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인상이 물가 올린다? "신화에 불과"
[김효진 기자(hjkim@pressian.com)]
전세계가 인플레이션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가운데 최근 한국을 포함한 몇몇 국가의 정부 당국자들이 물가 상승을 완화하기 위해 임금 인상을 억제해달라고 주문했다. 그러나 경제학자들을 포함한 많은 전문가들은 지금의 인플레이션은 우크라이나 전쟁 등 공급 쪽 요인으로 촉발됐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며 임금 인상이 물가 인상을 유발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반박하고 있다.
임금 상승이 물가 상승을 부추긴다는 논리로 임금 상승을 억제해야 한다는 주장은 올 들어 세계 여러 당국자들에게서 나왔다. 앤드류 베일리 영국중앙은행(BOE·영란은행) 총재는 지난 2월 인플레이션이 고착되는 것을 막기 위해 노동자들에게 큰 폭의 임금 인상을 요구하지 말라고 주문하며 빈축을 샀다. 이어 지난달 불신임 투표에서 겨우 승리한 뒤 임금 인상을 요구하는 철도노조 등 노동자들의 압력에 직면한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는 인플레이션에 맞춰 임금을 올리면 임금 상승 때문에 다시금 물가가 상승하는 악순환에 처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지난주 추경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도 한국경영자총협회를 만나 "과도한 임금 인상이 고물가 상황을 심화시킬 수 있다"며 "과도한 임금 인상을 자제해달라"고 요청했다. 5월 전년 대비 소비자물가상승률(CPI)은 미국 8.6%, 영국 9.1%, 유로존 8.1%, 한국 5.4%에 달한다.
많은 전문가들은 최근 인플레이션의 원인은 명백히 에너지값 상승 등 공급 쪽 요인에 기인한 것이며 임금 상승이 이를 견인했다는 증거는 없다고 본다. 워싱턴 소재 싱크탱크 케이토(CATO) 연구소는 지난달 29일 논평에서 임금 상승과 물가 상승의 악순환 논리는 "위험한 신화"에 불과하다며 이번 인플레이션을 일으킨 것은 "에너지와 식량의 공급 충격, 그리고 막대한 통화부양"이고 "노동조합은 그 원인이 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연구소는 "이러한 공포를 불러내는 것은 중앙은행과 정부의 책임 회피에 편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잘못 관리된 경제의 희생자를 원인으로 뒤바꿔 비난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다트머스대 경제학 교수이자 영국중앙은행 통화정책위원을 역임한 데이비드 플랜치플라워도 <로이터> 통신에 "이건 임금 인상이 촉발한 인플레이션이 아니다. 기업들이 임금 인상 때문에 가격을 올린다는 증거는 없다"고 지난 4월 말했다. 투자은행 베어드의 로스 메이필드 투자전략분석가도 지난 5월 미국 라디오 방송 마켓플레이스에 현재 인플레이션을 끌어올리고 있는 것은 코로나19와 우크라이나 전쟁이지 노동자들의 임금이 아니라고 지적했다.
<파이낸셜타임스>(FT)에서 유럽경제 분석을 담당하고 있는 마틴 핸드부는 3일 최근 인플레이션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가스 공급 부족 등 공급 측 원인이 "명확"한데도 "초과 수요를 비난하는 쪽으로 옮겨가고 있다"며 "만일 수요가 거의 정상 수준이라고 해도 코로나19 대유행, 에너지 및 상품가격 상승 등으로 공급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프랑스, 이탈리아, 북유럽 국가 등 단체교섭이 강한 나라들의 물가상승률은 낮은 편"이라고 덧붙였다. 5월 유로존 전체 소비자물가상승률이 8.1%에 이르는데 반해 5월 기준 프랑스는 5.8%, 스웨덴 7.3%, 노르웨이 5.7% 등으로 비교적 낮다.
임금 인상이 기업의 비용 증가로 이어져 가격이 인상되는 효과를 낳을 것이라고 주장하기에는 기업 이윤이 현재 너무 견고하다는 반박도 나온다. 핸드부는 <파이낸셜타임스>에 "기업의 강력한 이윤은 임금인상이 가격인상을 유도하지 않는다는 뜻"이라고 썼다. 컨설팅업체 RSM의 수석경제학자 조 부루수엘라스도 마켓플레이스에 기업이 현재 이윤을 유지한 채 노동자에게 더 많은 임금을 지불하고 있다며 이는 "임금인상이 고용주나 경제를 훼손하지 않는다는 증거"라고 지적했다. 클린턴 정부 노동부 장관을 역임한 로버트 라이시 버클리대 공공정책 교수는 지난 4월 <로이터> 통신에 임금이 추동하는 인플레이션은 없고 기업 이윤이 1950년대 이래 가장 높다며 "기업이 가격 인상 없이 임금 인상을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기본적 수학을 못하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수요 증가로 인한 인플레이션이 있었더라도 이제 해당 요인은 한 풀 꺾일 것이라는 징조가 보이는 상황이다. 세스 카펜터 모건스탠리 글로벌 수석 경제학자는 2일 <파이낸셜타임스>에 "지난해 인플레이션은 코로나19 영향으로 경색된 글로벌 공급망이 소비재 수요에 대응하지 못하면서 시작"됐지만 최근 소매업체들에 재고가 쌓여 가는 것을 지적하며 "소비재에 대한 과잉지출은 적어도 인플레이션 압력의 일부를 바로잡는 것처럼 보인다"고 분석했다. 5월 전년 대비 임금인상률(5.2%)은 물가상승률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물론 전달(5.5%)에 둔화됐다. 때문에 가계가 지갑을 닫고 있다는 우려가 곳곳에서 나온다. 미국 5월 소매판매는 전월 대비 대비 0.3% 감소해 인플레이션에도 불구하고 1~4월 넉 달 연속 이어오던 상승세가 꺾이고 올들어 처음으로 하락했다.
향후에도 임금 인상률이 물가 상승률을 따라 잡기는 어려울 전망이다. <로이터>는 지난 4월 미국 기업들이 올해 임금 인상률을 3.4% 정도로 예상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물가상승률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수치다. 영국에서 철도노조가 33년만에 대규모 파업을 단행했고 미국에서도 아마존·스타벅스 등에 노조가 들어서는 등 일견 노동자의 힘이 세지는 듯 보이지만 노조가 임금 인상을 계속해서 추동할 만큼의 힘을 가지지는 못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부루수엘라스는 노조 조직률이 낮다는 점을 들어 "노동자들이 임금을 계속해서 상승시킬 영향력이 없다"고 지적했다. 2021년 미국의 노동조합 가입비율은 10.3%고 민간부문으로 한정하면 6.1%에 불과하다. 임금과 물가 상승의 악순환이 거론된 1970년대에 민간부문 노동자 4명 중 1명이 노조에 가입돼 있었음을 감안하면 당시와 현재의 노동자 쪽에서 임금 인상을 요구할 수 있는 힘이 현저히 떨어졌다는 것이다. 그는 이번 임금 인상 요인도 노동자의 협상력이 증대돼서라기보다 코로나19 대유행으로 인한 노동력 부족 때문이라고 봤다. 임금·물가 악순환보다 임금 상승률과 물가 상승률 간 격차가 커져 가계가 더 큰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것을 걱정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만일 당국자들이 임금 상승을 억제하는 것이 물가 상승을 막는다고 진심으로 믿고 있다면 임금 인상을 자제하라고 기업과 노동자들에게 권고하는 대신 코로나19 이후 노동시장에 복귀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노동자들을 복귀시키는 것이 더 근본적인 해결책일 수 있다. 예를 들어 <파이낸셜타임스>의 칼럼니스트인 라나 포루하르는 3일 보육 서비스 미비로 인해 미국 여성들이 코로나 대유행 이후 노동시장에 복귀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특히 사회경제적 지위가 낮은 여성들이 보육 비용 부담으로 노동시장에 복귀하지 못한 것을 포함해 2020년 초에 비해 2021년말에 여성의 노동시장참여율이 1%포인트 이상 감소했다고 밝히며 저렴한 보육 서비스 및 공공 보육 확충을 필요성을 역설했다.
[김효진 기자(hjkim@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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