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상준의 돈 이야기] 불안과 은어의 산사태
지난 몇 주는 국내외를 막론하고 불안한 경제 소식으로 가득 찬 시간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불안은 앞으로도 상당 기간 지속될 전망이다. 국내 언론 매체들은 블룸버그, 월스트리트저널(WSJ) 등 외국의 저명한 경제 저널을 인용하면서 전 세계적인 경제 불안 상황을 실시간으로 전해주고 있다.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자이언트 스텝(기준금리 0.75%포인트 인상), 전 세계 증시 급락, 가상화폐 투매’ ‘파월, 연착륙은 매우 도전적인 일’ ‘아이켄그린, 금리 인상의 대가는 침체’ 등이 대표적이다.
이 세 개의 뉴스 헤드라인을 통해 우리는 최근 전 세계 주식시장, 암호화폐 시장이 불안해졌고, 이런 불안의 한가운데 연준이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연준은 미국의 중앙은행, 즉 연방준비제도의 별칭이고, ‘연준의 금리’는 연방자금시장에서 형성되는 연방자금금리를 의미한다. 연방자금시장이란 은행들이 중앙은행에 맡겨둔 준비금 중에 여유자금이 있으면 다른 은행에 급전으로 빌려주는 거래가 이루어지는 시장을 의미한다. 이 시장에서 형성되는 금리는 미국에서 가장 싼 돈에 적용되는 하루짜리 초단기 금리라는 의미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왜냐하면 모든 금리(이자율)는 대출 기간이 길어질수록 높아지고, 차주의 신용도가 낮아질수록 높아지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미국에서 가장 낮은 금리, 즉 연준의 금리는 다른 금리의 바로미터, 즉 기준금리가 되기 때문이다.
또 위 헤드라인을 통해 우리는 연준의 자이언트 스텝이 문제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중앙은행이 기준금리를 조정하는 경우 한 번에 25bp씩 인상하거나 인하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여기서 ‘1bp(basis point)’란 ‘1%의 100분의 1’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례적으로 50bp의 금리를 인상하는 경우를 ‘빅 스텝’, 75bp 이상의 금리 인상을 ‘자이언트 스텝’이라고 부르기로 한 것이다. 원래 중앙은행과 경제학자들은 은어, 즉 ‘그들끼리만 알아들을 수 있는 말’ 만들기를 좋아한다. 인플레이션 타게팅, 최종대부자, 포워드 가이던스, 빅 스텝, 자이언트 스텝, 비정통적 통화 정책, 양적 완화, 양적 축소, 세속적 경기 침체…등등이 그러하다.
역사상 가장 유명한 중앙은행가였던 앨런 그린스펀은 항상 은유적이고 비유적인 화법으로 델포이 신전의 사제를 연상시켰다. 그린스펀 이후, 비공개성과 신탁적인 분위기는 중앙은행의 필수적인 미장센이 됐고, 이제 중앙은행은 통화 정책을 시행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을 계속 궁금하게 만드는 것이 본연의 임무인 것처럼 보이는 경지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알쏭달쏭하고 주술적인 은어가 사용된다. 하지만 중앙은행의 임무, 즉 통화 정책은 그들이 연출해내는 것만큼 신비롭거나 복잡한 일이 아니다.
중앙은행 총재가 기자회견장에서 금리를 올리겠다고 선언하고 나면, 중앙은행 채권매매부서가 공개시장 조작에 나선다. 여기서 ‘공개시장’이란 부산 국제시장이나 주식시장처럼 일반 국민 누구나 접근이 가능한 공개된 시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미리 선택된 소수의 금융기관만이 참여하는 폐쇄적 시장을 의미한다. 또 ‘조작’이란 중앙은행이 특정한 금융기관들과 채권을 매매하기 위해 실시하는 ‘제한적 경쟁 입찰’ 절차를 의미한다. ‘제한적’이란 참가자 수가 제한된다는 의미이고, ‘경쟁 입찰’이란 참가자들이 비공개로 응찰 가격을 제시한다는 의미다. 결국 중앙은행의 공개시장 조작은 노량진수산시장에서 중도매인들을 상대로 이루어지는 ‘산낙지 경매 절차’와 유사한 것이다.
중앙은행이 ‘금리를 올린다’는 것은 중앙은행이 ‘시중에 유통되는 돈을 자신의 금고 안으로 환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앙은행이 화폐를 증발하거나 환수하려 할 경우 채권 매매 방식을 이용한다. 공개시작 조작, 즉 채권 매매를 통해 중앙은행이 보유하던 채권이 상업은행에 흘러가면 그 반대 방향, 즉 중앙은행 금고 안으로 채권 매매 대금(돈)이 흘러들어온다. 이 과정을 경제학에서는 신비스럽게 기술하고 있지만, 법의 관점에서 보면 매매 계약의 당연한 귀결이다. 상업은행에서 중앙은행으로 돈이 빠져나가면 은행 시스템 내에 유동성이 줄기 때문에, 은행 간 대출 금리가 오르고 뒤이어 기업 대출, 가계 대출 금리가 오르게 된다. 이것이 중앙은행의 금리 인상, 즉 긴축적 통화 정책의 대체적인 메커니즘이다.
미 연준이라는 예티(히말라야 설산의 거인)가 자이언트 스텝을 밟게 되면, 전 세계에서 유통되는 달러 유동성이 줄어들게 된다. 그 결과 전 세계 외환시장에서 달러는 강세를 보이고 기타 통화들은 약세를 보이게 된다. 달러 금리가 치솟고 외국에서 떠돌던 달러 자금이 미국으로 환류되기 때문에 기타 국가의 자본수지(외환의 유출입)가 악화할 가능성이 커진다. 기타 국가는 대미 수출 상품의 가격이 낮아지기 때문에 수출이 증가할 수도 있지만, 수입 원자재 가격이 상승하기 때문에 경상수지(상품의 수출입)가 호전된다는 보장이 없다. 수입 원자재, 특히 달러로 결제되는 중동산 석유 가격의 상승이 불 보듯 뻔하기 때문에 국내 물가가 상승하게 된다. 만약 기타 국가의 중앙은행이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금리를 인상하게 되면,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위축된 국내 경기가 더욱 위축될 것이고, 대출 부담이 큰 경제 주체들의 도산이 이어지면서, 소비와 투자가 다시 위축되는 악성 고리가 형성될 것이다. 누구나 예측할 수 있는 이러한 암울한 시나리오 때문에 연준의 자이언트 스텝이 두려운 것이다.
최근 언론보도에 의하면 ‘자칭’ 신흥국 중앙은행 총재 한 분이 ‘인플레이션 파이터로서 빅 스텝도 고려’하고 있으며 향후 ‘세속적 경기 침체(secular stagnation)가 발생할 수 있다’고 여러 차례 발언했다고 한다. 세속적 경기 침체란 장기적 경기 침체를 의미하는 은어로, 미국의 경제학자 래리 서머스가 연준의 양적 완화 정책을 비판하면서 10여 년 째 그 논거로 주장하고 있는 슬로건 같은 말이다. 물론 최근의 경제 상황을 살펴보면 ‘결론적으로는’ 그가 옳아 보인다. 하지만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이 초래한 곡물 시장과 원유 시장의 충격, 중국의 제로 코로나 정책이 초래한 글로벌 공급망 차질 등 누구도 예상치 못한 변수들이 인플레이션과 금융 불안을 초래한 부분도 만만치 않다.
제주 대정향교에 가면 의문당(疑問堂)이라는 작은 건물이 있다. 추사 김정희 선생이 어린 학동들에게 ‘항상 의문을 품고 살라’는 의미에서 직접 현판을 써주었다고 한다. 지금도 유효한 지혜로운 말씀이라고 생각한다. 이 시점에서 잠시 불안을 멈추고 ‘의문을 하나 가져보자.’ 첫째, 국내총생산(GDP) 기준 세계 10위 실물경제를 보유한 국가가 유독 화폐금융 부문만 신흥국 수준이어야 하는 이유가 뭘까? 둘째, 세속적(secular) 경기 침체가 존재한다면 이와 반대로 신성한(sacred) 경기 침체나 신성한 인플레이션도 존재하는가? 셋째, 강만수 초대 기획재정부 장관이 최근 지적했듯이 국내 인플레이션의 발생 원인이 국내적 경기 과열이 아니라 글로벌 공급 충격에 기인한다면, 신흥국 중앙은행이 연준의 자이언트 스텝을 흉내 내는 것이 유효한 정책일까? 최근 AP통신은 “연준의 금리 정책은 성장을 유지하면서 낮은 수준의 물가를 유지하기에는 우둔한 도구(blunt tool)”라고 논평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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