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든 탑은 무너지지 않는다[지역아동센터 쌤들의 기분 좋은 상상]
3월 중순 봄이 왔다는 설렘에 얇게 차려입은 옷 탓일까. 씨실과 날실 틈으로 봄바람이 살갗에 닿는다. 차갑다. 센터로 출근하는 첫날이다. 눈이 크고 얼굴 가득 옅은 미소를 띠고 있는 아동이 시야에 들어왔다. 초등학교 2학년 홍길순(가명)이다.
“길순아, 만나서 반가워.”
나의 인사에 길순이는 대답이 없다. 센터 안에서 길순이의 몸과 생각은 ‘따로국밥’이다. 몸은 학습실 안에 있는데, 생각은 문을 열고 나가 널을 뛴다. 집중할 수 있고 흥미를 끌 만한 무엇인가가 필요했다. 미리 준비해 온 할리갈리 포장을 뜯고 종을 가운데 놓았다. 카드를 나누어 갖고 게임을 시작했다. 첫 게임은 나의 승리다. 내가 합이 5가 되는 산수를 모를 리가 없다. 하지만 그 게임 후로 나는 할리갈리 시합에서 길순이에게 항상 패배의 고배를 마셨다. “선생님은 보드게임도 못 해”라며, 할리갈리를 마칠 때마다 환호성을 지르며 환하게 웃어주는 길순이의 모습이 계속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흥미 유발에 성공한 듯해서 학습을 시작했다. 지루한 듯 하품을 한다. 큰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린다. 이젠 공부를 안 하겠다는 시위인지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고 칠판 주변을 서성이다가 학습실 밖으로 나갔다 들어왔다를 반복한다. 이제는 수업 중 가끔 일어서기는 하지만 30분 이상 의자에 앉아 튼튼 국어 낱말을 사용해 날개 책을 만들고, 튼튼 수학 연산이 제시된 말판의 결과값을 구한 후 신나게 빙고를 완성하고, 3빙고와 4빙고를 외친다. 대각선의 개념을 몰라서 사선으로 줄을 긋고 빙고를 하나 더 성공했다고, 이것 좀 봐 달라고, 연신 선을 긋고 그 위에 계속 진하게 선을 긋는다.
길순이가 말을 걸어온다. “뭐라고?” 길순이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길순이가 하는 말이 정확하게 들리지 않았다. ‘마스크 때문이겠지’라며 상황에 비추어 짐작하고 대답하기가 일상이 됐다. 읽기 사전검사에서 이야기 글을 웅얼웅얼 얼버무리면서 읽었고, 정확하게 읽어 낸 음절 수가 많지 않았다. 길순이의 읽기 능력에 문제가 있음을 눈치는 채고 있었지만 너무 막막했다.
‘원인이 무엇일까? 발음기관에 이상이 있나? 다문화 가정이라 한국말에 대한 노출 횟수가 부족해서일까?’
다시 확인하고 싶어 동화책을 읽게 했다. 아마도 ‘부정확한 발음을 숨기기 위해 빠르게 읽나’라고 생각할 정도로 숨도 쉬지 않고 읽어 내려갔다. 길순이는 성대를 울려 밖으로 내뱉지를 못 했다. 그날 이후 나는 자음자, 모음자, 낱말, 문장, 이야기 글 등 눈에 띄는 것은 닥치는 대로 모두 읽어줬다. 시간이 흐르고 어느 날, 내 귀를 의심했다. 선생님 목이 아플까 걱정인지, 읽기에 자신감이 생겼는지, “선생님, 여기는 제가 읽을게요” 하고 이야기를 읽는데, 알맞은 속도로 정확하게 읽는 소리에 깜짝 놀랐다. “길순아, 또박또박 잘도 읽네.” “길순이는 선생님의 선물이야.” “길순이는 선생님의 기쁨이야” 등의 칭찬과 함께 박수를 보내주었다.
유리로 된 현관문을 나서 퇴근하며 나는 “선생님, 실뜨기 해요.” “선생님, 공기놀이 해요” 하며 따라다니던 아이들 생각에 뒤를 돌아봤다. 손 하트를 만드는 아이, 머리 위로 하트를 그리는 아이들이 밝게 웃는다. 나도 머리 위로 손을 올려 하트를 만들었다. 입꼬리는 올라가고, 눈가엔 눈물이 핑 돈다. 코끝이 찡하다. 벽돌 하나에 사랑을 담고, 벽돌 둘에 정성을 담고, 벽돌 셋에 존중을 담아 쌓은 공든 탑은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이다.
조옥자(지역아동센터강원지원단 현장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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