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철의 알고 싶은 정치] 0.73%보다 14.2%가 더 중요한 이유

김윤철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입력 2022. 7. 5.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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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노동국가 한국에서
노조 조직률 지속 상승은
실로 놀라운 일
노동해방과 인간해방
한때 큰 울림 줬으나
지금은 실현 단초도 흐릿
그래서 다시 시작할 때다
부조리한 세상 혁파하는
가장 망치다운 망치는
낡은 망치일 가능성
지금은 노동에 대한
의지적 낙관주의가
다시 필요한 때다

한국 정치와 사회를 이해하고 재설계를 위한 구상을 함에 있어 0.73%보다 더 중요한 수치가 있다. 14.2%가 그것이다. 0.73%는 주지하다시피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 윤석열 후보와 이재명 후보 간의 득표율 격차다. 그럼 14.2%는 무슨 수치일까? 2020년 기준 한국의 노조 조직률이다. 2018년 이후 지속 상승 중이다. 그럼 왜 0.73%보다 14.2%가 더 중요한 걸까? 대선 득표율 격차의 감소는 양극화와 혼전 상태의 유지를 뜻하고 실제 그리되고 있음을 목도하고 있다. 반면에 노조 조직률의 증가는 정치를 에워싸고 있는 사회적 변동과 힘의 관계 구조와 관련된 현상이기 때문이다. 가령 정치를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해소하는 방향으로 끌고 갈 수도 있는 조짐이기 때문이다.

김윤철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노조는 시민이 고립된 개별 유권자가 아닌 ‘집합적 주체(주권자)’로서 정체성을 갖고 부와 권력의 배분 과정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가장 유력한 결사의 형태이다. 노조 조직률이 높을수록 복지예산 비중이 높고 불평등지수가 낮은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2000년대 들어 한국이 지향해야 할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의 모형으로 추앙받던 북유럽 국가들이 대표적인 예다. 최근에도 스웨덴은 70%가 넘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만 해도 30%에 달할 정도다. 즉 노조를 통해 시민들이 국가와 자본에 대해 교섭 권력을 획득해 자원 배분 과정에서 결정권을 행사함으로써 민주주의의 원리가 구현될 수 있는 것이다. 노조가 아닌 각종 사회운동조직과 이익집단 등을 통해서도 자원 배분 결정 과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지만, 노동시간을 늘리고 늘려야 간신히 생활이 가능한 다수 보통사람들의 처지에서는 시간을 따로 내야 하는 그런 조직에 접근하기가 수월치 않다. 그래서 자신의 일터에서 결사하는 게 가장 효율적이다. 또한 노조는 노동3권에 기초해 헌법이 직접 보장하고 있는 조직으로서 제도적 정당성이 가장 높다. 바로 이런 의미를 갖는 노조의 조직률이 한국에서 최근 들어 지속적으로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 1989년 19.8%를 기록하고 내려앉은 후 20년 넘게 한 자릿수에 머물다가 2010년대 들어 10%대에 올라선 이후 2018년 11.8%, 2019년 12.5%에 이어 2020년 14.2%를 기록했다.

그런데 한국은 대표적인 ‘반(反)노동 국가’이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노동 없는 민주주의’로 불리기도 한다. 친기업 정치사회세력이 주도하는 반노조 정서와 이데올로기가 무척 강고하다. 개발독재 치하에서만이 아니라 민주화 이후에도 그렇다. 노사갈등이 빚어져 파업 좀 할라치면 적법한 절차를 따랐는데도 시민을 볼모로 잡은 집단이기주의, 노동귀족 횡포 등등의 반노동 담론이 횡행한다. ‘불법파업’의 혐의를 씌울 이유를 어디선가 꼭 찾아낸다. 협상 타결이 지체되거나 무산되면 강경노조 탓이 된다. 타결되어도 기업 측이 파업 참여자와 노조간부 개인에 대해 천문학적 액수의 손해배상 청구소송과 가압류를 걸어 사람을 죽음으로 내몬다. 희망퇴직과 근로자 지위확인 소송 포기와 노조 탈퇴 등을 약속해야 소송을 취하해 준다. 해외 국가의 경우 노동권과 인권 침해의 우려를 이유로 노동자 개인에 대한 손배소를 삼가고 있는데도 유독 한국에서는 그리하고 있다. 한마디로 한국에서 노동자는 ‘비시민’으로 간주된다. 쌍용차의 비극적 사례를 통해 알 수 있듯이 대량해고의 부당함을 호소하며 30여명이 목숨을 끊어도 정부와 기업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노동자가 파업이 아닌 작업 중에 목숨을 잃어도 산업재해의 책임을 노동자의 안전의식 부족으로 돌린다. 이런 나라에서 노조 조직률이 지속 상승하고 있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노동약자 가세로 역학 변화 기대

노조 조직률 14.2%는 280만5000명에 해당한다. 결코 무시할 수 있는 수치가 아니다. 지난 대선 기준 총 유권자 수 4419만7692명의 6%를 넘는 수치다. 3~5% 안팎에 머물고 있는 제3당 정의당의 지지율을 웃도는 수치다. 이보다 더 중요한 건 280만5000명 중 169만5153명이 초기업 노조원이라는 것이다. 즉 기업별 단위를 넘어서서 산업단위별로 조직된 노동자 수가 더 많아졌다는 것이다. 이는 기업별 분할을 넘어서서 노동자 내부의 통합성이 높아짐에 따라 이른바 ‘계급 정체성’이 강화될 수도 있음을 기대케 한다. OECD 회원국 중 한국 수준의 노조 조직률을 기록하고 있는 국가로 프랑스가 있다. 프랑스는 낮은 노조 조직률에 비해 높은 복지 수준과 의식을 보유하고 있는데, 그 중요한 요인 중 하나는 중앙교섭 결과의 사업장 반영 정도가 높다는 것이다. 이는 상급단위조직의 대표성이 높다는 것이고, 사업장이 달라도 노동자들이 상급단위조직의 소속원이라는 공통의 정체성을 수용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20년 넘게 노동자의 영향력 강화를 위해서는 기업별 노조의 한계를 넘어서야 한다고 했는데, 그 길로 한국도 들어선 것일 수 있다. 또한 300명 이상 기업의 조합원은 1년 새 12만명 이상 감소한 데 비해 100~299명 사업장 조합원은 3만명 이상 증가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 중심의 노동운동에서 탈피할 수 있는 가능성이 만들어질 수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다. 아직은 공공부문 조직률이 압도적임을 감안할 때 더 지켜봐야 할 일이지만, 노조 조직률의 지속 상승에는 그간 노조라는 권력자원에서 소외되었던 노동약자들의 참여가 주되게 작용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이는 노동약자의 교섭권력 보유와 강화에 기초해 자원 배분 결정 과정을 둘러싼 힘의 관계 지형에 변화가 생겨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해소할 계기가 형성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특히 한국노총과 민주노총 공히 퇴직자 노조 가입과 특수고용·플랫폼 노동자들의 노동자성 인정과 노조 가입 권리 보장에 노력을 경주하겠다고 하는 상황임을 고려할 때, 그런 힘의 관계 지형 변화를 기대해볼 수 있지 않나 싶다.

민주·정의당 혁신 논의에 참조돼야

필자는 꽤 오랜 기간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이 주도한다는 이유로 노동운동에 대해 신뢰하지 않았다. 노동운동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의심한 게 아니다. 양대 노총 소속원 상당수가 최상위 소득 1% 바로 아래인 상위 9%에 분포하고 있다는 노동운동가의 전언, 그리고 ‘세계불평등데이터베이스(WID)’에 기초할 때 이들 상위 9%가 전체 소득에서 차지하는 점유율이 30%를 넘어 스웨덴(20.3%)은 물론 미국(26.7%)보다도 높은 상황의 특성을 이해했던 것이다. 그런 현실 상황에서 노동약자를 위한 노동운동이 만들어지기는 어렵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최근 노조 조직률의 지속적인 증가를 보면서 그들이 말만이 아니라, 실제로 산별노조 가입 운동을 지속해 왔고, 또 성과를 거두고 있음을 확인함으로써 이제는 좀 더 신뢰해도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런 노력과 성과에 기초하면 노동약자의 사회세력화와 그에 바탕한 정치세력화가 다시 활성화되어 ‘노동 있는 민주주의’, 그리고 경제민주화와 복지강국의 비전을 다시 세울 수 있겠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그래서 14.2%의 진짜 중요한 의미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아닌가 싶다. 노동운동에 대한 신뢰를 다시금 회복하고 노조를 정치와 사회에 대한 재설계의 구성요소로 간주할 수 있게 한다는 점, 그리고 이를 정치세력도 학자도 그 누구도 아닌 노동약자 스스로가 먼저 알아차리고 행동에 나선 것일 수도 있다는 점.

대선과 지방선거 패배자인 민주당과 정의당이 혁신 논의를 시작했다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들 논의의 핵심에 14.2%의 의미에 대한 검토가 포함되길 기대해 본다. D H 로런스가 ‘제대로 된 혁명’에서 노래했듯이 대부분의 사람들은 노동을 폐지하고 싶다. 그래서 웃고 즐기고 재미있는 혁명과 그것이 가능한 삶을 구가하는 해방을 얻고 싶다. 하지만 해방을 위해 노동에 대해 다시 이야기해야 한다. 노동해방·인간해방은 정치 민주화 이행 초기인 1987년 노동자 대투쟁 때 이미 구호로 등장해 큰 울림을 선사한 바 있다. 그러나 2022년 지금 아직도 그 실현의 단초도 흐릿한 상태다. 30여년 동안 노동에 대한 문제의식을 낡은 것으로 간주해 삭제하고 노동해방·인간해방의 실천 의지를 ‘노동약자=능력주의 사회의 패배자’로 치부하며 거세해 왔기 때문임을 부인할 수 없다. 그래서 다시 시작해 볼 때이다. 누군가의 말처럼 (부조리한 세상을 혁파하는) ‘가장 망치다운 망치는 낡은 망치’일 수 있다. 지금은 노동에 대한 ‘의지적 낙관주의’가 다시 필요한 때이다.

김윤철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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