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탄 바이러스' 첫 발견 이호왕 교수 별세
유행성출혈열 원인 바이러스
한탄강 유역서 발견해 이름 붙여
예방 백신 '한타박스'도 개발
현지 조사하다 간첩 오인받기도
노벨의학상 예측 후보에도 올라
6·25전쟁이 한창이던 때였다. 강원도 철원과 경기도 포천 일대에서 미군 장병 3000여 명이 원인을 알 수 없는 질환에 걸려 피를 쏟고 쓰러졌다. 그중 수백명은 목숨을 잃었다. 당시 북한군과 중공군의 사망자 수는 밝혀지지 않았는데, 파죽지세로 남하하던 중공군이 한강 이남 지역으로 넘어오지 못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병영 안에 괴질이 돌아서’였다. 피해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미군과 중공군은 이를 상대가 만든 생물학 무기라 여기고 세균전을 의심했다. 그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1976년, 드디어 원인이 밝혀졌다. 주인공은 한국인 미생물학자. 우리나라에 아주 흔한 등줄쥐에게서 나온 바이러스가 ‘한국형 출혈열’, 이른바 세계인의 목숨을 앗아간 유행성출혈열의 원인임을 밝혀내고, 그 지역을 흐르는 한탄강을 따서 ‘한탄 바이러스(Hantaan Virus)’라고 이름 붙였다.
원인 모를 질병의 근원을 규명해 수많은 이들의 생명을 구한 이호왕(94) 고려대 명예교수가 5일 숙환으로 별세했다.
1928년 함경남도 신흥에서 태어난 그는 함흥의대를 다니다 월남해 1954년 서울대 의대를 졸업했다. 1954~1956년 육군 중위로 복무한 후 정부 지원을 받고 미국으로 건너가 1959년 미네소타주립대 미생물학과에서 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당시는 어린아이들이 대부분 걸리는 일본뇌염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무서운 병이었다. “과학을 전공하는 사람은 연구할 때 목적이 있어야 한다. 나는 사회가 필요로 하는 연구를 하겠다”고 다짐한 그는 1959년 한국으로 돌아와서도 일본뇌염 연구를 계속했다.
그러나 1969년 일본뇌염 백신이 개발되면서 그는 연구 주제를 유행성출혈열로 바꿨다. 사실 유행성출혈열은 1930년대 말~1940년대 초 만주와 러시아에도 있었다. 그때 러시아군과 일본군에서 1만여 명 환자가 발생했기 때문에 일본의 악명 높은 731 부대에서도 이 병을 연구했고, 러시아에서는 형무소 죄수들을 상대로 인체 실험을 했다. 미국이 노벨상을 받은 박사 2명을 포함해 연구자 230여 명을 한국으로 데려와 연구했으나 여전히 이유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1969년 미 육군부 지원을 받아 유행성출혈열 연구에 돌입했다.
한탄 바이러스는 한국인이 발견한 최초의 병원성 미생물이다. 이 업적은 현재 모든 의학, 생물학 교과서에 수록돼 있다. 그는 생전 인터뷰에서 “연구를 시작하고 한탄강 유역 군부대 주변에서 들쥐를 사냥하다가 무장간첩으로 오인돼 경고사격을 받고, 동료 연구원이 감염돼 죽음의 문턱까지 가는 등 위기와 실패가 많았다”고 했다. 1981년 서울 마포구 한 건물에서 잡은 집쥐에게서 한탄 바이러스 친척뻘 되는 ‘서울 바이러스’도 찾아냈다. 1989년에는 국내 제약사 녹십자 후원을 받아 한탄 바이러스 예방 백신인 ‘한타박스’도 개발했다. 이러한 공로로 지난해엔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 예측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미 국방부 산하 육군성에서 주는 ‘최고시민공로훈장’을 수상했고, 대한민국학술원장과 고대 의과대학장, 세계보건기구(WHO) 유행성출혈열연구협력센터 소장 등을 지냈다. 그는 연구자로서 성공할 수 있었던 공을 ‘포기하지 않는 유전자’에 돌렸다. “실패해도 또 하고 또 하고 그래야 하는데, 내 유전자는 실패를 해도 싫다는 생각이 안 나고 피곤하지도 않아 하는 유전자인 것 같다”는 것이다. 유족으로 아내 김은숙씨와 아들 이성일 성균관대 공대 교수, 이근 한국국제교류재단 이사장이 있다. 빈소는 고려대 안암병원, 발인은 7일 오전 11시 50분이다. (070)7816-0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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