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스 어폰 어 와인 <28>] 왈츠처럼 우아한 오스트리아 화이트 와인
눈앞에 펼쳐진 포도밭을 바라보며 화이트 와인 한 모금을 천천히 음미해 본다. 불어오는 산들바람이 모차르트의 피아노 소나타처럼 상쾌하게 뺨을 스친다. 10년 만에 다시 찾은 오스트리아는 그렇게 나를 향긋하게 맞아줬다. 오스트리아 와인은 나의 삶을 바꾼 와인이다. 2007년 유럽에서 직장 생활을 하던 나는 잘츠부르크로 발령을 받았다. 한창 와인에 빠져 있던 때라 이사를 마치고는 곧장 와인 숍으로 향했다. 시원한 샴페인 한 병을 사볼 요량이었다. 그런데 매장에 즐비했던 건 처음 보는 오스트리아 와인들. 오스트리아가 와인 생산국인 줄 미처 몰랐던 내겐 신선한 발견이었다. “그래, 오스트리아 와인도 한번 마셔보는 거야!” 별다른 기대 없이 사 온 와인이었지만, 맛을 보자마자 신선한 발견은 곧 충격으로 바뀌었다. 이제껏 마셨던 와인과는 상당히 달랐기 때문이다. 가볍지만 우아하고 상큼하면서도 풍부한 맛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생산지에 따라 와인이 이렇게나 바뀔 수 있다니! 호기심이 생긴 나는 그때부터 취미 삼아 와인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5년 뒤 결국 20년간 몸담았던 IT업계를 떠나 와인 전문가의 길로 들어섰다.
오스트리아 최대 와인 전시회 개막
이번 방문은 오스트리아 와인협회의 초청으로 ‘비비눔(Vievinum)’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비비눔은 2년마다 열리는 오스트리아 최대 와인 전시회로 각지에서 생산된 와인들이 총출동해 맘껏 존재감을 뽐내는 자리다. 5월 21일부터 사흘간 빈 호프부르크(Hofburg) 왕궁에서 열린 이 행사에는 전 세계 50여 개국에서 초대된 와인 전문가들도 함께했다. 첫 번째 일정은 빈의 한 호이리게(heuriger)에서 열린 웰컴 파티였다. 호이리게란 오스트리아식 선술집으로 싱그러운 햇와인과 함께 오스트리아 전통 음식을 판매하는 곳이다. 빈 북쪽에는 하일리겐슈타트(Heiligenstadt)라는 호이리게촌이 있다. 작은 호이리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이곳은 베토벤이 요양했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청력을 잃어가던 베토벤은 고즈넉한 이 마을에서 마음의 안정을 얻고 9번 교향곡을 작곡했다고 한다. 호이리게에서는 오스트리아 토착 포도인 그뤼너 벨틀리너(Grüner Veltliner)로 만든 화이트 와인을 주로 판매한다. 보디감이 가볍고 풍미가 산뜻한 이 와인은 빈의 북동부를 드넓게 감싸는 바인비어텔(Weinviertel)이라는 지역에서 생산된다. 포도밭 면적이 140㎢에 이르는 이곳은 그뤼너 벨틀리너에 특화된 산지다. 레이블에 바인비어텔이 적혀 있으면 모두 그뤼너 벨틀리너로 만든 것인데, ‘Weinviertel DAC’는 가볍고 마시기 편한 스타일이고, ‘Weinviertel DAC Reserve’는 6개월, ‘Weinviertel DAC Große Reserve’는 1년 이상 숙성시킨 와인이어서 맛과 향이 한층 더 풍부하다.
그뤼너 벨틀리너는 궁합이 안 맞는 음식을 찾기 힘들 정도로 모든 음식과 잘 어울린다. 하지만 이왕이면 감자샐러드와 슈니첼(Schnitzel)처럼 호이리게 음식과 비슷한 것을 찾아 즐겨 보는 건 어떨까? 바질 페스토를 넣은 감자샐러드와 돈가스처럼 말이다. 바질의 향이 그뤼너 벨틀리너의 신선함과 환상적인 궁합을 이루고, 와인의 상큼함이 돈가스에 레몬즙을 뿌린 듯 기름진 맛을 개운하게 씻어준다.
비비눔이 끝난 뒤에는 바인비어텔을 시작으로 빈 인근의 와인 산지를 둘러보는 일정이 이어졌다. 특히 빈 서쪽에 위치한 캄프탈(Kamptal), 바하우(Wachau), 크렘스탈(Kremstal), 트라이센탈(Traisental)은 경치도 뛰어나지만, 오스트리아 최고의 화이트 와인 산지여서 떠나기 전부터 가슴이 설렜다. 그중에서도 캄프탈은 프리미엄 와인 산지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힌다. 이곳에는 하일리겐슈타인(Heiligenstein)이라는 산이 있는데, 햇빛이 정통으로 내리쬐는 정남향 경사지에서 자란 리슬링(Riesling)은 품질이 세계적인 수준이다. 와인의 맛을 보면 농익은 향미가 꿀처럼 감미롭고 아카시아 같은 꽃향이 우아하기 그지없다. 산을 내려와 다뉴브강 쪽으로 이어지는 평지는 그뤼너 벨틀리너 차지다. 습기를 촉촉이 머금은 황토에서 자란 그뤼너 벨틀리너는 싱싱한 과일향과 탄탄한 구조감이 일품이다.
바하우는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됐을 정도로 풍광이 뛰어난 곳이다. 바하우 최고의 포도밭도 가파른 경사면에 자리한다. 수백만 년 동안 다뉴브강이 깎아 만든 이 경사면은 일조량이 풍부하고 물빠짐이 좋아 포도를 재배하기에 더없이 좋은 조건이다. 바하우는 특이하게 와인을 알코올 도수에 따라 슈타인페더(Steinfeder‧11.5% 이하), 페더슈필(Federspiel‧11.5~12.5%), 스마라그드(Smaragd‧12.5% 이상)로 분류한다. 가장 잘 익은 포도로 만드는 스마라그드 리슬링은 달콤한 과일 향이 가득하고 특유의 미네랄 향이 입맛을 돋운다. 스마라그드 그뤼너 벨틀리너는 풍미의 집중도가 탁월하고 과즙의 상큼함이 오래도록 입안을 맴돈다.
크렘스탈에는 고풍스러운 도시 크렘스(Krems)와 천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괴트바이크(Göttweig) 수도원이 있다. 나지막한 언덕이 차가운 북풍을 막아주고 따뜻한 동풍이 불어오는 이곳의 포도는 높은 완숙도를 자랑한다. 서쪽의 편마암 기반 토양에서 자란 리슬링은 산뜻하고 우아하며, 동쪽의 황토에서 생산된 그뤼너 벨틀리너는 부드러운 질감이 매력적이다. 트라이센탈은 토양에 석회질이 많아 그뤼너 벨틀리너가 남다른 개성을 자랑한다. 잘 익은 과일 향과 피망처럼 매콤한 향의 조화가 정교하고 세련된 맛을 뽐낸다.
여름휴가로 해외여행을 계획한다면 고전 음악과 예술을 감상하며 호이리게에서 신선한 와인도 즐길 수 있는 빈은 어떤가? 하루쯤 차를 빌려 근교의 포도밭과 와이너리를 둘러보는 것도 여행에 색다른 묘미를 더할 것이다. 굳이 해외로 떠나지 않으면 또 어떠랴. 와인과 음악만 있다면 어디에 있든 오스트리아에 있는 기분일 테니 말이다. 모차르트와 슈트라우스를 감상하며 그뤼너 벨틀리너와 리슬링을 음미해 보자. 산들바람 같은 선율이 온몸을 감싸고 상큼한 화이트 와인이 입안에 가득하면 마음은 포도밭이 내려다보이는 푸른 언덕 위에 서있을 것이다.
▒ 김상미
와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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