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견기업 해부] '형제 경영' 일진그룹, 회사 팔아 내부거래 규제 피할까

이은영 기자 2022. 7. 5.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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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산 5조원 넘어 계열사 공시 대상 기업집단 지정
일진그룹 38개 계열사 내부거래 비중 70% 달하기도
머티리얼즈 팔면 자산 줄어 공정위 감시 대상서 제외

일진그룹의 핵심 계열사인 일진머티리얼즈 매각 예비입찰이 이달로 다가왔다. 일진그룹이 영업이익률 두 자릿수의 알짜 계열사를 매각하려는 이유를 두고 여러 추측이 오가는 가운데, 계열사 간 내부거래와 투자금 마련 과정에서의 오너 지분 희석 우려 등 지배구조 이슈가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일진그룹은 최근 자산이 5조원 이상으로 평가되면서 공정거래위원회의 공시 대상 기업집단으로 지정됐다. 이에 따라 일진그룹은 앞으로 계열사 현황에 대한 공시 의무가 생겨, 계열사 간 거래와 특수관계인 거래 등에 대해 연 4회 공시해야 한다. 공정거래법에 따라 내부거래 규제도 적용받는다.

◇ 일진그룹, 국내 계열사만 38개… 오너 일가가 장악

일진그룹은 허진규 회장 아들인 정석·재명 형제가 30개에 달하는 계열사를 나눠받아 각자의 계열사를 독자적으로 이끌고 있다.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DART)에 따르면 일진그룹 국내 계열사는 총 38개다. 일진머티리얼즈를 비롯해 일진홀딩스, 일진전기, 일진다이아몬드, 일진하이솔루스 등 6개 상장사가 있고, 일진제강, 일진디앤코 등 32개 비상장사가 있다. 정석·재명 형제가 총 30개 계열사에 대해 경영권을 쥐고 있고, 나머지 8개 계열사들 역시 4촌 이내 혈족이나 친인척이 최대 주주로 있다.

그래픽=이은현

장남 허정석 일진홀딩스 부회장은 지분 97%를 가진 일진파트너스를 통해 일진홀딩스를 지배하고 있고, 일진홀딩스 아래에 일진전기, 일진다이아몬드, 일진디앤코 등 계열사를 두고 있다. 모두 모회사 지분율이 과반을 차지한다. 차남 허재명 일진머티리얼즈 사장도 일진머티리얼즈 지분 절반 이상을 가진 최대 주주로, 일진건설, 일진유니스코 등으로 이어지는 계열사를 장악하고 있다.

두 형제들은 일진그룹 내에서 각자 그룹사를 이뤄 경영을 하고 있는데, 일진머티리얼즈가 일진홀딩스 지분 0.6%를 보유 중인 것을 제외하면, 양측은 서로의 지분을 갖고 있지 않다. 이 때문에 업계에선 두 형제의 계열사들을 일진홀딩스와 일진머티리얼즈가 주축이 되는 별개의 그룹으로 보고 있다. 2008년 일진그룹이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하면서 이런 독자경영 체제가 굳어졌다.

◇ 형제경영, 교차 지분 없지만 내부거래 이어져

각 계열사의 내부거래 비중은 높은 편이다. 일진홀딩스 계열사 일진다이아몬드의 경우, 최근 3년간(2019~2021년) 별도 기준 매출액이 각각 658억원, 500억원, 616억원이었는데 이 가운데 내부거래 매출액은 각각 498억원(76%), 338억원(68%), 417억원(68%)이었다.

일진홀딩스의 100% 자회사 일진디앤코 내부거래액도 전체 매출의 절반가량으로 나타났다. 같은 기간 별도 기준 매출액은 79억원, 82억원, 86억원이었는데 이 가운데 내부거래액은 31억원(39%), 34억원(41%), 42억원(49%)이었다. 일진다이아몬드에 비해 매출액 규모 자체는 작지만 내부거래 비중이 매년 늘었다.

이 때문에 업계 일각에선 일진머티리얼즈를 매각해 일진그룹의 덩치를 줄여, 공정위의 내부거래 규제를 피해가려는 의도가 아니냐는 관측이 나온다. 53%가량인 지분을 넘기면 일진그룹 자산은 5조원대에서 3조원대로 줄어 공시 의무가 사라지기 때문에 내부거래 공시 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다. 공정위는 자산 5조원 이상의 기업집단에 대해서만 공시 의무를 지우고 있다.

◇ 투자 늘려야 하는데… ‘증자→지분 희석’ 대신 현금화?

일각에서는 허 사장의 일진머티리얼즈 지분 희석을 피하기 위해 차라리 매각을 택한 것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일진머티리얼즈는 차남 허재명 사장이 2006년부터 이끌어 왔다. 일진머티리얼즈는 전기차 배터리 등에 쓰이는 2차전지용 일렉포일(동박)을 만들어 삼성SDI 등에 공급하고 있다. 국내 경쟁사로는 이 분야 글로벌 1위 기업인 SK넥실리스가 있다. 일진머티리얼즈는 그간 SK넥실리스에 대항해 시장 점유율을 늘리려 막대한 비용의 투자를 해왔다.

문제는 언제까지 막대한 투자를 할 수가 없다는 점이다. 일진머티리얼즈는 모회사 없이 허 사장이 지분율 53.3%의 최대주주이고, 나머지 46.7%는 기타 소액주주가 갖고 있다. 이 때문에 추가로 투자금을 모으려면 증자 외엔 별다른 방법이 없다. 일진머티리얼즈는 2017년에 말레이시아에 동박 공장을 새로 짓기 위해 680만주를 유상으로 증자했고, 이를 통해 2000억원의 자금을 확보했다. 투자금은 얻었지만 허 사장의 지분율은 62.8%에서 56.3%로 낮아졌다. 일진머티리얼즈는 최근에도 스페인에 2만5000톤(t) 규모의 동박 공장을 짓기로 하는 등 투자를 이어가고 있다.

업계에서는 일진그룹이 일진머티리얼즈에 대한 투자 부담과 경영권 방어를 걱정하느니, 기업가치가 높을 때 지분을 매각해 현금을 확보하는 것이 더 나은 판단이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허 사장의 지분과 경영권 프리미엄을 더하면 몸값은 3조원 안팎이 될 것으로 보이는데, 지속적으로 큰 돈을 들여야 하는 계열사를 포기하는 대신, 매각으로 얻은 현금 자산을 활용해 신사업을 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판단이다.

이에 대해 일진그룹 관계자는 “일진머티리얼즈는 해외 공장을 확장해야 되는 시점인데 글로벌 네트워크와 자본력 있는 새로운 리더십이 인수하면 글로벌 1위가 될 것으로 보여진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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