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력 평가' 공동전선 균열..진보 교육감들이 달라진다
(시사저널=이상욱 영남본부 기자)
진보 성향으로 분류되는 교육감들이 지난 1일 취임하면서 '학력 평가' 정책을 적극적으로 도입한다고 밝혀 교육계를 놀라게 했다. 과거 진보 교육감들이 학력 평가에 소극적이었던 것과는 달라진 행보다. 4년 전만 해도 17개 시·도 교육감 중 14곳을 장악하면서 '지역·학교 줄 세우기'라며 학력 평가를 반대해왔다.
하지만 코로나19 바이러스가 그들의 발목을 잡았다. 학교는 문 닫았고, 학생들은 컴퓨터 모니터로만 선생님을 만났다. 이는 전반적인 학력 저하로 이어졌다. 교육부가 발표한 '2020년 국가 수준 학업 성취도 평가'를 보면, 학력 우수자는 줄었다. 반면, 기초학력 미달 학생은 늘었다. 2012년엔 중3과 고2의 수학 과목 기초학력 미달 비율이 각각 3.5% 4.3%였는데, 2020년에는 각각 13.4% 13.5%로 크게 증가했다. 기본 연산을 못 하고, 기초 영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학생이 많은 셈이다. 경남 창원의 한 일반고 교사는 "기초학력이 부진해 다음 단계 학습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등 학습 결손이 쌓인다"고 했다.
코로나 팬데믹이라는 초유의 위기를 맞아 '전수 학력 평가 반대' '혁신학교 확대' 등 공동 대응 전선을 펼쳐온 진보 성향 교육감 사이에 변화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일부 진보 성향 교육감은 "학교 간 경쟁을 유발할 것"이라며 전수 학력 평가를 도입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지만, 몇몇 교육감은 늘어나는 기초학력 미달 현상을 우려한 나머지 학력 평가에 나설 전망이다.
"기초학력 미달 현상 우려"…학력 평가에 나설 전망
진보 성향으로 분류되는 서거석 전북교육감은 지난 1일 취임하면서 "학력을 키우는 것이야말로 학생의 본분이자, 학교의 존재 이유"라며 "기초·기본학력 확실히 책임지겠다. 전북 학생의 학력을 전국 상위권으로 끌어 올리겠다"고 밝혔다. 서 교육감은 초등학교 3학년부터 주기적으로 진단 평가를 실시해 학생들 학력을 파악하겠다고 강조했다. 그는 "학력을 말하면 마치 참교육이 아닌 것처럼 매도하는 것은 큰 잘못"이라며 "담임 교사와 학부모, 학생 본인은 성적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학력 신장이라는 현실적 요구를 수용한 입장이다.
다른 진보 성향 교육감도 속속 학력 평가에 나서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특히 호남지역 시·도교육감들은 기초학력 저하를 막기 위한 진단·평가 강화를 공언했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해직 교사 출신인 김대중 전남교육감은 진단 평가를 확대하겠다고 했다. 김 교육감은 "수능 대응을 위해 중학생들부터 학습력을 높이고, 전체 학생이 참가하는 학력 평가도 고려하고 있다"고 했다. 이정선 광주교육감도 기초학력 진단 평가를 시행하고, 학습 이력 관리 시스템 등으로 성장단계별 맞춤형 지원을 하겠다고 밝혔다.
이처럼 시험을 강화하려는 시·도 교육감의 움직임은 윤석열 정부의 국정 기조와 맞물려 힘을 받고 있다. 윤 대통령은 앞서 대선 공약으로 모든 학생의 학력을 진단·평가해 빅데이터를 구축하고, 맞춤형 학습을 지원하겠다고 했다. 또 기초학력 미달 학생을 완전히 없애고, 전반적인 학력을 높이겠다고 했다. 그 결과 대통령직인수위원회의 국정과제에 '학력진단시스템 지원'이란 내용이 포함됐다.
교육감들은 전반적인 학력 저하 현상에 맞춰 평가체계 재정비가 필요하다는 점에는 동의한다. 그러나 석차 공개나 전수 학력 평가 같은 대책이 효과적인지에 대해선 의문을 표하고 있다. 박종훈 경남교육감은 본지와 서면 인터뷰에서 "교과의 내용 지식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미래사회에 필요한 역량을 신장하고 학생의 성장을 돕는 역량 중심 교육과정 체제에서 평가 결과를 중시하는 일제고사 형태의 전수 학력 평가는 교육의 본질이 훼손될 우려가 있다"고 밝혔다. 과거 전수 평가가 시행됐으나, 학교 간 지나친 경쟁 유발과 서열화로 인해 2017년부터 3% 표집평가가 실시되고 있음을 뒷받침했다.
학력 진단 체제 정비 요구 분출
교육 전문가들은 기초학력 미달 학생을 없애고 전반적인 학력을 높이려면 학력 진단 체제부터 정비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우선 기초학력 진단 평가다. 정부는 올해 3월 기초학력보장법을 시행하면서 기초학력 진단 평가를 강제할 수 있는 법적 기반을 갖췄다. 문제는 이 법이 기초학력 보장을 국가 책임으로 규정하면서도 기초학력 미달 학생을 찾기 위한 '기초학력진단검사'의 세부적인 방법을 교육감이 정할 수 있도록 규정하면서다. 만약 시·도마다 기초학력 진단이 '제각각' 이뤄지게 되면 교육부가 이런 상황에 대해 제동을 걸 수 있는 법적 근거는 마땅히 없는 셈이다. 경남교총 관계자는 "기초학력 진단 평가는 모든 학생을 진단하는 체제가 아니다. 교육감이 원하지 않으면 학생은 학력 진단을 못 받는다"고 설명했다.
다른 하나는 국가 수준 학업 성취도 평가다. 이는 중3과 고2를 대상으로 국어·영어·수학 과목의 교육 과정상 학습 목표를 얼마나 달성했는지 평가한다. 하지만 이 평가에는 맹점이 있다. 전체의 3%만 표집해 평가하기 때문에 평가에서 제외된 나머지 학생은 자신의 학력 수준을 알 수 없다. 교사들이 잘 가르치고 있는지 진단하기 어렵고, 교육적 관심을 더 기울여야 할 집단을 가려내기 쉽지 않은 건 바로 이 때문이다.
결국 학생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선 객관적인 평가가 꼭 필요하다는 게 최근 교육계의 큰 흐름이다. 경남교총 관계자는 "6·1 지방선거 이후 모든 학생이 학업 성취도 평가를 받아 자신의 학력 수준을 알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교육 현장의 바람이 커졌다"고 했다. 지금처럼 정해진 날 딱 한 번이 아니라 부담 없이 여러 번 평가해서 학력이 얼마나 향상됐는지 스스로 점검하는 자기 주도적 평가 체제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는 의미다. 경남 창원의 한 일반고 교장은 "평가에 대한 편견으로 학생의 학업 성취 평가를 막는 건 교육자로서 책임을 저버린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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