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가 '데모'인 이유요?..그곳엔 평생 경험 못할 삶들이 있어요"
여성주의 판타지 <여자들의 왕> 출간
남성 중심의 서사 뒤틀어···싸우는 여성들의 화끈한 이야기
한국의 입장에서 2022년 부커상의 최대 성과는 무엇일까. 소설가 정보라의 ‘재발견’이다.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후보작 6편 가운데 이름을 올린 정보라의 <저주토끼>는 국내에서 2017년 출간됐다. 영국에서 먼저 ‘정보라’를 알아봤다. 세계 3대 문학상으로 손꼽히는 부커상이 <저주토끼>를 주목하면서 한국도 5년 만에 정보라를 진지하게 주목하기 시작했다. ‘아쉽게도’ 수상하진 못했지만 정보라는 부커상에서 얻어올 수 있는 건 다 얻어왔다.
“수상은 기대하지 않았어요. 부커상을 한 나라에 두 번 준 게 미국밖에 없어요. 인터내셔널 부문 수상작 <모래의 언덕>은 힌디어를 영어로 번역한 첫 소설이죠. 첫 번역의 위용을 이길 순 없어요. 작가들을 만나고 낭독회를 하면서 다른 작가들의 삶과 독자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던 것이 정말 좋았습니다.”
최근 ‘여성주의 판타지’ 소설을 엮은 소설집 <여자들의 왕>(아작)을 펴낸 정보라를 지난 1일 전화로 인터뷰했다.
정보라는 2022년 부커상 최대 성과를 “한국 번역가의 승리”라고 말한다.
“부커상 최종 후보 여섯 작품 가운데 번역가가 백인이 아닌 사람은 안톤 허밖에 없었어요. 맨부커상을 받은 한강의 <채식주의자>, 맨부커상 후보에 오른 황석영의 <해질 무렵>도 영국인 백인 번역가가 번역했어요. 백인 번역가가 아시아 문학을 발굴해야만 인정받는 관행이 있었어요. 한국인 안톤 허가 그 벽을 깨고 1차 후보작에 두 작품(박상영 <대도시의 사랑법>, 정보라 <저주토끼>)을 올렸어요. 한국 번역의 승리입니다.”
정보라는 영국에서 뜨거운 인기를 맛보았다. 런던 대형 서점에 <저주토끼> 재고가 남아있질 않았고, 현지 독자들의 반응도 뜨거웠다. 정보라는 그 열기를 그대로 안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정보라는 “부커상 광풍”으로 쏟아지는 청탁에 “내년 말까지 소설만 써야 할 것 같다”고 했다.
<여자들의 왕>은 이전에 썼던 여성주의 판타지 작품들을 모아놓은 소설집이다. 그동안 남성들 중심으로 쓰여왔던 전통적 서사들을 비틀어 여성이 주인공으로 전투하고 강인한 모습을 보여주는 작품들이 주를 이룬다.
‘공주·기사·용’ 3부작이 대표적이다. 악한 용에게 붙잡혀 높은 탑에 갇혀 있는 공주, 용을 무찌르고 공주를 구출하는 서양의 전통적인 기사 이야기는 두 번, 세 번 비틀어진다. 칼을 차고 건들거리는 공주, 알고보면 착하고 다정한 용, 마녀의 마법에 넘어가버린 기사…. 하지만 재미있기만 한 건 아니다. 전통적 서사를 비틀며 주어진 각자 운명 속에서도 주체적 선택을 하며 성장해가는 모습이 감동적이다. 정보라는 “공주를 완전히 다른 이미지로 바꿔보고 싶었다. 온실 속 화초처럼 자라난 여성 청소년이 성장하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쓰다보니 주변의 왕비, 기사 등 인물들도 같이 성장하게 됐다”고 말했다.
‘여자들의 왕’ ‘잃어버린 연대기’도 피 튀기며 전투하는 여성이 나오는 이야기로, 기존 남성 중심 서사를 뒤집는다. 정보라는 “어떤 장르에선 남자들만 나오고, 로맨스에선 여자들만 나온다. 여성은 연애, 남자들은 싸움질하는 모습으로 과대대표된 장르문학 관습을 깨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문제들이 선명해지고 해결책이 명확히 보여
과학소설작가연대 대표로서 장르문학 작가들의 영역 확장할 것
정보라는 부커상 이후 쏟아지는 관심을 “부커상 광풍”이라고 표현했다. ‘부커상 광풍’이 방해하는 것이 하나 있으니, 정보라의 ‘취미 생활’이다. 정보라는 공개적으로 자신의 취미가 ‘데모’라고 말해왔다. ‘데모’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었다.
“2014년 2월 아는 교수님 부친상에 조문을 갔어요. 바로 옆에 부산외대 경주리조트 붕괴로 숨진 학생의 빈소가 있었죠. 학생의 영정을 본다는 게 충격적이고 괴로운 경험이었어요. 두 달 뒤, 세월호가 침몰했어요. 임시분향소에 갔는데 어린 학생들이 너무 많았어요. 세상이 끝나는 느낌이었죠. 대학생이 죽고 고등학생이 죽고…다 죽으면 어쩌지, ‘멸종’이란 공포가 다가왔죠. 뭐라도 해야겠단 생각에 세월호 유가족들이 7월 단식을 시작했을 때 달려가 서명받는 일을 도왔어요. 전장연(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이 없었다면 세월호 농성장은 무너졌을 거예요. 유족들이 탈진하면 지하 농성장에서 쉬게 해주고 도와주면서 말 그대로 밑에서 받쳐주셨어요. 제 인생에서 너무 괴로운 시기였는데, 세월호 농성장에서 함께한 여러분들 덕분에 버틸 수 있었습니다.”
그때 농성장에서 만난 말레이시아 사람들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2014년 우크라이나 돈바스 전쟁이 시작되고 난 뒤,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 반군을 사주해서 여객기를 격추해 잔해가 영토에 떨어진 사건이 있었다. 당시 러시아의 비협조로 4년 동안 시신조차 찾지 못했다. 비행기에 타고 있던 네덜란드인들이 유럽의 백인 변호사를 선임해 소송을 하자 그제야 잔해가 공개되고 러시아제 미사일의 파편이 발견됐다. 말레이시아 사람들은 정보라가 세월호 사건에 대해 설명하려 하자 “우리도 안다”고 답했다. “저는 서명을 받으면서 그분들을 위해 할 수 없다는 게 마음이 아팠다. 당시 경험한 감정의 진폭은 사람이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고 말했다.
정보라는 전장연이 진행한 ‘출근길 지하철을 탑니다’ 시위에 부커상 시상식 참여를 위해 영국에 가기 전까지 함께했다. 임종린 파리바게뜨 노조 지회장이 노조 탄압에 맞서 단식투쟁을 할 때도 일정상 함께하지 못했다. 부커상 시상식장에서 그는 “사람이 죽어가는데 화려한 데 가서 잘난 체를 하고 있을 때인가 생각도 들었다”고 말했다.
결혼 후 포항에서 살고 있는 그는 이제 포항지역에서 일어나는 ‘데모’에 함께한다. 최근엔 포스코에서 사내 성폭력 사건을 무마시키려 한 것에 항의하는 집회에 함께했다. 그는 “데모에 나가면 평생 경험하지 못할 여러 가지 삶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또 경험으로 알고 있지만 뭐가 잘못됐고, 어떻게 해결할지 알 수 없었던 문제들이 선명해진다”고 말했다.
부커상 측은 <저주토끼>에 대해 “정보라는 환상적이고 초현실적인 요소를 활용해 현대의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의 참혹한 공포와 잔혹함을 이야기한다”고 말했다. 그에게 ‘데모’는 참혹하고 공포스러운 세상에 대한 또 다른 이야기의 장이자, 실천의 장인 셈이다.
‘부커상 광풍’에 휩싸인 그에게 앞으로 계획을 물었다. 한국과학소설작가연대 대표인 정보라는 “소속 작가들을 비롯한 장르작가들의 지면을 넓혀보고 싶다. 제가 대표 임기에 있는 동안 좋은 일이 벌어졌다. 작가들의 창작활동을 최대한 지원할 수 있도록 활동해 영역을 넓히고 싶다”고 말했다. 정보라는 자신을 ‘장르작가’라고 하는 데 망설임이 없다. 그는 지금까지 그래왔던 대로 자신의 이야기를 써나갈 테지만, 그 영역은 광대히 확장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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