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로화가 달러보다 싸진다..러시아 옆 유럽은 "가장 약한 고리"
미국 달러 대비 유로화 가치가 20년 만에 최저로 떨어졌다. 에너지 위기와 공급망 문제로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 경제가 침체할 우려가 커지면서 '1유로=1달러'에 가까워지고 있다.
5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거래에서 유로화 가치는 1.8% 내린 1.0235달러까지 떨어졌다. 2002년 12월 이후 최저치다.
각국이 경기 침체를 우려하고 있지만 유럽은 러시아에 대한 에너지 의존도가 높아 상대적으로 더 취약한 상황이다.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에 가한 제재 여파로 유럽으로 갈 천연가스가 차단될 가능성이 커졌다. 에너지 공급난으로 인한 유럽 내 산업과 경제 활동이 둔화될 수 있다는 예측은 통화 가치를 누르는 요인이 됐다.
러시아는 11일부터 독일로 가는 천연가스관을 닫는다고 예고했다. 정비를 위한 일시중단이라고 했으나 유럽 국가들을 길들이기 위한 조치란 해석이 우세하다. 러시아는 지난달 이미 설비 수리 지연을 이유로 가스관을 통해 독일로 보내는 천연가스를 60% 줄였다.
이에 더해 노르웨이의 가스전 노동자들이 파업을 시작하면서 유전·가스전 3곳마저 멈췄다. 노르웨이 원유·천연가스협회(NOG)에 따르면 파업으로 6일 가스 생산이 평일 수출량의 13% 가까이 감소한다.
러시아 다음으로 유럽에 에너지를 가장 많이 공급하는 노르웨이의 파업 소식에 영국 가스 도매가는 이날 16% 뛰었다. 유럽 천연가스 선물가격은 5일 메가와트시(㎿h)당 175유로로 지난 3월 초 이후 넉 달 만에 최고치를 경신했다.
러시아의 가스 수송 중단으로 유로가 1달러 아래로 내려갈 수 있다는 경고도 나온다. 노무라증권 애널리스트들은 "8월이면 유로가 0.98달러로 내려가 0.95달러까지 위협받을 리스크가 있다고 더욱 확신하고 있다"고 내다봤다.
반면 유가는 급속도로 떨어지고 있다. 경기 침체가 에너지 수요를 위축시킬 거란 전망에서다. 원자재 트레이딩업체 리터부시앤드어소시에이츠는 이날 "경기 침체 가능성이 커지면서 유가에 하방 압력이 가해지고 있다"며 "석유 시장은 최근 휘발유와 디젤 수요의 명백한 약세를 반영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가스 공급이 원활하지 않을 것이란 예측은 가스값을 끌어올렸고, 이러한 에너지 공급난이 경기 침체를 부를 거란 우려는 유가를 끌어내리는 정반대의 상황이 동시에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일단 공급난 문제 등은 유럽 경제대국 독일에 31년 만의 첫 월간 무역적자를 안겼다. 인플레이션과 공급망 문제, 우크라이나 전쟁 리스크 등이 주요인이다. 앞서 4일 독일 연방통계청은 6월 무역수지가 약 10억 유로(1조3500억 원) 규모의 적자를 기록했다고 밝혔다. 독일이 무역적자를 기록한 것은 독일 통일 이듬해인 1991년 이후 처음이다.
볼커 트라이거 독일 상공회의소 대외무역 책임은 "수출 업체들이 공급망 문제로 인한 비용 증가를 전 세계 고객들에게 전가하기 어려워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반면 5월 독일의 에너지·식품·부품 등의 수입액은 전년 동월 대비 30% 이상 급증했다. 독일의 대규모 제조 기반이 흔들리면 유로화 가치에 가해지는 위협이 더 커질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조 퀸란 미국 프라이빗 뱅킹(Bank of America Private Bank) 시장 전략책임자는 "유럽은 세계 경제에서 가장 약한 고리다. 유럽은 전쟁과 에너지 위기의 교차선에 놓였다"고 설명했다.
유로화 가치 하락은 19개 회원국 내 수입 가격을 높여 가뜩이나 심한 인플레이션을 더 악화시킬 수 있다. 유로존 6월 소비자물가는 전년보다 8.6% 뛰어 블록 출범 후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다. 유로존의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유럽중앙은행(ECB)의 중기 물가 관리 목표치인 2%를 크게 상회하고 있다.
이에 유럽중앙은행(ECB)은 이달 11년 만에 처음으로 기준금리 인상을 예고했다. 금리 인상은 경기에 찬물을 더 끼얹을 수 있다. ECB는 금리를 0.25%포인트(p) 올리고 연말까지 1.35%p 인상할 것으로 전망된다. 하지만 이는 3주 전 시장에서 연말까지 예상했던 인상폭 1.90%p에 비해선 낮다.
이처럼 ECB가 미국만큼 적극적인 긴축에 나서기 힘들다는 전망은 유로 가치를 더 끌어내릴 수 있다. 미국 금리와의 격차가 더 커지기 때문이다. ECB로선 진퇴양난의 상황이다. 실제 ECB가 미국 중앙은행 연방준비제도(연준)만큼 빠르게 금리를 올리지 못하고 뒤처질 거란 예상 때문에 유로는 올해 고점 1.15달러에서 10% 추락한 상태다. 블룸버그의 옵션가격 모델에 따르면 유로가 올 연말 달러와 패리티(1:1)로 밀릴 확률은 60%에 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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