하는 조합원은 동료들과 부둥켜안고 오열한다. 고립된 이들에게 봄바람 순례단의 방문은 큰 도움은 못되지만 그래도 그저 반갑기만 하다. 상담원들의 사연을 가사로 만든 인디가요 선율과 함께 농성장 풍경과 인터뷰가 교대로 이어지면서 그들의 노동 현실과 소박한 꿈들이 봄날에 걸맞게 흘러나와 더 처연하게 들린다. 이후 재단 이사장과 면담 진행 후 로비에서 철수했지만 전향적 조치는 없었다. 재단은 업무방해를 이유로 조합원들을 고발한 상태다. '민주진보'교수가 이사장인 공공기관의 현재다.

2_3. '있다, 잇다'
 
▲ "봄바람 프로젝트"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봄바람 프로젝트
 
이번에는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 야생동물들의 권리를 옹호하는 기획이다. 각자의 투쟁을 소개하는 것을 넘어 각개 고립 분산되기 쉬운 '마이너리티'들의 연대를 횡단하려는 의도가 진하다.

김현석, 정원석 공동감독의 <걔의 혐오스러운 하루>는 이번 옴니버스 수록작품 중 드문 시도인 재연극 형식을 취한다. 가상의 혐오세력과 성소수자 활동가 간의 언쟁을 블랙 코미디로 풀어냈다. 이를 통해 광범위하게 떠도는 차별금지법에 대한 매도 상황과 함께 토론을 위한 공론장이 협소화된 지형, 그리고 현장에서 뛰어야 하는 활동가의 고충이 골고루 소개된다.

<이어 말하기>는 제목처럼 지난 정부 5년의 결과로 새 정부 5년이 탄생해버린 상황에 대한 여성주의 활동가의 '말'로 채워지는 단편이다. <가현이들>과 <바운더리>를 통해 감독 자신이 속한 2030세대의 '알바'로 상징되는 불안정노동 현실과 여성주의 활동가 그룹의 작은 역사를 소개해온 윤가현 감독은 '백래시'가 밀어닥치는 시기에 어떻게 지난 5년을 평가하고 향후 5년을 견뎌낼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감독의 전작에서 다뤘던 '불꽃페미액션' 활동가의 입을 통해 전한다.

감독의 카메라는 4. 16.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 진행된 여성가족부 폐지 반대와 성 평등 요구 집회 현장을 꽉 채운 뒤 마이크를 잡고 발언하던 활동가와의 인터뷰로 전환된다. '불꽃페미액션' 활동가 한솔은 지난 5년간의 배반당한 시간과 백래시 전성시대를 찬찬히 해설한다. 문재인 정부에 대해 느꼈던 환멸과 미련, 그리고 윤석열 정부 탄생이 가지는 위기적 '징후'에 대해 진단이 이어진다. 담담한 톤이지만 적지 않은 이들이 공유할 회한과 혼란이 잘 간추려졌다. 물론 가야할 길이니 가늘고 길게 계속 갈 것이라는 결의로 끝난다.

<지리산 동물 이야기>는 경남과 전남의 경계지역인 하동에 정착한 영상 활동가 감자의 이야기다. 그는 지역개발 명분으로 산악열차와 케이블카 공사를 강행하려는 지자체 논리에 대해 반대하며 직접 활동가로서 농성과 투쟁을 펼치는 상황을 기록한다. 개발논리를 반박하는 셀프 인터뷰와 함께 타임-랩스 카메라로 촬영된, 우리는 인식하지 못하지만 엄연히 지리산의 주민이라 할 다양한 야생동물들의 존재를 교차해 소개한다. 그들의 목소리는 왜 반영되지 못하는가에 대한 문제제기의 확장성을 선보이는 에피소드다.

박명훈 감독의 <마도로스>는 아마 이 옴니버스 단편 중에서 가장 유명인사가 출연하는 에피소드일 테다. 대선 국면을 장식했던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서울지하철 출근길 시위의 '아이콘', 박경석 전장연 대표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박경석 대표와의 인터뷰와 지하철 시위 영상을 조합해 왜 장애인단체가 그렇게 욕먹어가면서도 시위에 나서는지 설명을 듣는 시간이다.

2_4. '기억 투쟁'
 
▲ "봄바람 프로젝트"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봄바람 프로젝트
 
이번 조합은 사회적 재난에 대한 기억과 환기의 시간이다.

세월호 관련 지속적으로 영상 활동가들의 작업을 견인해온 '다큐인' 소속 안창규 감독은 <팽목, 기억>에서 2014년 4월 16일 사고 발생부터 어느덧 8년째가 되기 며칠 전, 봄바람 순례단의 진도 팽목항 방문을 기록한다. 세월이 흘렀음을 보여주듯 팽목항은 이름부터 진도항으로 바뀌어 있었다. 항구 한 구석 가건물에 세월호 기억관이 있다. 이곳을 고영환 팽목 기억단장이 지키며 8년 전 기억을 생생히 간직하고 있다.

고영환 단장은 이곳 상황을 브리핑한다. 항구는 이름만 변한 게 아니라 '진도 국제항'이라는 거창한 개발욕망이 추진되는 중이다. 부두 확장과 정비공사 앞에 기억관은 이제 그저 지우고픈 흔적일 뿐이다. 지자체는 기억관 수용 논의는 외면하면서 항만공사에 방해물이라는 교묘한 선전을 조장하는 중이다. 진상규명을 가로막던 천박한 배금주의는 여전히 형태를 바꿔가며 이곳을 떠돌고 있다. 카메라는 우리에게 다시금 2014년 4윌 16일에 일어난 사건의 진상을 제대로 조사해 규명하는 것이 왜 중요한지 당부하려는 듯하다.

전작 <세월>에서 한국의 여러 사회적 참사 유가족들의 활동을 소개하고 연대를 모색했던 장민경 감독은 < From. 세월호 & 스텔라데이지호 >에서도 그러한 기조를 이어나간다. 박근혜 정부 당시 대표적인 해난사고들, 여전히 실체가 규명되지도, 실종자 인양도 온전히 해결되지 못한 두 사고 유가족들의 동병상련과 연대의 순간이 화면에 펼쳐진다. 지난 5년간 제대로 해결책이 진전되지 못했다는 사실을 전하며.

노은지, 이혜주 감독이 소개하는 <코로나19의료공백 1. 정유엽군 아버지 어머니>는 전국적으로는 그다지 잘 알려지지 않은 경북 경산의 청소년 정유엽군 이야기를 다룬다. 지방 소도시에서 발생한 일이고 한창 팬데믹이 휘몰아치던 시절 사건사고가 워낙 많아 제대로 조명되지 못하고 묻힌 사건이다. 하지만 응급조치가 절실함에도 코로나19라는 미증유의 사태에 정신없던 공공의료체계가 그를 외면하면서 제대로 된 대처 없이 죽어간 정유엽군의 사례는 사건 진상 규명과 함께 정치적 진영 대결 과정에서 간과된 공공의료체계의 구멍들을 끄집어내고 사회적 논의에서 우리가 놓친 것들을 돌아보자고 권하고 있다.

2_5. '평화 연습'
 
▲ "봄바람 프로젝트"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봄바람 프로젝트
 
마지막 장에선 여전히 휴전 상태인데다 세계 4대 군사강국이 주변을 둘러싼 한반도의 전쟁과 평화를 언급하는 단편들이 자리를 차지한다. 언제든 전쟁이 터질 위기가 잠재된 나라에서 의외로 다들 무뎌진 부분에 대한 관심을 환기하게 만드는 소외된 지역들의 이야기다.

유성기업 노동자들의 장기투쟁을 기록했던 김설해 감독은 <마을, 바다, 기지>에서 국내 대표적인 미군기지 중 하나인 군산일대 군사기지 확장과정과 이로 인해 고향에서 밀려나는 주민들의 연대기를 기록한다. 주민들이 대책과 보상을 요구할 때는 외면당하다 자체 필요로 탄약고 등 확장이 필요하자 이주를 종용하는 국가주의의 오만이 드러나는 에피소드다.

김환태, 김설해, 오이 감독의 공동작업인 <평화로路>는 순례단의 평택 미군기지 평화순례 풍경을 담는다. 군산과 평택 일대에서 21세기 들어 대폭 확장되는 군 기지는 그저 북한에 대한 인계철선 역할의 보장 뿐 아니라 미국 주도의 대 중국 봉쇄전략의 핵심 전진기지화 일환으로 연동되고 있다. 앞의 에피소드에서 주로 주민들의 입장을 놓고 기지 문제를 논했다면 이번에는 관련 활동가들이 등장해 거시적 관점에서 현상에 대한 주석을 다는 연작 성격이 강하다. 짧은 단편 하나만으론 소화하기 힘든 주제에 대한 배려일 것이다.

18편의 대미를 장식하는 박영길 감독의 <소성리 국가폭력의 시간들>은 사드가 배치된 소성리 마을의 현재 상황을 보여주려는 기획이다. 이 단편에는 2개의 시간대가 교차된다. 검푸른 어둠 속에서 경찰차가 길을 질주한다. 처음에는 제목이, 그다음엔 2013년부터 시작된 미국의 고고도 방공망 체계, '사드' 배치 요구, 그리고 2017년 박근혜 정부의 사드 배치 전격수용과 경북 성주군 위치 선정, 문재인 정부 후반인 2021년 5월부터 주2회 경찰병력의 진입, 임기 말이던 2022년 2월부터 주3회로 늘어난 병력투입 과정의 10년이 자막 해설로 차례로 등장한다. 이 시간은 2017년 당시 짧은 관심 이후 외로운 싸움이 되어버린 사드 투쟁에 대한 문제제기로 작동한다.

그렇다면 지금 소성리 상황은 어떨까? 이제 두 번째 시간대가 선보여진다. 2021년 5월, 2022년 3월의 어느 하루가 반복된다. 새벽부터 대다수가 노인인 주민들과 소수의 연대활동가들이 경찰을 맞이할 준비를 한다. 마을 옆 좁은 도로로 경찰버스가 밀려들면 주민들이 길을 막고 연좌농성을 하다 끌려나오는 날이 1년째 반복되고 있다. 외로운 싸움 풍경에 당혹스러울 이들에게 강현욱 상황실장과 임순분 부녀회장 인터뷰가 조금 더 구체적으로 주민들의 고민을 5분여 분량을 통해 최대치로 풀어낸다.

고령의 주민들에겐 주2회에서 3회가 된 아침의 대결이 끝없는 수렁과도 같다. 사드는 이들에겐 끝나지 않는 원하지 않았던 불청객이다. 이들은 5년 전 어느 날 무작정 밀고 들어와 국익을 들먹이며 주인 행세 중이다. 하지만 바깥에선 누구도 자기 일로 생각하지 않는다. 물리적 수난보다 고립감이 주민들에겐 더 쓰라리다. 그간 사람들을 다독이고 격려해왔을 활동가들의 답답해하는 표정은 그들이 처한 상황을 조금이라도 더 표현하려는 절박함의 발로일 것이다.

3_'섬'과 '섬'이 모여 구성되는 한반도 투쟁지도
 

<봄바람 프로젝트>로 한데 묶인 18개의 단편 에피소드는 그 자체가 하나의 지도다. 자신이 사회운동 활동가가 아닌 다음에야 이만큼 여러 군데에서 다양한 싸움이 현재도 진행 중이라는 것을 체감하지 못했을 테다. 그런 이들에겐 옴니버스 연작을 한 바퀴 다 도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핑 돌고 현기증이 날 게 뻔하다. 하지만 본 작품에 담긴 현장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더 아득하고 아찔해지는 순간이다.

옴니버스 연작의 개별 단편들은 근래 한국 독립영화에서 잊혀져가는 전통인 현장성, 그중에서도 속보성에 전반적으로 최적화되어 있다. 심하게는 단 하루, 대개 며칠간의 촬영과 현장투쟁단위가 제공한 자료들, 그리고 해당 분야의 몇 안 되는 전문가들일 관련단체 활동가 인터뷰로 구성된 5분여 내외의 작업들은 완성도를 일정부분 희생하는 대신 시의성과 근접성을 선택한 결과물들이다. 개별 작업이 소재가 된 사안들을 소개하는 데 치중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우선 테마별로 5개 집단으로 구분해 묶어준다. 그리고 봄바람 순례단의 연대의식과 궤를 같이해 하나의 맥락이자 세계관으로 통합해내려 한다.

그런 아교풀 역할 담당은 영화의 시작과 중간 중간, 그리고 끝에 마련된 브리지 영상들과 함께 문정현 신부를 비롯해 인터뷰에 나선 활동가들이 책임지고 소화해주는 구성이다. 한국사회의 근본적-급진적 변화와 민중생존권 요구의 최전선이 <봄바람 프로젝트>에 집대성된 셈이다. 이제는 시민사회에서 한 구석에 유배된 듯 소외된 것처럼 보이던 체제 변혁적 사회운동의 기운이 이 작품에서만은 펄떡펄떡 분출되고 있다.

작품 속 어떤 주장은 설익어 뵈고, 특정 구호는 썩 동의되기 어렵고, 누군가의 인터뷰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기엔 평소 고민이 짧아서 배경지식부터 새로 쌓아나가야 할 판이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이제 무얼 해야 할지 멍하고 혼란스러운 이때 장기적 지구전을 각오하고 고립된 투쟁의 섬들이 존재함을 부각시키고, 서로의 연대를 도모하려는 실천의지는 새로운 마중물의 가능성을 감추고 있다. 이런 희망과 대안의 씨앗을 확인해주는 기록 자료로서 본 프로젝트의 가치는 독립영화의 한 영역이건 사회운동의 대안 모색과정으로건 일독할 가치가 있다.

현재 완성된 옴니버스 영화는 지역별 공동체 상영을 위주로 관심 있는 이들을 만나는 중이다. 이제는 상당부분 유실된 과거 독립영화의 배급형태를 충실히 따라가는 셈이다. 여기에 온라인 공간을 활용해 퍼블릭 엑세스 가치를 추구하는 시도로 유튜브 채널에 순차적으로 단편들을 게시하는 중이다. 이제는 결코 독립영화에서도 중심적인 흐름은 아닐지언정, 소중한 가치의 계승과 발전은 여전히 소중한 의미로 유지되어야 할 것이다.
 
<작품정보>
봄바람 프로젝트 - 여기, 우리가 있다 Spring Wind Project - We are here
2022|한국|다큐멘터리, 옴니버스|114분
감독 김선구, 김설해, 김성은, 김현석, 김환태, 노은지, 박명훈,
박배일, 박상헌, 박영길, 박배일, 배혜원, 신효진, 안창규,
양동민, 오이, 윤가현, 이마리오, 이혜주, 장민경, 정원석, 하샛별
(이상 <다른 세상을 잇는 현장 미디어 프로젝트 '봄바람'> 21명)
기획 김설해
연출 김환태
PD 김설해, 김환태인터뷰 출연 오두희, 문정현, 딸기, 선지현
 
※ 작품 관련 추가정보
◆ 봄바람 프로젝트 트레일러 (봄바람 유튜브 채널) https://youtu.be/v99-rwKVtlA
◆ 봄바람 프로젝트 작품소개 https://bit.ly/3NZFVpM
◆ 봄바람 상영회 개최 신청 https://forms.gle/1yCdTMixTX7SesdD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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