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동원 피해자 측 "민관협의회, 절차적 요건만 위한 것 의심"
[이재호 기자(jh1128@pressian.com)]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문제 해결과 관련한 민관협의회 1차 회의가 열리는 가운데, 피해자 측은 법률대리인을 통해 이번 협의회가 사전에 정해진 안을 승인하는 절차적 과정만을 위해 마련된 것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했다.
4일 서울 도렴동 정부서울청사 별관 외교부 청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가진 일본제철, 미쓰비시중공업, 후지코시 상대 강제동원 소송 피해자 대리인 측은 "한국 정부가 협의회를 통해 사전에 내정한 안에 대해 절차적 정당성만을 갖춰주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 강한 의문을 제기하며, 이러한 의문이 발생하게 된 상황에 유감을 표명한다"고 밝혔다.
피해자 대리인인 법무법인 해마루의 장완익 변호사는 "한국과 일본 기업의 자발적 출연으로 조성한 300억 기금으로 대위변제를 하는 안이 양국 정부에서 조율 중이라는 언론 보도가 있었다"며 "이는 대리인·지원단이 그동안 한국 정부로부터 전혀 고지받지 못한 내용이었고 위 보도에 대해 외교부의 특별한 반박도 없었다"며 이같은 입장을 표명하게 된 배경을 설명했다.
대위변제 안은 일본의 가해 기업 대신 한국 정부 또는 한국이나 일본 등에서 기금을 마련해 피해자에게 먼저 배상하고 이후에 일본 측에 이를 청구하는 방식을 의미한다.
장 변호사는 "①한국 정부가 300억 안을 유력한 안으로 판단하고 있는지, ②300억 안을 일본 정부와 조율하는 단계인지, ③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이러한 보도가 이루어진 경위를 확인하였는지, ④ 외교부 등이 위 보도에 대해 왜 적극적으로 대응을 하지 않았는지를 확인받고자 한다"고 밝혔다.
역시 피해자의 대리인인 법무법인 해마루의 임재성 변호사는 "한국 정부에 '강제동원 피해자 대리인과 일본 기업과의 협상'이 성사되기 위한 강력한 외교적 노력을 요청한다"고 말했다.
임 변호사는 "대리인·지원단은 2018년 대법원 판결 선고 이후 일관되게 미쓰비시중공업, 일본제철 등 강제동원 가해 기업들에게 협상을 요구해왔다"며 "그러나 3년이 지나도록 협상은 물론 일말의 의사소통조차 전혀 이뤄지지 못했다"고 전했다.
그는 "강제동원 문제는 오랜 시간 피해자와 가해 기업이 소송을 벌여온 사안이고 대법원 판결 역시 일본 기업에 대한 것"이라며 "피해자들과 일본 기업이 만나 논의를 하는 것이 순리"라고 지적했다.
임 변호사는 "한국 정부의 외교적 노력으로 피해자-기업 직접협상이 성사된다면, 대리인·지원단은 피해자 분들의 동의를 구해 협상 기간 중 집행절차에 대한 조정을 검토할 것"이라며 "협의회에서도 이 안을 제안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강제동원, 해결책 있나
피해자 배상과 관련해 대위변제 방식이 거론된 이유는 일본의 가해 기업이 한국 대법원의 지난 2018년 10월 30일 강제동원 피해자에 대한 배상 판결 이후에도 이를 이행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당시 한국 대법원은 당시 판결에서 일본제철(옛 신일철주금)에 1인당 1억원 씩 지급하라고 판결한 바 있다. 그런데 판결 이후에 일본 기업의 배상은 이행되지 않았다.
같은해 11월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한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소송에서도 법원은 피해자의 손을 들어줬지만, 이 기업 역시 판결을 이행하지 않고 있다.
이에 따라 피해자들은 해당 기업들의 한국에 있는 자산을 압류 및 매각하는 방식을 법원에 신청했고, 대구지법 포항지원은 피해자들의 신청을 받아들여 지난해 12월 30일 일본제철의 국내 자산 현금화를 위한 매각명령을 내렸다.
미쓰비시중공업의 경우 지난해 9월 27일 대전지법이 해당 기업측으로부터 압류한 약 5억 원 상당의 채권(상표권·특허권)을 매각하라는 판결을 받았으나 항고 중인 상태다.
이 자산매각명령에 대한 판결이 이르면 올해 가을경에 이뤄질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오면서, 한일 관계 개선을 주요 외교 국정 과제로 상정하고 있는 윤석열 정부 입장에서는 법원의 결정 전에 외교적 해결 방안을 마련하는 것이 절실해졌다.
박진 외교부 장관이 24일 <YTN> '뉴스Q'에 출연해 강제동원 사안에 대해 "긴장감을 가지고 속도감 있게 진행하겠다"고 밝힌 배경도 여기에 있다.
문제는 가해 기업이 한국 대법원의 판결을 따르지 않겠다는 뜻을 확실히하고 있고, 일본 정부 역시 기금을 조성하더라도 이미 1965년 청구권 협정으로 이 문제가 해결됐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어 가해 기업을 참여시킬 가능성이 낮다는 데 있다.
결국 가해 기업은 빠진 채 한일 양국 또는 한국의 정부나 기업이 기금을 마련해서 피해자들에게 대법원 결정 배상액 대신 이를 지급하겠다는 것인데, 이는 피해자 측에서 원하는 사죄의 방식이 아니기 때문에 또 다른 논란을 불러올 수 있다.
특히 지난 2015년 한일 일본군 '위안부'합의 때처럼 정부가 이번에도 피해자들의 의견을 듣지 않고 일방적인 합의로 기금을 마련한 뒤 이를 통해 모든 문제가 해결됐다는 식의 입장을 견지할 경우, 피해자들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아 외교적 합의가 결렬되고, 그 사이에 법원의 결정을 통해 가해 기업 재산이 매각되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
일본과 피해자 측의 입장이 첨예하게 대립하면서 강제동원 문제의 빠른 해결을 통해 일본의 수출규제를 풀고, 이어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지소미아, GSOMIA)도 계속 가동하며 일본과 군사 협력을 강화하려던 윤석열 정부의 구상이 첫 관문부터 적잖은 난관에 부딪힐 가능성이 높다는 전망이 제기되고 있다.
한편 민관 협의회는 4일 오후 외교부 청사에서 조현동 외교부 제1차관 주재로 진행되고 있다. 전체 참석자에 대해서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이재호 기자(jh1128@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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