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 "서방과는 관계 단절, 비서방 국가들과 새 국제질서 만들겠다"
[박인규 편집인(=번역·정리)(inkyu@pressian.com)]
지난 6월 말 서방은 나토 정상회담 및 G7 정상회담 등을 통해 우크라이나전쟁 이후의 국제정세에 대한 대응 방침을 천명했고 중국 러시아 인도 브라질 남아공 등 브릭스(BRICS) 5개국 정상들은 베이징 화상 회담을 통해 서방의 경제 지배를 벗어나 각국의 경제 자립을 보장하는 새로운 다극적 세계 질서의 창출을 다짐했다. 이로써 세계는 두 경제 진영 간의 기나긴 투쟁의 장으로 진입하게 됐다.
다음은 이러한 국제 정세 속에서 러시아의 대외 전략 입장을 보여주는 글이다. 냉전 종식 이후 러시아는 서방의 일원으로, 특히 유럽 열강의 일원으로 자리매김하길 원했으나 결국 실패했고, 앞으로는 중국, 인도 등 비서방 국가들과의 협력을 통해 새로운 세계 질서를 창출하겠다는 것이다.
아마도 새로운 세계 질서는 앞으로 수 년 이상 지속될 것으로 보이는 우크라이나전쟁의 결과에 의해 좌우될 것이다. 그러나 50년 전, 미중 화해를 통해 유라시아의 두 강대국 소련과 중국을 분리해냄으로써 냉전을 승리로 이끌었던 미국이 우크라이나전쟁을 계기로 두 나라를 하나로 뭉치게 해놓고도 과연 또 다시 승리를 거둘 수 있을지는 두고 볼 일이다.
이 글은 러시아의 입장을 대변하는 러시아투데이(rt.com) 7월 4일자에 "Russia has made a decisive break with the West and is ready to help shape a new world order"란 제목으로 실렸으며 필자 드미트리 트레닌은 '러시아 대외관계협의회'의 회원이다.
지난 6월 말 독일 바바리아에서 열린 G7 정상회담이 폐막되기 직전에 중국 베이징에서는 브릭스(BRICS) 5개국 정상의 화상회담이 열렸다. 러시아는 G7 회담에서 서방 최대의 직접적 위협으로 지목됐으나, 브릭스 회담에는 당사자의 일원으로 참가했다.
러시아가 서방과 비서방의 경계를 오갔던 시절은 오래 전에 지나갔다. 2014년 우크라이나 위기를 계기로 당시까지 서방의 전략적 파트너로 대접받던 러시아는 G8에서 쫓겨났고, G8은 다시 G7이 됐다. 나아가 지난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작전으로 러시아와 서방의 대결은, 비록 대리전이기는 하나, 전면적인 전쟁(hybrid war)으로 비화됐다.
냉전 종식 이후 러시아는 새로운 서방의 일원이 되고자 했으나 결국 실패했고, 이제는 아시아, 중동, 중남미, 아프리카와의 관계 강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것은 어렵지만 해내야만 하는 과제이다. 첫째, 과거로부터의 강력한 관성이 있다. 18세기 표트르 대제 시기부터 러시아 엘리트들은 서방(유럽)을 동경했고, 이에 따라 서방식 의복과 행동방식(물론 러시아적 특성을 간직하긴 했지만)을 채택했고, 서방식 제도(비록 표피적이긴 했으나)를 도입했으며, 서방식 사고방식을 받아들였고(마르크시즘의 경우처럼 창조적 발전을 이룬 경우도 있다), 유럽 열강의 일원이 되고자 했다. 그리고 소련 시절에는 미국과 어깨를 겨누는 초강대국의 하나였으며, 그 후에는 리스본에서 블라디보스토크에 이르는 대유럽의 핵심 국가 중 하나였다.
이러한 역사적 경로를 벗어나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현재 러시아는 역사상 처음으로 하나로 뭉친 서방, 즉 미국과 캐나다, 유럽연합, 일본 및 호주 등의 연합세력과 대결하고 있다. 게다가 서방에는 이제 러시아가 기댈 수 있는 세력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 명목상 중립국이었던 핀란드와 스웨덴, 오스트리아, 스위스 등도 이제 중립을 포기했다. 이로써 러시아와 서방 간의 정치적 균열은 완성됐고, 러시아-서방의 새로운 관계는 앞으로 최소한 수년이 걸릴 우크라이나전쟁의 결과에 따라 그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둘째, 그동안 러시아의 경제 관계는 주로 서방과의 교류에 의해 형성돼 왔다. 역사적으로 러시아는 서유럽에 자원과 식량을 공급했고, 서유럽으로부터 공산품과 기술 등을 수입했다. 러시아의 대외 무역 중 절반 이상이 유럽연합과의 거래였으며, 특히 독일은 러시아에 대한 기계 및 기술 수출의 선도 국가였다. 1970년대 이후 러시아에서 서유럽에 이르는 석유 및 가스 파이프라인은 양측 경제 관계의 중추였으며, 냉전 시절의 위험한 대치상황이나 소련 붕괴 이후의 혼란 속에서도 유럽 대륙의 안정을 보장하는 안전장치였다. 이것 또한 이제는 사라졌다.
미국과 유럽연합, 영국이 러시아에 부과한 가혹한 경제제재는 전쟁이 끝나기 전에는 풀리지 않을 것이다. 또한 막대한 외환준비금 압류 및 국제은행결제시스템 퇴출 등의 쓰라린 경험은 앞으로 러시아가 서방과의 경제 관계를 복원하는 데 중대한 지침으로 작용할 것이다.
셋째, 문화적으로 러시아는 언제나 스스로를 유럽의 일원으로 생각해 왔다. 기독교, 그리스로마 문명, 프랑스 계몽사상과 독일 철학, 그리고 유럽의 문학과 미술, 음악, 무용 등은 러시아의 독자적 문화를 형성하는 원천이 됐고 러시아의 자기 발전을 위한 강력한 자극제였다. 최근의 정치적 균열과 지경학적(geo-economic) 변화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문화의 기반은 분명히 유럽적인 것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그러나 최근 서방의 문화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변화들, 특히 개인의 자기표현에 대한 과도한 숭배, 점점 더 억압적으로 변해가는 자유주의의 폭주, 가족 가치의 잠식, 성적 취향의 다양화 등은 보다 전통적 문화를 고수하는 러시아의 대다수 국민들에게 충격을 주고 있다.
그러나 어쨌든 러시아는 이제 서방을 넘어 다른 대안을 찾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했고, 이에 따라 위에 말한 역사적 관성, 이전 지경학적 우선순위의 유산, 문화적 친밀성 등을 극복해야만 할 것이다. 서방이 러시아를 경원하고, 고립시키려 하며 나아가 '제거'까지 하려는 마당에 러시아는 과거의 오랜 습관을 버리고 서유럽 및 북미를 넘어 보다 넓은 세계를 향해 손을 내미는 것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다. 사실 이는 서방과의 관계가 지금보다 훨씬 덜 적대적이었던 과거부터 역대 러시아 지도자들이 반복적으로 다짐해 왔던 과제였다. 이러한 다짐이 현실적으로 실행되지 못한 것은 우선 러시아인들의 유럽 지향적 사고방식, 서방과의 경제 관계가 개선될 것 같은 상황 전개, 그리고 무엇보다 서방의 일원으로 인정받고 싶다는 기대 때문이었다.
결국 사람들은 다른 모든 선택 가능성이 사라졌을 때, 비로소 옳은 길을 따라 나서기 마련이다. 서방에 굴복하는 것은 분명 러시아의 선택지가 될 수 없다. 이제 상황은 돌이킬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러시아의 대외 관계를 전면적으로 쇄신하는 것을 넘어 진정 추구해야만 할 기회들이 있다. 냉전이 끝난 이후 아시아와 중동, 아프리카와 중동의 주도적 국가들은 경제와 정치, 기술과 군사적 측면 모두에서 놀랄 만한 성장을 이루었다.
이미 이번 전쟁이 일어나기 이전에 중국은 독일을 제치고 러시아의 최대 교역국으로 떠올랐으며, 기계 및 공장 설비 수출에서도 1위를 기록하고 있다. 과거 소련 시절부터 전통적으로 러시아 무기의 수입국이었던 인도는 이제 러시아의 핵심 기술 파트너로 떠오르고 있다. 사우디 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는 OPEC+의 일원으로서 러시아와 함께 석유 생산 계획의 주요 파트너로 활동하고 있다. 터키와 이란은 핵심 전략 지역의 주요한 독립적 행위자들이다. 비서방 국가의 거의 대부분이-미국의 강력한 압력에도 불구하고-우크라이나전쟁과 관련해 러시아 비판에 동참하지 않은 것은 특히 고무적인 일이다. 러시아를 비판하지 않은 것은 러시아와 함께 할 수 있다는 의미로도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인도네시아에서 브라질까지, 아르헨티나에서 남아공까지 지구상에는 러시아가 함께 하고 싶은 역동적이고 야심찬 나라들이 많이 있다.
이러한 협력이 가능케 하기 위해서 러시아는 적절한 대외 전략을 마련하고 구사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앞으로는 대외 전략의 우선순위를 이미 동결 상태에 들어간 서방이 아니라 비서방 국가에 두어야 할 것이다. 주이탈리아 대사보다는 주인도네시아 대사가, 오스트리아 비엔나보다는 우즈베키스탄 타시켄트가 더 중요해져야 한다.
러시아와 브릭스 국가들 사이의 경제 및 기타 부문에서의 협력 가능성을 모색하고 실천해야 한다. 학생 및 관광 교류도 확대돼야 한다. 러시아 언론은 주요한 비서방 국가들에 대한 보도를 늘려야 하며, 이를 통해 이들 비서방 국가의 경제, 정치, 문화적 현실을 러시아의 지도층 및 일반 국민들에게 널리 알려야 한다.
[박인규 편집인(=번역·정리)(inkyu@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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