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진 게 없지만 괜찮아지는, 절망은 사라지고 희망은 멈추는..어린이의 '작고 가난한 세계'[김유진의 구체적인 어린이]
현실 기준과 경계가 없는 판타지 세계에선
가난하고 작은 내가 더 작은 친구와
얼마든지 나누며 행복할 수 있다
욕망의 크기에 미치지 못하는 상태가
가난이라면, 모든 어린이는 가난하다
이 작고 가난한 세계를 거치며
어린이는 만족하는 법을 배운다
어린이는 작다. 그래서인지 아동문학은 작은 캐릭터들과 그들의 작은 세계를 종종 그린다. 옛이야기와 마찬가지로 요정과 소인과 작은 생명체가 등장하고, 그들의 세계에 돋보기를 대고 조심히 들여다본다. 소인국에 간 걸리버처럼, 작은 어린이가 더 작은 이들의 세계를 만난다. 어린이가 발견하는 작은 세계에는 어떤 비밀이 있을까. 그 세계는 어린이에게 어떤 의미일까.
가난해도 괜찮은 세계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단편 동화 ‘엄지소년 닐스’(<엄지소년 닐스>(창비·2000) 수록작)에서 베르틸은 침대 밑에서 들리는 작은 발걸음 소리를 쫓다가 엄지손가락만 한 소년 닐스 카를손을 ‘발견한다’. 침대 밑 쥐구멍에서 이틀째 살았다는 닐스는 자기 방으로 베르틸을 초대한다. 구멍 옆 걸쇠를 누르면서 ‘킬레빕스’라고 말하니 베르틸의 몸집은 금세 작아져 닐스의 방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베르틸은 벽난로만 덩그러니 놓인 작고 휑한 방을 보고는 자기 집에서 장작을 가져와 불을 때고, 음식을 가져와 나눠먹고, 침대를 가져와 안락한 잠자리를 만들어준다.
베르틸은 여섯 살밖에 안 되는 어린이지만, 엄지손가락만큼 작은 닐스처럼 닐스의 방도 작았기에, 그 방에 필요한 의식주 전부를 마련해줄 수 있었다. 베르틸의 집 부엌 아궁이 옆에 널려 있던, 머리가 타버린 성냥개비들이 닐스의 벽난로에서는 훌륭한 장작이 된다. 닐스의 방에서는 “아주아주 작았던 빵 조각이 지금은 세상에서 가장 큰 빵 덩어리처럼 커 보였”(<엄지소년 닐스> 26쪽)다. 건포도를 한 알씩 갉아먹다가 반쪽은 내일 식사로 남겨두어도 좋았다. 인형의 집에 놓였던 장난감 침대는 닐스에게 딱 맞았고, 엄마가 베르틸의 잠옷을 만들다 남은 옷감 조각은 포근한 이불이 되었다.
가난한 살림살이도 닐스의 방에서는 넉넉해졌다. 작은 세계는 가난해도 괜찮은 세계였다. 땔감과 음식이 아주 조금만 있어도 충분했기에 대단한 부자나 능력자가 아닌 여섯 살 베르틸도 얼마든지 그 세계를 풍요롭게 만들 수 있었다. 엄지만 한 소년이 존재하고, 몸집이 자유자재로 작아졌다 커졌다 하는 세계는 판타지의 세계이다. 그런데 이 판타지 세계에서 무엇보다 가장 멋지고 놀라운 판타지는 아무리 작고, 가진 게 없어도 괜찮아지는 세상이라는 데 있는 듯하다.
지브리 애니메이션 영화 <마루 밑 아리에티>(2010)의 원작으로 잘 알려진 <마루 밑 바로우어즈>(시공주니어·1996)에서도 가난한 살림을 꾸려가는 소인을 만날 수 있다. 영국 작가 메리 노튼이 1952년 출간한 이 동화는 시리즈인 <들로 나간 바로우어즈>(1955), <강으로 간 바로우어즈>(1959), <하늘을 나는 바로우어즈>(1961), <돌아온 바로우어즈>(1982)로 이어질 만큼 인기 있고 유명한 소인 이야기다. 작가는 이 책의 창작 계기를 머리말에서 이렇게 밝힌다.
“제가 다시 그 작은 사람들을 생각하게 된 건 1940년 전쟁 직전이었지요. (…) 그 무렵에는 험난하고 비극적인 일로 내가 어린 시절 꾸며낸 그 작은 사람들과 비슷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생겨났지요. (…) 우리 모두 그 작은 사람들 같은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도요.”(<마루 밑 바로우어즈> 17쪽)
‘바로우어즈(The Borrowers)’는 이름과 달리, 인간의 물건을 빌리지 않고 훔치며 살아가지만 무척이나 당당하다. “버터가 빵을 위해 있는 것처럼, 잉간들은 빌리는 사람들을 위해 있는 거”(<마루 밑 바로우어즈> 143쪽, 그들은 인간을 ‘잉간’이라 부른다)라고 자신 있게 주장한다. 그들의 이름이 엄연히 ‘바로우어즈’이듯 이 동화에서 비판받는 건 인간이다. 인간은 바로우어즈를 잡아 해치려는 빌런으로 등장한다. ‘엄지소년 닐스’에서 베르틸이 하듯 베푸는 일 따위는 없다. 작은 세계는 가난해도 금세 풍요로워질 수 있는 세계인데 그걸 모르고 빵 부스러기조차 나누지 않는다.
<마루 밑 바로우어즈>의 소인은 옛이야기 요정과 달리 목숨을 지키기 위해 숨어 지내야 했던 사람들, 겨우 연명하며 살아가는 가난한 사람들에서 탄생했다. <마루 밑 바로우어즈>와 ‘엄지 소년 닐스’의 소인은 모두 가난하다. 닐스는 바닥이 너무 차가워서 얼어 죽지 않으려면 자다가도 한 시간에 한 번씩 일어나 방 안을 뛰어다녀야 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들 세계는 우리 세계의 아주 작은 사물의 이동만으로 충만해질 수 있었다. 작은 세계라서 가능한 놀라운 풍요이다. 가난하고 작은 내가 더 작은 친구와 얼마든지 나누며 행복할 수 있는 세계의 모습은 모든 어린이를 따듯하게 안아주는 듯하다. 게다가 크고 작음이 상대화되며 현실의 기준과 경계가 허물어지니 어린이는 더 이상 자신을 작고 나약하게만 느끼지 않을 것 같다.
절망이 사라지고 희망이 멈춰진 세계
베르틸은 공장에 일하러 간 엄마와 아빠를 하염없이 기다리다 닐스와 만난다. 날씨가 좋지 않은 계절이라 밖에서 노는 아이도 없고, 이야기 한마디 할 사람 없이 온종일 집에 혼자 있어 슬프다고 느끼던 참이었다. 그러니 작고 휑한 방에서 혼자 살아가는 닐스에게는 베르틸의 외로움과 쓸쓸함이 겹친다. 이처럼 마법의 작은 세계는 어린이의 현실과 밀접히 연결된다. 어른의 현실과 마찬가지로 어린이의 현실에는 희망만이 아닌 절망이, 기쁨만이 아닌 슬픔이 함께 자리한다. 어린이의 현실과 연결된 작은 세계 또한 어린이의 희망과 절망, 기쁨과 슬픔이 동시에 출렁인다.
필리퍼 피어스의 동화 <아주 작은 개 치키티토>(시공주니어·1999)에서는 개를 기르고 싶어 하는 벤의 희망과 절망이 눈감을 때만 보이는 아주 작은 개를 불러낸다. 벤이 개를 예뻐하는 걸 본 할아버지가 ‘이번 생일 선물로 개가 어떻겠냐?’라고 말하자 벤은 개를 선물받을 기대에 잔뜩 들떠 있다. 하지만 벤은 조부모에게 진짜 개가 아닌 털실로 개를 수놓은 액자를 선물받았고, 몹시 상심한다. 그 액자는 돌아가신 외삼촌이 마지막 항해였던 멕시코에서 가져온 골동품이었고 할머니께 매우 소중한 물건이라는 사실도 벤을 달래지 못한다. 물론 벤은 자기 할아버지가 개를 사줄 형편이 못 되고, 자기 집에 개를 풀어놓거나 산책시킬 만한 장소가 마땅찮은 현실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걸 안다고 해서 약속이 깨어지며 처참히 무너진 마음이 단번에 회복되지는 않는다.
얼마 지나 외갓집을 다시 찾은 벤은 액자 뒤에 적힌 단어인 ‘치키티토’가 아주아주 작다는 뜻의 스페인어이고, ‘치와와’는 그 개가 생겨난 도시이자 개의 품종명이란 걸 알게 된다. 할아버지가 벤에게 미안해하며, 기대했던 품종을 묻자 벤은 사실대로 보르조이, 아이리쉬 울프하운드, 마스티프 같은 대형 견종을 대답한다.
“꼭 그런 개를 받고 싶은 건 아니었어요. 그냥 그런 개들을 생각해 봤다는 얘기죠.”
“그렇게 큰 개는 안 되지. 런던에서는 키울 수 없어.”
“작은 개 한 마리도 키울 형편이 안 되는 걸요.”
“글쎄, 아주 작은 개라면…….”(중략)
“제일 작은 개도 안 될 거예요.”
벤은 이쯤에서 할아버지가 이야기를 끝내주기를 바랐다.
“그래도…….”
“제일 작은 품종 가운데 제일 작은 개도 안 될 거예요.”
“정말 안 될까?”
“네, 아주아주 작은 개도…….”
벤은 눈을 가늘게 뜨고서, 자기가 개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을 할아버지에게 확실히 이해시킬 말을 찾으려 애썼다.(중략)
“눈을 감아야만 볼 수 있을 정도로 아주 작은 개도 안 될 거예요.”
- <아주 작은 개 치키티토> 86~87쪽
큰 개는 물론이고 아주 작은 개도 기를 수 없다고 되풀이하는 벤에게서 간절함에 비례하는 깊은 체념과 슬픔이 배어난다. 벤에게는 작은 개조차 기를 능력이 없다. 단지 벤의 집안 형편이 빠듯해서가 아니라 벤이 어린이기 때문이다. 개를 사는 일, 런던을 떠나거나 정원 넓은 집으로 이사하는 일, 온 가족이 고깃국을 끓여 먹을 수 있는 뼈다귀를 선뜻 개의 먹이로 내주며 개를 키우는 일 모두 벤과 같은 어린이에게 주어진 권한 밖의 일이다.
벤은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걸 안다. 집안 형편을 알기 시작할 나이가 되면 어린이들은 양육자에게 마냥 조르거나 떼쓰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간절함이 사라지거나 줄어들지는 않으니 어쩌면 바로 이것이 세상 모든 어린이가 겪는 절망의 이유일 테다. 어른이 기준인 세계에서 어린이의 능력은 어른과 다르고, 어른이 기준을 만드는 세계에서 어린이에게 주어지는 권한은 적다. 그러니 어린이에게는 욕망과 능력 사이를 가늠하며 희망하고, 욕망이 애초부터 허용되지 않는 권한에 절망하는 일이 매일의 과제일 것 같다. 욕망의 크기에 미치지 못하는 상태를 가난이라고 한다면, 모든 어린이는 가난하다. 어린이는 작을 뿐 아니라 가난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자기 힘으로 어쩔 수 없는 현실을 두고 벤의 희망이 절망으로 뒤바뀌던 그때, 벤에게는 상상 속의 개 치키티토가 등장한다. 벤이 눈을 감을 때마다 액자 그림에 있던 치키티토가 나타나 살아 움직인다. 이제 치키티토와 더 많은 시간을 함께하고 싶은 벤은 지하철 순환선이 몇 바퀴씩 도는 내내 눈을 감은 채 자리에 앉아 있기도 한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개도 키우지 못한다는 깊은 절망이 액자 속 개를 불러냈다. ‘엄지소년 닐스’에서 몹시도 외로웠던 베르틸이 닐스를 만났듯 말이다.
하지만 눈을 감아야 보이는 개는 유폐된 세계에서만 존재하는 일종의 회피이자 속임수이고, 실제로 벤을 위험에 빠뜨리기도 한다. 여러 사건을 겪은 후 벤은 자신이 불러낸 작은 개를 떠나 드디어 진짜 개를 갖게 된다. 이제 진정 절망은 사라지고 희망이 이루어졌다. 그 개가 상상 속 치키티토와 달라 잠시 당혹스러워하는 벤을 보며 할머니는 말한다. “애타게 바라는 건 이루어지게 마련”이고 “그다음에는 그것에 만족하며 사는 법을 또 배워야”(<아주 작은 개 치키티토> 222~223쪽) 한다고.
할머니의 바람대로, 가난해서 오직 간절함 외에는 가질 것 없던 벤의 마음은 작은 개와 함께 나타나고 사라진 절망과 희망을 아마 오래도록 기억할 것 같다. 벤이 스스로 만든 작은 세계를 통과하며 희망은 그렇게 이루어지고 또 멈추어졌다. 절망이 사라지고 희망이 멈추어지며 어린이의 작고 가난한 삶은 계속될 것이다.
■김유진
아동문학평론가·동시인. 동시집 <나는 보라> <뽀뽀의 힘>, 청소년시집 <그때부터 사랑>, 아동문학평론집 <언젠가는 어린이가 되겠지>를 출간했고, ‘토닥토닥 잠자리 그림책’ 시리즈를 썼다.
아동문학 작품 속에서 어른과 어린이가 좀 더 자주 만나고, 좀 더 가깝게 이어지는 날이 올 수 있기를 바란다.
김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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